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은 아닌데

비전 상실과 비전 사치 사이, 모순을 견디는 힘

by 행복한자유인

귀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린다. 예전에도 들었었는데, 최근 자주 들리는 듯하여 귀 전문 병원을 찾았다. 증상이 심하지는 않고 검사를 했을 때 큰 문제는 없어서 의사 선생님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집에 왔다.


심리적 증상 때문에 청각이 예민해질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Big5 성격 요인 중 신경성이 다소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최근의 고민들이 몸으로 반응했나 보다. 의사 선생님도 증상이 나타날 때 무시하는 훈련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명에 대한 최근 경험이다.


지난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잡음이 들린다는 것은 내 시스템이 아직 살아서 움직이며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6가지 단어를 뽑았다.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 관성(Inertia, 慣性), 권태(Boredom, 倦怠), 불안(Anxiety), 무기력(Lethargy), 정체(Stagnation).


물론, 광고인 박웅현의 저서 《여덟 단어》와는 사뭇 다르다. 단어를 더 찾아서, 비전 상실 ‘여덟 단어’를 만들어봐야겠다.


잘했기에 오랫동안 담당했던 일이 있다. 그 일이 다른 사람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다. 경로 의존성 때문에 바꾸지 못한 것들, 관성 때문에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이 달라진다.


나는 번아웃 상태는 아니다. 단지 길을 잃었다. 비전을 상실했다.


비전이 사라지면 '방향' 대신 '과거'가 지배한다. 관찰해 보면 알 수 있다. 회의에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많이 하는가? 우리의 대화를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전에 가봤던 길에서 반복하고 현재 작용하는 힘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간다. 관성적, 경로 의존성에 변화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를 보게 된다. 사실 그만해도 충분한 일인데 습관적으로 움켜쥐고 있는 일들이 있다. 물론 말이 쉽다. 아무 문제없다가 저항이 생긴다. 그래서 말처럼 쉽지 않다.


결국 저항을 피한다. 그러면, 에너지는 내부에서 충돌한다. 소리만 요란한 공회전이 된다. 그것은 가벼운 권태(Boredom)에서 깊은 권태(Ennui)로 빠진다. 그리고 흐르지 못하고 고여버린다. 그것이 정체(Stagnation)다.


비전이 사라지면, ‘시스템(개인 혹은 조직)’은 경고를 울린다. 경고를 울리다 멈춘다. ‘이대로 가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답을 못하면 불안(Anxiety)해진다. 내가 왜 열정적이었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어디로 가려했는지를 ‘망각’하게 된다. 무기력(Lethargy)해진다.


그래도 다행스럽다. 지금 고민하고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아울러 비전도 사치일 수 있다. 누군가에겐 그냥 일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생존이고 다행일 수 있다. 일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


비전 상실을 이야기할 때, ‘일에 대한 지나친 낭만주의적 기대’를 조심할 필요가 있다. 알랭 드 보통 역시 그의 저서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비록 거창한 비전이나 목적이 없을지라도, 우리 마음을 사소하고 구체적인 문제들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존재론적 공포로부터 우리를 구해준다. 일을 하는 동안 우리는 적어도 '나는 왜 사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얻는다."


비전 상실에 대해서 무겁게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비전 사치에 대해 생각했다. 나를 가슴 뛰게 하는 이상적인 동력, 동기로서의 비전을 생각하면서 어쩌면 사회가 강요하거나 우리가 멋있게 꿈꿨던 비현실적인 강박이 비전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비전을 지나친 의미부여로 단정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


비전 상실을 이야기할 때, 지나친 강박을 조심하면 된다. 비전이 없으면 당장 큰 문제가 발생할 것 같지만, 사실 우리를 살리는 건 거창한 목적지가 아닌 내 앞에 있는 사소하고 구체적인 문제들이다.


비전이 없어서 괴롭다고 단어들을 늘어놓고, 정작 비전이 사치라고 말하는 모습이 모순적이다. 하지만, 이 모순이 지금의 내 모습이고, 점과 점사이에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냉정과 열정, 비전 상실과 비전 사치, 이상과 현실, 동력과 강박. 그래서 모순적인 생각이 불편하지 않다.


비전 상실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완벽주의 직장인과 비전 없어도 행복한 낭만주의 철학자. 둘을 자주 만나 대화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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