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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D-66

결심은 결심이고 오늘은 오늘의 할 일을 합니다

by 푸른국화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필립 로스, 에브리맨 中)



9시 땡과 동시에 전화벨이 울립니다.

업무 개시시간이 9시는 맞습니다만, 모닝커피 한 잔 할 시간은 좀 주시지 싶다가도

마음이 급했을텐데 꾹꾹 참으며 9시 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을 그 마음이 어여쁩니다.


법무팀 업무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루종일 전화와 메신저로 다른 부서에서 업무하다 막힌 부분에 답변을 해 주고 다른 부서의 업무를 함께 고민해 줍니다.

필요하면 공식 의견서를 작성해 주기도 합니다.

외부자문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 질문 내용을 외부 변호사가 이해할 수 있게 수정해주고,

그렇게 받은 변호사 의견서를 질의한 부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일을 합니다.


질문을 받고 답을 생각해 내는 일은 생각보다 스트레스 강도가 높은 편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팀원들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실 팀원이 훨씬 더 힘들 것입니다. 질문이 명확하지 않아 재차 확인을 하면 잘 모르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입니다.


질의서나 규정도 대충 던져주면 법무팀에서 알아서 고쳐주겠지 하는 부서들도 있습니다. 회사 업무를 하며 협조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다른 팀에 업무협조 요청하면서 최소한의 성의도 없이 일 넘기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러다 보면 정작 해 줘야 할 일을 못해 줍니다. 인력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나마 재원이 풍족한 회사면 소송이건 자문이건 외주를 줘서 관리만 하면 되니 수월한 편입니다. 하지만 지금 회사는 재정상태가 썩 좋은 편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최대한 내부에서 소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리인 비용을 아끼려 비교적 소가가 작은 사건들은 직접 수행을 하고, 대리인을 쓰는 사건들도 수임료를 충분히 지불할 수 없어 업무부담을 최대한 줄여 의뢰하려 합니다. 집행절차나 신청절차도 직원들이 직접 진행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한달에 한 번은 경찰조사도 동행합니다. 그러니 우리 법무팀은 어벤져스가 되었습니다. 제 생각엔 우주최강입니다.


일은 힘들어도 재미있습니다. 일도 해야 느는데 없는 살림 탓인지 덕인지 여러가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저는 레벨업 기회라 생각되어 몸은 피곤해도 뿌듯하고 즐겁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일이 힘들어 입이 댓발 나와있다고 생각하지만 전 사실 일은 재미있습니다. 어려운 수학문제를 마침내 풀어냈을 때 그 희열, 긴 지문 속에 숨겨놓은 출제자의 의도를 알아차렸을 때의 기쁨처럼 고민하고 고민해서 해결책을 찾아냈을 때의 성취감은 한 번 맛보면 끊을 수 없는 자극입니다. 그렇게 오늘도 하루를 보내 봅니다. 나의 전우들과 함께. 뭔가 거창한 것을 준비하고 새로운 것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해야할 일을 하며 내 일에 조금더 집중해 봅니다. 아직은 퇴사를 하지 않았고, 퇴사 후에도 일은 해야하니 말이죠.


자유로운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이나 증오에 휩쓸리지 않고,
마치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는 아이처럼 무너져도 다시 쌓고,
그 과정을 즐길 줄 안다.
중요한 것은 무너졌다가도 다시 쌓아올리는 바로 그 경험이다.
그리고 당신도 이 길을 걸을 수 있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순간들도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이 당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
(프리드리히 니체, 위버맨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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