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을 읽고

생각을 무겁게 만드는 책이니 글이라도 가볍게 써야지! 이런 생각을 했지만 의욕이 가상할 뿐 애초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쨍하게 뜨거운 햇볕에 이불을 소독하려 밖에 내어 걸고, 환기시키려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젖히고 은근히 흐르는 땀을 오히려 느끼며 노트북을 열었다. 자 이제 무슨 말을 할까? 단서가 잡히지 않을 때는 정리해서 써야지 하는 부담도 없이 그저 떠오르는대로 허공에 던지듯이 써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이 글은 그렇게 써도 좋을 것 같다.


도대체 삶이란 무엇일까? 질문을 던지고 나니 짜증이 느껴진다. 이런 식의 질문은 너무 오래되었고 평범하고 답도 없다. 누가 의욕을 가지고 답을 내어 보겠지만 그건 그 자신을 위한 답일 뿐 다른 이에게는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완전한 답을 내어놓을 수가 없다. 수학에 존재한다는 풀 수 없는 문제와도 같은 문제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삶이란 무엇일까 하고 질문을 할 때는 그저 순수하게 알고자 깊이 탐구하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답답함에 던지는 실용적 답을 구하려는 질문일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던져질 때는 필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일 것이다. 그런 상태가 존재할지는 모르나 완전한 의미에서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상태에 있다면 삶이란 무엇일까 하는 류의 질문을 던질까? 고통만큼 정신을 번쩍 차리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조금 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청소기를 돌리다가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딱하고 부딪혔는데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는 정신차려라 하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픽 웃었다. 이런 식이다. 커피도 나를 정신차리게는 못하지만 고통은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어 준다.


인간은 존엄한가? 존귀하다고 믿고 있었기에 반문하듯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다고 하더라도 예외가 존재한다면 그러하다고 정의할 수 없다. 존귀한 것은 존귀한 대접을 받는다. 하찮게 버려졌는데 어찌 존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니 모든 죽음은 동일하게 고독하다고 하여 고독사의 아픔을 달래보더라도 잔혹한 폭력에 의한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게 망가져버렸는데 어찌 존귀하다고 할 것인가! 존귀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린 아이에게 행동의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 그가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어른이라고 다를까? 어는 민족이고 어느 시대고 지옥과 천당에 대한 이야기가 존재할 것이다. 확인해보지 않았으니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러할 것이다. 인간 정신의 원형의 일부일 것이다. 천당과 지옥은 인간에게 삶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그런데 늘 이해 안되는 것이 있었다. 고작 60년 지금은 의학이 발달해서 80년을 산다지만 억겁의 우주의 시간과 비교하면 점도 되지 않을 미미한 시간을 살았는데 영원한 형벌을 받는 지옥의 개념은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다. 벌은 그 책임에 상응해야 해야 공정한 것이다. 장발장에게 내려진 벌도 억울하기 짝이 없게 과한 것이거늘 고작 한 인생을 그렇게 살았다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하다니! 왜 인간은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죄와 벌 이렇게 단순한 공식으로 말한 것이 아닌 듯 하다. 내가 나에 대해서 연민을 가지게 되면서 더욱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인간에게 책임을 물어야겠으나 그것은 어느 정도여야 할까? 하나님은 책임을 물으시는 분일까? 긍휼히 여기시는 분일까? 이 지구에서 살다간 수천억명의 인생을 하나님은 함께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희노애락을 함께 하실 것이다. 특히 이름 없는 부자보다는 거지 나사로를 위로하실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땅콩 박사 조지의 질문이 기억이 났다. 그가 어느 날 밤에 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다가 하나님께 질문하였다. 하나님은 왜 별들을 창조하셨나요? 하나님은 퉁명스럽게 대답하셨다. 너의 수준에 어울리는 질문을 해라. 그래서 조지는 다시 질문했다. 그럼 왜 저를 창조하셨나요? 뜻밖에도 하나님의 답변이 퉁명스러웠다. 그 질문도 네 수준을 넘는다. 그래서 조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흔하게 버려진 땅콩을 보고는 질문했다. 그럼 땅콩은 왜 만드셨나요? 하나님은 그제서야 나름 친절하게 대답하셨다. 그 답을 네가 찾아보거라. 아마 사실일 게다. 조지의 전기문에서 읽을 기억이 나니.


삶이 무엇일까 하고 질문할 수는 있으나 답을 찾기를 기대하지 말라. 너의 수준에 어울리는 질문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이다. 그리고 그 답은 너의 몸과 마음이 느끼는 고통이 정교한 센서가 되어서 알려줄 것이다. 고통이 주는 신호에 반응하여 입력을 바꾸어 가면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배워갈 것이다.

인간은 그리 존귀하지 않다. 다만 겸손하게 열심히 살아야한다.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인 인간은 존재하게 하신 명을 따라서 열심히 살아야한다. 우리에게 심겨진 고통과 즐거움이라는 센서의 신호를 지혜롭게 듣고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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