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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하거나 연민하거나

혐오하는 이유와 연민하는 이유가 다르지 않을 때가 많다. 흠이 있어서 가치가 없다고 느낄 수 있고, 그 흠 때문에 더 특별하게 여겨지는 대상이 있다. 연약해서 쓸모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고, 손길이 가기에 오히려 우리를 살리는 대상이 있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런데 연약함이나 흠이 아니라 거짓과 탐욕과 폭력 등의 악이라면 어떠한가?     


오래전에 보아서 확실한지는 자신이 약간 없지만 기억에는 영화 제5원소의 주인공은 거대한 악의 세력에 의해 멸망을 앞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지구에 왔고 인류의 역사를 배워가는 중에 전쟁과 살인으로 얼룩진 인류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 괴로워하는 이야기의 전개가 있었다. 이런 인간을 구원할 필요가 있는가?      


혐오할 것은 혐오함이 마땅하고, 연민할 것은 연민함이 마땅하다.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뛰어넘을 정도로 극단으로 구분되는 정도의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자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마땅히 혐오할 사람을 측은지심으로 대하는 일은 어렵다. 나는 저 높은 곳에 있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준은 못 되고 그저 손을 내밀면 잡힐 수 있는 우리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의 혐오는 정당한가? 나는 타인을 은근히 판단하는 그 기준으로 나를 저울질할 수 있는가? 타인이 볼 때 혐오스러운 나의 속 모습을 내가 스스로 바라보면 측은지심이 느껴진다. 관용과 용서 없이 삶이 지탱되질 않는다. 우리가 모두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들이겠지만 스스로 빛나는 존재는 아니다. 그래서 마음이 억울할 때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떠올린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 내가 나를 연민하듯 타인을 그렇게 대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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