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국화 Dec 05. 2020

당당하게 부탁하면 당당하게 거절합시다

직장생활 9년, 드디어 나도 웃으며 거절하는 법을 배웠다

어제 다른 부서 직원이 서류 하나를 들고 찾아와서는 말한다.


"산안법 81조 적용 대상이라는 논리를 만들어야 되는데 논리를 못만들겠으니 좀 적어 주세요. 우리쪽에서 2002년 행정해석한 게 있다는데, 이거 너무 오래 되어서 우리가 찾지도 못해요. 만들어서 메일로 보내 주세요."


거참, 2002년 행정해석이 너무 오래되어서 찾을 수 없다니, 그것도 관련부서에서? 이게 말이야, 방구야.

70년대, 80년대 행정해석도 다 찾는 마당에 2002년 행정해석이 오래된 것이라 못 찾는다니.

그 분 나가고 3분만에 행정해석 찾았다. 이 정도면 못 찾는 게 아니라 안 찾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논리야 1조 3조 조합하니 5분만에 뚝딱 나오는데. 나 일 잘한다고 자랑하는게 아니라, 다들 아시죠? 남한테 자기 일 미루는 유형들. 마감은 다가오고 주말에 연장근무는 하기 싫고 가능하면 금요일이라 조퇴하고 싶은 사람들.

제발 한 번 읽어보기라도 하라는 뜻으로 파일 아니라 출력본을 전달했다.



- 어머 팀장님, 오래된 행정해석이라 못찾는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80년대 행정해석도 다 나오는데...같이 출력해 드려요~ 수고하세요

웃으며 돌려 깠지만 그는 돌려 까는 줄 모른다. 무슨 말을 하든 웃으면 장땡이군.


그렇게 앉아서 다시 내 일 하고 있으려니 또 조르르 올라온다. 이번엔 더 두꺼운 서류를 들고 온다.


-이거 제가 초안 작성하고 과장님이 검토도 하신건데 용어와 표현 세련되게 고쳐 주세요. 변호사님 한 10분이면 다 하실텐데.

- 어머 팀장님, 저도 요즘 죽겠어요. 지난주 내내 악성민원에 시달리느라 재판준비를 못해서 주말에 나와야할 판인데, 제 산재부터 예방해 주시면 모를까, 저도 일이 밀려서 못 도와드려요.

- 에이 변호사님 그러시면 어떡해요. 우리는 매일 당하는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셔야죠.

- 어머 그게 안되는 걸 어떻게 해요. 저는 그게 안되네요.

- 집에 가면 회사생각은 잊고 딱 생각을 끊는 연습을 해야죠. 지금부터 견디는 연습을 하셔야죠.


하하하 사람이 게으른데 눈치까지 없으니 세상살기 참 편하겠다.

- 그게 연습한다고 되나요. 저는 못 도와드릴 것 같아요.

- 변호사님 한 십분이면 하실텐데, 저희야 오래 걸리지만 한 십분이면 하시잖아요.


십분에 할 일도 아니고, 설사 내가 십분에 가능하면, 내가 빨리하니까 내가  해야하면 이 회사 일 전부 내가 합니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뭔 사회주의자야 뭐야. 더군다나 진짜 필요한 일도 아니고, 나를 이용해서 본인을 포장하겠다니. 거 황팀장 어쩜 글을 이리 잘 써, 변호사가 쓴 줄 알았네, 아니 변호사보다 낫네 변호사 해도 되겠어 그 말 듣는데 나를 이용하겠대


- 산안법 업무하시는 분이시잖아요. 법률용어에 워낙 익숙한 분들이시라 표현이 조금 다를 수는 있어도 전문성이 떨어지지는 않으실테니 걱정안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다른 분들 글 쓰신 거 봐도, 퇴고하려면 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던데, 과장님도 보셨는데 제가 보탤게 있겠어요.

- 그래서 안되겠습니까.

- 매일 저 찾아오는 악성민원인 해결해 주시든지요. 아니면 저도 못 도와 드릴 것 같아요.


이번 하나 받아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기일 맡기겠지. 어디에나 일 미루는 사람은 있고 그들은 구질구질 자기합리화하는 핑계를 든다. 저년차 때는 설득력없는 헛소리를 듣고 있으면 더 화가 나서 이걸 왜 내가 해야하냐며 투덜거리고 화를 내고. 투덜거리고 화 내면서도 일이 잘 못 될까봐 혹은 마음이 약해서 해주고 말았다. 그렇게 해줘도 앞서 투덜거림 때문에 좋은 소리도 못 듣고.

그런데 직장생활 9년. 드디어 웃으며 거절하는 법을 배웠다.

흥분하기 시작하면 밀린다. 어차피 안들어 줄거 여유를 가지고 핑계거리는 찾지 않아도 된다. 상대도 아무말하고 있으니 나도 아무말대잔치.

당당하게 부탁하는 사람에겐 당당하게 거절하면 된다.

행여나 미안함 따윈 날아가는 새나 줘버려~

작가의 이전글 잠 들지 못하는 밤이 쌓여갈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