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새롭게 만나다
뒷좌석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푸르렀다. 친구들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알게 된 지 한 달쯤 된 J가 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주눅 들어서 살아? 외모는 멀끔하지. 직장도 번듯하지. 널 지D(지현DJ의 줄임말이다)라고 부르는 팬들도 있지. 내가 김지현이면 떵떵거리고 살 것 같은데?”
갑자기 받은 질문에 하늘이 과속방지턱을 넘듯 덜컹거렸다. 마침, 나는 운전석 바로 뒤 오른쪽 좌석에서 몸을 접은 채로 앉아 있었다. 쭈글쭈글 움츠린 어깨를 살짝 폄과 동시에 생각지도 못한 말이 툭 튀어나왔다.
가난해서 그래.
나도 놀란 대답을 하고 자신에게 다시 물었다. 네가 정말 가난해서 그래? 얼마나 가난한데? 가난을 느낀 적이 언제인데? 그게 진짜 가난이라고 생각해? 모든 질문의 답은 매일 드나들 때마다 치워도 생기는 거미줄로, 녹슨 것이 분명한 끼익 소리를 내는 철문으로, 아무리 닦아도 찌든 때가 지워지지 않는 현관으로, 오래된 열선 탓에 온기가 들쭉날쭉한 장판으로, 가끔 문을 열다가 빠져버리는 문고리로, 칠이 벗겨진 문지방으로, 마감이 찢어져 목재 그대로가 보이는 책상으로, 수납할 공간이 부족해 개켜진 옷이 쌓인 책장으로, 여름의 습기와 겨울의 외풍을 오롯이 맞은 곰팡이 가득한 창틀로, 그 습기를 나눠 먹어서 눅눅한 매트리스로, 계단을 두 칸 올라가야만 용변을 볼 수 있는 한 평 남짓한 화장실로, 팔로 눌러서 무너졌다가 다시 설치한 세면대로, 수전 손잡이를 온수 쪽으로 뒀는데도 도통 따뜻해질 줄 모르는 냉수로, 소화불량으로 식도를 할퀴는 역류된 위산처럼, 배수관을 거슬러 올라 음식 찌꺼기와 용변이 뒤섞인 물을 내뿜는 화장실의 수챗구멍으로, 정체불명의 액체는 빠지고 라면스프 같은 흔적만 남은 화장실의 타일로, 천장에 찌든 때를 머금고 있는 유일한 환기구로, 잊을만하면 생기는 역류가 남긴 은은하고 쿰쿰한 악취로 향했다.
20년 동안 나는 가난 앞에서 쭈그려 앉아만 있었다. 마이크 앞에 설 때의 조명과 일을 마치고 눕는 눅눅한 침대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라디오를 통해 흐르는 쾌활한 음성은 집에만 들어가면 침묵으로 변했다. 직장에서의 모습이 꿈인지, 집에서 무릎이 늘어난 츄리닝을 입고 있는 게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아니. 출근해서의 모습만 나의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땅보다 아래에서 거주하는 우울감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자주 위를 바라보았고, 그만큼 내려앉았다. 때문에, 가족과의 공간은 그저 피하기만 했다. 상황을 받아들이거나, 수습하거나, 극복하려는 건 남은 구성원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집주인과 여러 번 전화해서 다세대 주택의 배수관을 원활하게 흐르도록 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당신이 직접 하수도를 매립한 뚜껑을 열고 들어갔다. 당신의 몸에 똥물이 튀는 것은 괜찮았다. 땀샘이 활짝 열릴 정도로 배수관 수술을 집도하고 나서야, 나머지 가족들이 화장실을 쓸 수 있었다. 압력밥솥에 밥이 비지 않게 하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하루를 살아가는 공간이 열악하더라도, 가족들의 배는 꺼뜨리지 않으려는 그녀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그녀는 길을 걷다가 가구 할인이라도 보이면 홀린 듯 들어갔다. 정작 아들은 바꾸고 싶다는 표현 한 번 하지 않았음에도, 책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에 가격을 물었다. 그녀는 때가 찌들어도 지워내겠다는 기세로 오래된 칫솔과 치약으로 타일을 문질렀다. 다시 역류가 될 것을 알면서도, 샤워기로 찌꺼기를 흘려보내고 수세미로 박박 닦았다. 또 하나의 가족인 악취를 없애는 건 동생이 책임졌다. 행인의 시선이 아래로 향해서 방 안을 보더라도 창문을 열고 환기를 했다. 각종 향초와 방향제로 자꾸만 집에 남아 있으려는 냄새를 쫓아냈다. 세 사람의 분투 덕에 끼니를 거르지 않았고, 씻을 수 있었고, 비교적 쾌적한 곳에서 일상을 보냈다.
언제까지 집안의 옷걸이처럼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응시하고 따라 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원래 겨울에도 냉수가 나오는 거라고 여기는 동생을 닮아 찬물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타일을 문지르는 어머니를 따라서 종종 수챗구멍의 머리카락을 휩쓸었다. 퇴근 후 집에 들어왔을 때 역류를 확인하면 조용히 창문을 열고 찌꺼기를 씻어냈다. 비로소, 가난이 감사해졌다. 경제적인 부족함이 없었다면 자기 잘난 맛에 취해서 살았을 게 분명했다. 결핍이 있었기에, 주눅 들 정도로 겸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난을 가난으로만 여기지 않게 하는 가족의 힘이 고마웠다. 어려움도 고마울 수 있음을 깨달을 즈음에 나는 결혼을 했다.
지현 씨. 이제는 확장이 필요해.
"반지하 20년 삶은 잘 알겠어. 다만, 지금도 힘들게 사는 사람이 참 많아. 어머님이 두 번의 암 치료를 하신 이야기도 잘 읽었어. 다만, 어머니 없이 자란 사람도 있어. 그들을 바라보는 글을 쓰는 건 어떨까?"
아낌없이 나의 결혼을 축하했던 회사 선배 W. 그의 질문이 내 세상을 조금 더 넓혔다. 그에게 나의 이야기를 공유하기 전까지, 가난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W를 비롯한 당신에게 내 이야기를 전하면서부터 경제적인 부족함이 작고 귀여워졌다. 어머니의 병환과 환자 가족의 피로는 절감되었다.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 사는 사람은 지금도 많다. 항암을 견디고, 다음 항암을 버거워하는 환자는 여전히 예약 대기 중이다. 나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사람의 마음을 담아 더 아래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글에 녹이련다. 말보다 일상의 행동이 더 중요함을 잊지 않는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만원 지하철의 문이 열린다. 탑승하는 사람의 가방에 달린 임신부 배지가 보인다. 노트북을 닫는다.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건다.
여기 앉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