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있으면 열린다

밀물은 숨기고 썰물은 드러낸다

by 윤슬

몸살이 와서

누워서 봅니다.


화면 밝기를 낮추고

소리를 조금 키웁니다.


오늘은

눈보다 귀가 먼저 깨어 있습니다.


소녀가 말합니다.

“귀에 대고 들어보세요. 바다 소리가 나요.”


아저씨가 묻습니다.

“진짜 바다 소리예요?”


소녀가 답합니다.

“상상이에요. 마음의 소리요.”


나는 이불 속에서

그 대사를 한 번 더 되뇌입니다.


진짜와 상상의 경계,

얇은 체온계의 수은줄 같습니다.


빈 껍질을 통과해 돌아오는 소리는

허상일지라도

내 호흡을 천천히 맞춥니다.


오늘은,

듣는 쪽이 맞겠구나.


소녀가 말합니다.

“바다에서 길을 잃으면 등대를 봐요.”


나는 한때 올려다보던 밤들을 떠올립니다.

더 큰 불빛, 더 높은 자리, 더 분명한 신호.


빛이야말로 길이라고 믿던 시간들.


하지만 가장 밝을 때

나는 가장 눈이 부셨습니다.


빛이 꺼지는 순간의 공허는

더 깊었습니다.


아저씨가 묻습니다.

“등대가 없으면 길을 어떻게 찾죠?”


소녀가 대답합니다.

“길이 있기만 하면 열려요.”


나는 그 문장을 천천히 굴립니다.


문이 열린다는 건,

문이 ‘있다’는 뜻.


오늘의 문턱부터 찾아봅니다.


미지근한 물 한 잔,

짧은 스트레칭,

메모 다섯 줄.


해열제 시간에 맞춰

겨우 적어낸 다섯 줄.


문장이 아니라

문턱.


문턱이 있으면

문은 언젠가 열립니다.


소녀가 또 말합니다.

“밀물 때 안 보이는 길이,

썰물 때 보여요.


기다리면 길이 보입니다.”


여기가 오늘의 중심입니다.


밀물은 차오름, 과열, 초조, 불안.

썰물은 물러남, 식힘, 간격, 여백.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밀물처럼 차오를 때,

문장은 오히려 잠깁니다.


예전의 나는 더 세게 헤엄쳤습니다.

더 큰 목표, 더 강한 동기,

더 밝은 모범을 찾아.


이제는 압니다.

물 빠지는 시간을

버티는 법을.


기다림은 멈춤이 아니라

귀로 걷는 일.


파도 간격이 넓어지는지,

바람의 결이 달라지는지,

발밑의 자갈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듣는 일.


창작으로 말하면,

내 체온의 높낮이를 듣고,

단어의 숨길이를 듣고,

오늘의 보폭을 정하는 일.


화면 속 아저씨가

소라를 귀에 대고

숨을 셉니다.


하나, 둘, 셋.


그 호흡이

내 방으로도 들어옵니다.


나는 알람을 끄고

내 안의 메트로놈을 켭니다.


오늘의 속도는 느립니다.

그러나 느림은

멈춤이 아닙니다.


썰물의 속도로도

길은 생깁니다.


나는 도시의 등대들을 떠올립니다.

숫자, 그래프, 편성표, 알림음.


모두 유용하지만

모두 위에서 오는 신호.


등대가 사라지는 밤이 있습니다.


그 밤에는

소녀의 소라를 꺼내듯

귀를 비웁니다.


허공의 소음이

껍질을 한 바퀴 돌아

나에게만 들리는 리듬이 됩니다.


이건 불빛이 아니라

리듬입니다.


세 문장을 마음에 붙입니다.


오늘은 건너지 말자.

조금 더 기다리자.

이제는 간다.


대사는 계속 흐르고,

내 방은 조용히 가라앉습니다.


나는 오늘의 문턱을 다시 만집니다.


물 한 잔,

메모 다섯 줄,

짧은 휴식.


밀물의 시간엔

체온을 지키고,


썰물이 시작되면

첫 발을 내딛겠습니다.


등대를 찾느라

눈을 아프게 뜨기보다,


물이 빠지길 기다리며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길은,

대개 위에서 오지 않고

아래에서 드러나니까요.


나는 내 안의 소라를

귀에 댑니다.


파란불이 켜지면 건너고,

빨간불이 켜지면 숨을 셉니다.


단순한 리듬으로

복잡한 마음을 건넙니다.


길이 있기만 하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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