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런 어플 체험기
나는 달리기를 하면서, 아니 달리기를 핑계로 이것저것을 많이 산다. 내일 아침에 내가 일어났을 때 지네로 변신해도 문제가 없을 만큼 많은 러닝화가 있다. 러닝화뿐이 아니다. 새로운 러닝용 시계, 스포츠 글라스 등 수많은 러닝 용품들을 사고 있다. '이 많은 러닝 용품이 나에게 필요가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돈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되는 소프트웨어이다. 정확히는 스마트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앱(App)이 있다. 러닝용 트랙커(tracker)로 통칭되는 이런 앱 중에서 대표적인 것인 #스트라바 가 있다. 이외에도 유명 스포츠 브랜드들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인수하거나 사용하고 있는 앱들도 있고, 국내에서 개발한 러닝용 트랙커 중에서 가장 사용자가 많은 것은 한빛소프트가 개발한 #런데이 가 있다. 수많은 러닝용 트랙커를 사용해보았고, 각 트랙커들의 특징이 있으나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다 어제 아주 뒤늦게 좀비런을 깔아서 사용해보았다.
앞서 언급한 '런데이'는 한빛소프트가 게임도 만드는 회사이기 때문에 음성으로 안내되는 프로그램과 버추얼 레이스(virtual race)에 더빙은 아주 잘 되어있다. 무선 이어폰으로 음성 안내를 들으면서 지루하지 않게 달릴 수가 있다. 좀비런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뭐 뻔하지 않은가? #워킹데드 로 대표되는 좀비 영화나 TV 시리즈를 보면, 좀비들의 모습은 늘 비슷하고, 차량이 없는 상태에서 좀비가 아닌 인간이 좀비를 만난 경우에는 달릴 수밖에 없다. (물론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은 어디서 인가 멀쩡한 차를 구해서 잘 타고 다닌다) 내가 달리는 동안에 좀비 음성이 좀 들리겠지 정도로 예상을 했다. 이메일 주소로 가입을 하고 좀비런을 시작했다. 야외 혹은 실내에서 달리는지, 음악을 들으면서 달릴 것인지 등을 선택을 하고 달리는 시간은 35분으로 초기값이 되어 있었다. 달리는 시간은 조절이 가능해서, 35분보다 짧게 달릴지 고민을 하다가 그대로 두고 스테이즈 1을 시작했다.
'Jolly Alpha Five Niner'라는 타이틀로 음성으로 상황을 묘사한다. 헬기가 추락하고 여기저기서 총소리와 좀비들의 소리가 들린다. 가상의 상황이지만 조금은 긴장을 하면서 달리게 되었다. 이후에는 Radio Abel이라는 가상의 방송이 나를 'Runner 5'라고 부르면서, 어떤 길로 도망치면 된다고 알려준다. 회화 몇 마디를 할 수 있는 내 영어실력으로 들어도 매우 확연한 영국식 영어 방송을 들으면서 지루하지 않게 잘 달렸다. 문제는 3km 지점에서 생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왼쪽 종아리 쪽이 심하게 뭉쳤다. 통증이 느껴지는 정도를 넘어서 뛰기가 어려운 상황이 됬다. 달린 시간을 체크해보니 아직 반도 달리지 못했다. 통증이 느껴지는 종아리를 고려해서 착지를 조정하면서 느리게 뛰어보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몇 번이나 조금 달리다 쉬기를 계속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조금 부상을 당한 인간이 된 느낌이라서 게임에 대한 몰입감이 커졌다. 이게 뭐라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속도는 많이 느려졌지만 달리기 시작했다. 종아리 때문에 다리 전체가 아팠지만, 근처에 좀비가 있다. 50m 근처다. 20m 근처다라는 음성을 들으니 원초적으로 더 빨리 달릴 수가 있었다. 좀비를 피해서 달리고 있는데 저 멀리 지는 붉은 해가 보였다. 드라큘라 백작을 잡기 위해 미친 듯이 마차를 몰던 반 헬싱 교수를 생각하면서 달리다 보니 붉은 해가 성내천을 가로지른 다리에 가려졌고, 해가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다행히 다리 상태는 1km를 5분 페이스(pace)로 달릴 수는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리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남은 시간을 보니 '최후의 5분'이라는 군가가 떠올랐다. 이제 약 4분 정도 남았다. 약 2분 정도가 남으니 희망적인 메시지가 들리기 시작한다.
"러너 5, 니가 해낼지 몰랐다. Abel Township에 도착하면 쉴 수가 있다. 뛰어라! 문을 열겠다!!"
'땡!' 35분이 되었는데, 당황스럽게도 게임이 자동으로 종료되지 않았다. 내가 END 버튼을 눌러야만 종료가 되는 방식이었다. 다리도 아프고 충분히 힘들었기 때문에 나의 때늦은 좀비런을 마쳤다. 마치고 나서 살펴보니 내가 획득한 물품들이 있었다. 게임을 하면서 아이템을 모으고 아이템을 활용해서 게임에 더 몰입하게 되는 평범한 구조였다. 그래도 내가 좀비런을 하면서 몇 번이나 쉬었는지 등을 Timeline이라는 메뉴로 쭉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스포츠 트래커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마사지건을 드린 것을 후회했다. 종아리는 생각보다 심하게 뭉쳐서 마사지볼로도 잘 풀리지가 않았다. 자기 전까지 꽤 왼쪽 종아리를 마사지하고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고, 정신없는 지하철 출근길은 좀비런은 물론이고 아픈 종아리까지 잊게 했다. 그리고 사무실에 도착해서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좀비런' 속의 Sam이 나에게 보낸 편지였다. 가짜인지 알고 있지만, 여하튼 어제 좀비런의 추억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코로나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달릴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재미난 기술들과 장비들이 달리기에도 도입되고 있다. 고스트 페이서 AR 안경도 이런 시도 중에 하나다.
https://www.ar.rocks/posts/ghost-pacers-ar-glasses
존재하지 않는 Sam이 보내기는 했지만, 내가 받은 손편지와 주변 누군가와 잡담, 이런 것들이 아직 기술로는 대체될 수 없는 인간적인 것들이다. '기술(tech)'은 좀비처럼 나를 뒤따라 오지는 않는다. 고스트 페이서(Ghost Pacer)처럼 내 앞을 힘차게 달리고 있다. 인간이 나는 기술이 할 수 없는 것을 찾도록 계속 노력해야 한다. 종아리가 아파도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기술이라는 경쟁자는 나를 더 빨리 달리게 도와줄 것이다!
"You can not train alone and expect to run a fast time"
- Eliud Kipchoge(엘리우드킵초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