40대 남자의 빈소에서 하룻밤
"할머니 돌아가셨어"
라고 누나에게 카톡이 왔다. 아주 단순한 문장에 놀라기도 했지만, 바로 들었던 생각은 '갑자기'라는 말이 빠져있는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엄마인 친할머니는 돌아가신지가 오래 전이고, 이번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어머니의 엄마인 외할머니셨다. 외할머니께는 아내와 결혼을 하기 전에 인사를 드렸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요양원에 계시는 외할머니를 찾아뵙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 신생아라는 이유로 찾아뵙지 못했다. 아들이 신생아에서 벗어날 때쯤, 코로나 펜데믹이 시작되었고 이 때문에 단 한번도 찾아뵙지 못했다. 외할머니는 장난꾸러기인 내 아들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불효의 핑계를 찾자면, '코로나'다. 코로나 때문에 요양원에 계시는 외할머니를 아들과 찾아뵙는 것은 현실적인 일이 아니었다. 내가 간병인이 되어야 외할머니를 면회할 수 있는 시대. 엄마은 외할머니가 좋아하는 반찬도 지정된 간병인을 통해서 전달해야만 했다. 이렇게 3년이 지나갔다.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은 모두 코로나에 걸렸고, 이제는 실외에서 마스크를 벗어서 홀가분한 기분일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전문적 의학 지식이 없는 보통 사람인 내가 뭐라 이야기 할 수는 없으나, 그냥 코로나 때문에 돌아가신 것 같다. 요양원에서 코로나에 걸렸던 외할머니가 완치 후에 갑자기 증상이 안 좋아지셨다고 한다. 외할머니를 가장 많이 찾아뵙던 우리 엄마 말을 들을 들어도 비슷하다.
이제 내 나이가 마흔이 넘었는데, 조문객을 한 번도 안 받아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코로나 이전과 이후에 장례식장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코로나 이전 장례식장은 전반적으로 침울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장례식장은 이제까지 나의 사회생활이 얼마나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에 장례식장은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달라졌다. 주변에도 부모님이 코로나 감염으로 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시면 저 멀리서 화장이 되는 모습을 볼 수 밖에 없었다. SF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전신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의 부모님의 관을 들고 화장터로 가는 모습을 마스크를 쓰고 지켜봐야 한다니 끔찍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물론 나도 아주 현실적으로 회사에서 보내준 화환의 사진을 찍어서 회사 메신저에 올렸다. '바쁘신 와중에 감사합니다!' 회사 메신저에 내가 올린 추모의 글에 댓글을 달아준 직원들이 있어서 ‘굽신’ 이모티콘으로 보답했다.
오후에 도착한 경기도 의왕시 장례식장은 아주 한산했다. 복잡하게 외할머니의 이름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특실, 1, 2호실 총 3개실로 구성된 장례식장에는 외할머니의 빈소 뿐이었다. 이제 다섯 살인 내 아들은 아직 돌아가신 왕할머니가 누구인지 실감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내 엄마인 할머니가 돌아가신 걸로 착각해서 ‘아이고’ 하며 깜짝 놀라기도 했다. 표준어와 상관없이 나는 ‘왕할머니'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설명을 해보려고 노력했다. '니가 좋아하는 할머니의 엄마가 돌아가신 거야'라는 내 빈약한 설명을 다섯 살 아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평일에 경기도 의왕시 장례식장까지 찾아온 사람들은 왕할머니의 친인척과 엄마와 아빠가 다니시는 교회의 교인들 정도였다. 이외에는 정말 오랫 만에 보는 친척들이 있었다. 마스크를 벗고서도 몇 마디를 나누어야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사이들. 중국으로 출장을 갔다가 코로나 봉쇄로 오지 못한 친척, 아니 왕할머니의 손자도 있었다. 왕할머니의 빈소에는 코로나라는 그림자가 있었다. 1호 장례식장에 준비한 음식이 남을 정도로 한적했던 하루가 지나고 왕할머니의 자녀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비교적 호상으로 볼 수 있는 왕할머니의 영면 덕에 평소보다는 홀가분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오갔고, 내일 아침에 장지로 갈 것을 고려하여 촛불이 하나씩 꺼지는 것처럼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문상객들이 깔고 앉았던 방석이 이불 대용으로 바닥에 깔리고, 여기저기서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곱게 한복을 입은 왕할머니가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는 영정사진이 놓인 추모 공간을 제외하고, 장례식장 1호의 조명은 모두 꺼졌다. 냉방기까지 끄면 조용할 것 같았던 공간은 냉장기를 껐지만 전혀 조용하지 않았다. 음료와 술을 보관하는 대형 냉장고에서는 '반지의 제왕' 원정대의 목적지인 사우론에서나 들을 법한 소음이 계속됬다. 크고 기능에 충실한 기계가 할일을 하는 것뿐인데, 예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주변에서는 잠을 청한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산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일이 있는 것이었다.
산자들은 오전에 아침밥을 먹고 11시에 장지로 출발해야만 한다. 외할머니의 시체를 화장장으로 모셔서 태우고, 유골함에 담아서 가족 묘지로 가야만 한다. 산자에게는 빡빡하게 할일이 남아있다. 오전 1시, 문득 벗어놓은 검은 양복 재킷 소매에 끼워진 상주 완장이 눈에 들어왔다. 초등학생 때 팝의 황제라고 불리던 마이클 잭슨도 저런 완장을 차고 있었는데...마이클 잭슨은 세상의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해서 완장을 착용했다고 했다. 97년간 세상에서 사셨던 왕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무엇에도 고통받지 않으시겠지? 화려한 무대 위의 마이클 잭슨도 결국 혼자 쓸쓸히 잠든 것처럼 이제 나고 잠이 들어야할 시간이었다. 졸음이 몰려와서 눈이 감겼지만, 내일 아침에 눈을 뜰 수가 있을지 갑자기 두려워졌다. 찜질방에서 쓸법한 낡은 베개를 베고 누워 눈을 감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바로 시야가 어두워졌다.
‘웅~’하는 대형 냉장고 소리와 함께 내 귓가에 마이클 잭슨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데인져러스~!” 이어서 초등학교 시절에 봤던 ‘스릴러(Thriller)’ 뮤직 비디오가 내 눈 앞에 재생됬다. 나는 껄껄껄 웃으며 내일 아니 몇 시간 있다가 깨어날 수 있을까?
‘아~하하하하하아, 하하!’
굿바이, 빈센트 프라이스 아니 나의 왕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