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다시 잠들면 지각을 할 것 같은 애매한 시간. 새벽 4시 30분. 허리에 힘을 주고 침대에 앉았다. 잠든 손가락부터 천천히 깨웠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손목과 발목을 돌리면서 베란다 창문을 바라보았다. 손깍지를 끼고 시선을 하늘 위로 향했다. 크게 기지개를 켜면서 그의 마음도 나와 같았을지 생각했다. 매일 새벽마다 맨손체조를 빼먹지 않은 할아버지. 초등학교 여름방학이 되면, 한 달 정도 그의 집에 머물렀다. 사촌 동생과 주차장 겸 작은 마당에서 즐기는 미니 농구보다, 할아버지의 다락방이 나에게는 더 재미있었다. 자칫하면 굴러 떨어질 수도 있는 작고 높은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그의 보물창고에 도착했다.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책과 무슨 마음으로 쓰는지 모르겠는 한자와 한글이 뒤섞인 수많은 원고지. 그는 새벽마다 하는 체조처럼 만년필로, 때로는 펜으로 매일 글을 써서 모았다. 초등학교 국어 시간에만 글을 보고 읽었던 나에게 할아버지는 학생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매년 찾아오는 설과 추석마다, 그는 나에게 세종대왕이 찍힌 만 원짜리를 두어 장 건네며 이 말을 잊지 않았다.
공부 열심히 해라.
말처럼만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에게 돈을 받은 후, 은행 애플리케이션에 뜨는 ‘송금이 완료되었습니다.’와 같은 문구처럼 감정 없는 대답으로만 그쳐서 그랬던 걸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치를 때마다 목표했던 점수를 받은 적은 별로 없었다. 원했던 대학과 학과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적당히 타협하고 시작한 대학 생활 중에는 학사경고를 받았다. 아나운서로 지원한 지역 방송사의 필기시험까지 떨어졌다. 응시 지원비로 지급되는 봉투 속 세종대왕을 보니까, 용돈과 함께 건넨 할아버지의 조언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병중에 있는 그에게 닿지 못할 혼잣말을 되뇌었다. 죄송해요. 말씀하신 만큼 공부를 안했나 봐요. 이제는 해야 하는데, 자꾸만 눕고 싶네요. 사실,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다시 한번 죄송해요.
글쓰기도 공부가 될 줄은 몰랐다. 가족에게 자꾸만 화가 나는 이유를 문장을 쌓으면서 찾았다. 학원비를 내기는 어려웠지만, 삼시 세끼를 굶지 않았던 나를 만났다. 아내와 아이가 내 마음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느꼈던 답답함을 글로 기록했다. 상처받았던 나를 먼저 헤아리니까, 두 사람에게 화를 낼 일이 줄어들었다. 단순히 작문 시간에 높은 점수를 받는 게 공부를 열심히 한 증거가 아니었다.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것. 너무 가까워서 소홀할 수 있는 가족에게 집중하는 것. 덕분에, 가족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편안해지는 것. 무엇보다, 내 상태를 수시로 들여보고 글로 쓰는 것. 학위를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나의 마음공부에 집중했다. 조금씩 봄(태명)의 어린이집 하원길에 고됨보다 아름다움이 늘어났다.
북반구인 대한민국의 겨울이자 남반구인 호주에서의 올해 여름밤은 참 아름다웠다. 공원이 만드는 인공조명을 뚫고 별들이 쏟아졌다. 바다와 가까운 곳이기에 쉬이 그치지 않는 바람이 시원했다. 이제는 어떤 마음이라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아내가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봄아. 세상이 너무 아름답다고. 맞아. 여기 살고 싶다고. 맞아. 그런데, 친구들을 못 보니까 돌아가야겠다고. 그것도 맞아. 그런데, 친구들과 항상 함께할 수는 없어. 봄이가 형님이 되고, 학교에 들어가면 새로운 친구들이 생길 거야. 엄마와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머리가 하얗게 바뀔 거야. 지금은 초록 초록한 나무도 가을이 되면 알록달록해질 거야. 눈이 오면 하얗게 변하고, 봄이 오면 꽃이 피지? 그렇게 모든 것은 변하는 거야. 그런데, 봄아.
엄마, 아빠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가면, 엄마랑 아빠랑 떨어져 보내는 시간이 생길 거야. 그럴 때 기억해 줘. 언제나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어머. 자기야. 울어?”
그녀의 자기. 나의 눈에서 안도감이 마구 흘러나왔다. 그동안, 사랑은 변한다고만 생각했다. 부모를 향한 애정이 원망으로 바뀌는 것이 슬펐다. 연애를 수없이 실패하며 변하는 사랑을 주저앉아 바라보고만 있었다. (물론, 아내가 첫사랑이다.) 오죽하면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남자 주인공 ‘상우’가 체념한 듯 이렇게 말할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셀 수 없이 변하는 사랑을 겪으며 이 말이 듣고 싶었다. 사랑은 변하지 않아. 그 말을 평생 함께하겠다고 약속한 그녀에게서 들을 줄은 몰랐다. 가족의 기록을 남기며 관계를 공부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과거를 들추어내며, 마음을 공부한다고 여겼다. 아내이자, 봄어멈의 말을 듣고, 비로소 알았다. 나는 사랑을 공부하고 있었다는 걸. 그녀가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이 변해 노인으로 늙어가는 나를 상상한다. 세상을 떠나 다락방에서 글을 쓰는 할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와 눈이 마주치게 되면 힘주어 말하고 싶다. 할아버지. 공부 열심히 하고, 다녀왔습니다.
* 총 예순 번의 발행으로 [사십, 나는 가족이 필요해졌다]를 마무리합니다. 글을 쓰면서 브런치 에디터들의 선택도 여러 번 받아보고, 수많은 투고에 거절 당하며 눈물 짓기도 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수치보다, 건강해진 가족과의 관계가 감사해집니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 기억했던 두 가지 문장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문장이 남습니다. 마음이 낫습니다. 그동안 함께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 드립니다.
* 남은 3월 한 달은 매거진 [나를 글쓰게 하는 문장들]로 수요일마다 뵙겠습니다. 매일 읽고 기록하는 독서노트를 갈무리하는 꼭지가 될 예정입니다. 무턱대고 집필한 이번 책이 아닌, 기획과 구성을 단단하게 하고 새로운 브런치북으로 4월에 인사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완연한 봄이 더욱 향기롭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