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철학자 최진석 교수는 인문학을 인간이 그린 무늬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소개하고 인문학의 핵심에는 역사학과 철학이 있다고 하였다.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는 최진석 교수의 정의에 비춰볼 때 인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의 책은 ‘약 135억 년 전’이라는 흥미를 돋우는 연대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먼 우주에서부터 지구를 조망하듯이 다가와서, 엄청난 넓이와 깊이의 데이터와 천재적인 통찰력을 조화시키며, 전지적인 시점으로 인류가 그린 무늬를 해설한다. 그리고 그의 책은 인류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묻지 않고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로 물었다. 욕망의 선택이다. 인류의 미래는 인류가 어떤 욕망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하라리는 인간이 그려온 무늬를 추적해오면서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해온 것으로 설명하였다. 인간이 새롭게 각성해온 능력은 죽음까지도 불가능한 영역으로 남겨두지 않고 극복할 문제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로인해 자연선택설에 의해서 스스로 진화하며 균형을 잡아온 생태계는 이제 어설픈 지적설계자인 인간에 의해서 그리고 그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균형이 깨어질 운명에 처해있는 것이다.
왜 현대 인류는 자신에게 연구를 통해 새로운 힘을 획득할 능력이 있다고 믿게 되었을까? 무엇이 과학과 정치와 경제의 연대를 구축했을까? 질문에는 질문자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 시선이 담겨져 있다. 질문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하라리는 인류가 무엇으로 인해 새로운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제하면서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인류가 가지게 된 새로운 믿음은 자신에게 연구를 통해 새로운 힘을 획득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모른다는 자각과 그래서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은 절대 진리와 신을 거부하고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처럼 읽혀졌다.
사피엔스를 읽으며 느끼는 불편감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진화론적 해석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화론적 세계관은 종종 사후설명적인 아쉬움과 한계를 보여준다. 내일 어떤 주식이 오를 것인지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오늘 오른 종목이 왜 올랐는지 설명하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진화론적이며 자연선택설 같은 관점으로 기술하는 역사의 흐름은 결국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흘러가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하는 의구심을 여전히 갖게 된다. 미래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기에 예상할 수 없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다. 필연적이 아니라 한명의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그렇게 물줄기가 변해왔던 것으로 읽고 싶은 마움이 있다.
무지의 발견은 지식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것도 명료한 지식의 존재를 말이다. 사피엔스는 지식을 발견하는 존재이지 지식을 창조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므로 하라리가 그의 책을 인간의 미래를 염려하듯이 마무리한 것에 비록 같은 시선은 아닐지라도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