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나의 꿈은
그대의 인생에선 그대만이 정답이다.
(드라마 도깨비 中)
의대에 진학하고 싶었습니다. 공부를 잘 했고, 공부 잘 하는 거 하나로 확실하게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는 고등학교 과정이 문과, 이과를 선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의대가려면 이과를 선택해야 했고, 꼭 의대가 아니더라도 당시에도 문과는 취업이 어렵다며 대다수가 이과를 선택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연히 이과를 선택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우리 집안은 문과 머리지 이과 머리는 아니니까 문과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우리 집안은 문과 머리라 할 만큼 어학, 사회과학 계열에서 두각을 드러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노벨상을 노리는 것도 아닌데 문과 머리, 이과 머리 거창하게 나눌 게 뭐 있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쉽게 백기를 들 만한 말씀은 아니었지만 얼른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서 막연히 의대나 가야지 했던 그 마음은 쉽게 꺾였습니다.
문과를 선택한 이후엔 국문과에 가고 싶었습니다. 고전문학을 현대어로 해석해 나가는 과정이 재미있었고 문법이라는 마치 공식 같은 것이 언어에도 통한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내 이름으로 책을 내면 굉장히 보람될 것 같았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줄 소설을 쓰게 되면 좋겠어.
글을 써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펄쩍 뛰셨습니다. 아빠는 법대를 가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법대만큼은 안 가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작가가 불안정한 직업이라는 생각에 싫으신 것이라면 월급 꼬박꼬박 받는 글쟁이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것도 싫다 하십니다. 잘 이해는 안 되지만 미성년자보다 성인의 판단력이 낫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법학과에 진학하기엔 수능 점수가 모자랐습니다. 다른 대학 법학과는 등록금이 너무 비싸고, 2000년대 초반 지방에선 과보다 학교가 우선이었습니다. 어차피 사법고시 붙으면 다 똑같고 대학교야 수업은 대충 듣고 자기 할 공부나 하면 되니 무슨 과냐는 중요하지 않다 하십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세상물정 모르는 말씀이었나 싶습니다. 어쨌든 사회생활 안 해 본 나보다 부모님의 판단력이 낫겠지. 왜인지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세상을 잘 몰라서겠지. 그래서 대부분 부모님 뜻에 따랐습니다. 여기까지 저의 의사는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반대를 경험하면 선호가 없어집니다. 내가 뭘 원하나는 생각하지 않고 내가 뭘 원한다고 해야 부모님이 좋아할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빠가 원하는 거 빨리 들어 드리고 내 인생을 살아야지 싶었습니다. 내 인생,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합니다. 간절하게 원하고 죽을 힘을 다 해도 붙을까 말까한 시험인데 이런 자세로 붙을 리가 없지요.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뒤 늦게라도 어학연수를 가고 싶었습니다. 고시 준비를 하는 핑계로 도서관 붙박이로 있어보니, 다양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우들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들을 통해 내가 알지 못한 세상을 알게 되었고 생각보다 다양한 직업들이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뒤늦게 넓어진 시야에 가고 싶은 회사가 생겨서, 죄송하지만 딱 6개월만 어학연수를 보내달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엄마는 그렇게 학교 다니기 싫으면 때려치고 시집이나 가라 하셨습니다.
학교 때려치고 시집 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버린 시간이 있어 선뜻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습니다.
어학 연수 다녀온다고 그 회사에 붙으리란 보장도 없는데. 진작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저런 일을 하는 회사가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으면 사법고시란 것은 시작도 안 했을텐데.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진학을 한 2000년대 학번 문과생들은 지방에서 어렵게 뒷바라지하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묻지마 고시생이 되었다가. 마음편히 공부만 할 수 있는 입장들도 아니다 보니 쉽게 포기를 하고. 뒤늦게 무언가는 되어야겠어서 급하게 스펙을 만들어보지만 삭제된 시간과 먹을 만큼 먹은 나이 앞에서 제대로 된 준비없이 사회생활에 뛰어 듭니다.
그렇게 급하게 된 무언가는 기대와 다르고. 고작 그러려고 서울 갔냐는 말이 무서워 집을 자꾸 피하게 됩니다.
진작에 의대 갈 것을.
2000년대 학번 문과생들이 20대 중반에 가장 많이 했던 하소연일 것입니다.
다행히 시대를 잘 타고난 저는 졸업할 때쯤 로스쿨이 생겼고 길게 방황할 겨를도 없이 로스쿨에 입학했습니다. 운 좋게 변호사시험이 붙었고, 운 좋게 붙자마자 취업이 되었고, 직장생활 권태기가 올 때마다 이직을 해 가며 큰 어려움 없이 경력을 쌓아 왔습니다. 못 해 먹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변호사야 말로 본질은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직업이니 어쩌다 꿈을 이루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그리고 소소하게 행복을 하나씩 찾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요.
내 손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고부터는 거침없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십년 남짓, 사는 건 고통이 아니고 즐거울 수 있구나를 깨달았습니다.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하고 싶은 데 하지 못한 것들과 하기 싫은데 해야했던 것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허기집니다. 진작에 이렇게 살았으면 어땠을까 싶어 원망하는 마음도 듭니다. 그 원망에 욱하거나 모진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여전히 허기가 풀리지 않았나 봅니다.
변호사 일을 하며 크게 느낀 바가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유능한 변호사는 아니지만 내 사건만큼은 어떤 유능한 변호사보다도 내가 더 잘 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사건 나만큼 파는 사람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내 인생은 어떻겠습니까. 내 인생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생을 오래 살았거나 엄청나게 똑똑한 거 그런 게 다 무슨 의미입니까. 내 인생은 나만큼 모르고 나만큼 소중하지 않은데요.
그러니 누가 뭐라든 생각한 대로 나아가면 됩니다. 하고 싶은 걸 하면 됩니다. 좋은 날도 있고 궂은 날도 있겠지요. 어쨌든 하고 싶은 걸 하면 됩니다. 하고 싶은 걸 못하는데 좋은 날이 있을까요? 그런 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하게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가장 빨리 가는 길입니다. 억지로 시켜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우리 부모님도 하고 싶은 걸 못하면 불행하다는 걸 이제는 알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뭘 어떻게 하려 하지 마시고 마음 편히 두실 수는 없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등골 빼먹은 자식이라는 부채의식에 마냥 이기적일 수는 없어서 쉽게 포기했던 마음이 한으로 쌓였습니다.
이 나이 먹어도 그 한이 풀리질 않아서 하고자 하는 일에 반대하시면 그게 그렇게도 발작버튼이 됩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 돈 욕심을 부립니다. 손 안 벌리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싶어서요. 손 벌려야하면 또 하고 싶은 거 못하고 살까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