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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osumer Jul 18. 2022

[육아일기 20220716-7] 용구니아지트 방문기

방학 때 갔던 시골 할머니 집 같은 곳에서 1박 2일

 한창 산에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랑 집 근처 관악산을 너무 많이 갔다.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가 관악산에 같이 가자고 해도 따라가지 않았다. 사실 지겨운 것도 있었지만, 중학교 때 한창 팔팔하던 나에게 관악산은 기상 관측소가 있는 연주대까지 올라간다고 해도 좀 시시해졌다. 산을 다시 다니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다녔던 홍보대행사에서 고객사로 '고어텍스'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고어텍스는 B2B뿐 아니라 B2C 이벤트도 진행을 했는데, 아웃도어 브랜드들이 진행하던 고객 산행 이벤트도 그중 하나였다. 산행을 계기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는 아직도 연락을 하는 편이다. 벌써 10년이 넘은 기억들이지만 산행 중에 있었던 일들은 기분 좋은 기억이 훨씬 많기 때문이 아닐까? 주말 다녀온 곳도 산 덕분에 알게 된 형님이 운영하시는 곳이었다.


 평창에 위치한 시골집을 새 단장한 곳으로 방학 때 갔던 시골 할머니 집과 같은 건물은 화장실 및 부엌은 현대적으로 고치고, 카라반 한 동, 직접 만드신 널찍한 돔 공간이 3동이나 있는 곳이었다. 다자녀가 있는 한 가족이 가서 놀아도 좋고, 한 팀으로 볼 수 있는 가족 2팀이 가서 놀기에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해외 원정 산행 경험도 많으신 형님은 돔 공간 한 동은 예전의 물건들을 모아놓은 추억 박물관으로 만들어두셨다.

 또 다른 돔 공간에는 여름에 아이들이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간이 풀장을 만들어두셨다. 다섯 살 아들은 자신이 들어가서 놀기에는 널찍한 간이 풀장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형님의 이름을 딴 '용구니아지트'는 평창 고지대에 위치해있어서 구름이 산에 부딪칠 때마다 조금씩 비가 내리기는 했지만, 카라반 앞에도 큰 타프가 설치되어 있어서 비를 피하기는 충분했다. 아이들은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키즈 채널이 나오는 추억 박물관에 자리를 잡았다.

형님께는 도착해서 아지트 공간 안내를 받을 때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말씀을 드렸다. 훈제 삼겹살을 거의 다 만들었고 형님께 전화를 드렸다. 형님께서는 거처인 근처 집에서 오셔서 고기랑 먹을 쌈야채를 가지러 가자고 하셨다.


 서울이 아닌 수도권만 하더라도 30평이 넘는 집이라고 하면, 집값이 억대라서 말을 꺼내기만 해도 참 부담스럽다. 형님이 직접 가꾸신 밭의 크기는 집 크기를 이야기하는 단위인 '평'을 기준으로 본다면 정말 어마어마했다. 일반적인 쌈야채인 상추 등 외에도 바질까지 재배하고 계셨다. 정말 큰 채반에 담기 시작한 쌈야채가 금세 가득 쌓였고, 바로 위에 있는 고추는 씻지 않고 바로 먹었는데도 참 시원하고 맛이 있었다.

 쌈야채를 씻고, 훈제 삼겹살과 닭볶음탕을 상차림으로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시작할 때, 형님께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시라고 말씀을 드렸다가 혼났다. 너희가 몇 시간 동안이나 식사 준비를 했는데 왜 차린 것이 없다고 하느냐고 말씀하셨는데, 생각해보니 정말 맞는 이야기였다. 형님께서는 앞으로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예전에 형님과 산행을 마치고 나면 일행들과 술도 많이 마셨는데, 형님은 이제는 반주만 곁들이는 정도였다. 형님은 할 일이 있다며 빨리 저녁식사를 마치고 일어나셨다. 바질을 손질해서 바질 페스토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다.


 다행히 비가 그쳐서 야외에서 장작으로 불멍도 하고, 아이들에게 마시멜로도 구워주고 하루를 마감했다. 캠핑을 왔다면 정말 쉴새가 전혀 없는 하루였겠지만, 이번 아지트 방문은 설치해야 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좀 여유가 있었다. 카라반 안에 넓은 침대에는 아들과 아내가 누워있고, 안쪽에 있는 침대에 누웠다. 누워서 오늘 아들에게는 어떤 것이 가장 재미가 있었을지 궁금했다. 사진으로만 보여주었던 아들보다 큰 셰퍼드? 파리가 떠있다고 기겁을 해서 파리를 건져낸 간이 풀장? 노트북 자판이랑 비슷하게 생겨서 막 눌러보았던 타자기 자판? 아들은 할머니의 시골집과 같은 추억이 없어서, 가마솥이나 부뚜막과 같은 옛날 물건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깨끗한 공기나 싱싱한 쌈야채와 같은 것에도 관심을 가질 나이가 아니다. 카라반 침대에 혼자 누워서 그런 것인지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금방 잠이 들었다.


 아지트에서 아침은 캠핑과 비교하면 할 일이 적은 편이었다. 아지트를 둘러싼 싱그러운 초록색 쌈야채들 때문이었을까? 영화 '레옹(Leon)'에서 마틸다가 들고 있던 초록 화분을 생각하면서, 추억 박물관에 가서 LP 턴테이블로 스팅(sting)의 Shape of my heart를 들었다. 스마트폰으로는 터치 한 번만 하면 들을 수 있는 음악을 턴테이블과 앰프에 전원을 넣고, LP를 꺼내서 턴테이블에 올리는 일은 번거로웠지만 색다른 경험이었다. 듣고 있는 노래를 좀 더 소중히 다루는 느낌이라고 할까? 내가 30대까지 쓰다가 더 이상 수리를 할 수 없어서 가지고 있던 휴대용 CD 플레이어를 턴테이블 옆에 올려두었다.

 버리기는 아쉬워서 집 옷장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 추억 박물관의 턴테이블 옆이 더 잘 어울리는 자리였다. 집으로 떠나기 전에 형님이 만들어놓은 나무 프레임 앞에 아들을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나무 프레임 뒤로 산봉우리들이 산수화처럼 보여서 참 멋졌다.

 나의 추억 만들기에 더 몰두한 것 같은 아지트 방문이 아들에게는 어떤 추억이 되었을지 궁금하다. 어차피 지금은 아들에게 물어도 내가 원하는 답을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차를 타고 아지트를 떠나는데, 재배하고 있는 농작물도 옆에 여름철이면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는 잡초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아들에게 아지트 방문은 아직까지 기억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푸른 기억들이 건강한 추억이 되기를 바라며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서 고원을 내려왔다.

카오디오에 들리는 노래가 있었지만, 내 귀에는 스팅의 노래가 들렸다.

"That's not the shape, the shape of my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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