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7. 챕터 원 마무리
2026년 3월 9일
13454일.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하루들입니다.
그리고 23년 4월 20일. 새로운 카운트가 시작된지 1055일째. 나의 살아온 날들의 십분의 일도 채 되지 않는 이 시간이 어쩌면 나를 있게 하는 가장 큰 장면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중 너무도 또렷하여 잊혀지지 않는 순간들을 기록합니다.
#1. 뇌진탕
25년 10월 29일. 사무실에 도착함과 동시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가 올 시간이 아니었기에 통화버튼을 누르기 전부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울먹거리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니 머리가 새하얘졌습니다. 봄이가 식탁의자에서 떨어져 몇번이고 계속 토를 하고 있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아내는 너무나도 당황한 목소리였습니다. 놀란 아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떨리는 목소리를 쉼호흡 두번으로 감추고 최대한 침착하게 우선 병원으로 바로 가자고 이야기 했습니다.
곧바로 집 주변 대형병원에 전화를 돌리고 급하게 택시를 잡으려 했으나, 야속하게도 출근길의 택시들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우리의 부름을 모조리 거절했습니다. 아이는 몇번을 더 토하고 이미 패닉에 빠진 아내는 아이를 들쳐업고 구급차를 불렀습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잠에서 깬지 몇시간 되지도 않은 아이가 자꾸만 졸리다하며 스르르 눈을 감는 것을 보고, 아내는 무슨일이 생기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세상이 무너지듯 울며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정신없이 옷을 챙겨 입고 사무실에서 나와 택시를 잡았습니다.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이동하는 것을 확인하였지만, 택시를 타고 한시간 거리의 병원을 향하는 아빠의 마음은 타들어갔습니다. 계속해서 아내와 통화를 하기도 어려워, 그저 별일 없기를 택시 안에서 기도하며 기사님께 빨리 가달라는 요청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지옥 같았던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응급실 앞에 도착했을때 아이는 CT를 찍고 있었고 임산부인 아내는 들어가지 못한채 문 앞에서 나를 맞이했습니다. 엉엉 울며 어떡하냐고 우는 아내를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고 대신 CT실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의사 선생님께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다는 다행스러운 말을 들었습니다.
정신이 좀 들어 아내의 모습을 돌아보니 아내의 온 몸이 봄이의 토 투성이었습니다. 맨 손으로 봄이의 토를 받아내고, 들쳐업고 뛰어다녔을 모습을 상상하니 얼마나 두렵고 초조했을지 마음이 아팠습니다.
"많이 놀랬지, 고생 많았어"
잠시 뒤 진정이 된 우리는 잠든 봄이를 업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봄이는 몇시간 후 이내 다시 컨디션을 회복하였으나, 아내는 그 날부로 며칠동안 그 장면을 잊지못해 힘들어했습니다.
사고는 정말 한순간이었습니다. 별일 없이 지나가 이렇게 해프닝처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천만 다행입니다. 다친 아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부부에게 그 날은 잊고싶은 하루이자 잊어서는 안되는 하루로 남았습니다.
#2. 다행이야 눈이 내려서
봄이의 탄생 1,000일을 기념하여 간단한 가족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평소 가고 싶어하던 속초로 떠나 봄이가 좋아하는 수영도 하고 여러 맛집도 다녀왔습니다.
아직 소녀감성이 남아있는 아내는 1박 2일의 여행동안 눈을 볼 수 있길 기대했었습니다. 아쉽게도 아내가 바라던 눈은 볼 수 없었고, 아쉬움에 작은 탄식을 하였습니다.
둘째날 일정까지 마치고 해가 어둑히 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차에서 쿨쿨 자던 봄이가 집에 도착할무렵 기분좋게 눈을 떴습니다.
슬며시 잠에서 깨어난 봄이가 갑자기 또랑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눈이 오네~ 다행이야 ~"
갑작스러운 잠꼬대 같은 소리에 봄이에게 물었습니다.
"봄아 뭐가 다행이야?“
그러자 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가 눈 보고싶어 했잖아 ~"
그제서야 어두운 창밖에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뭉클함이 찾아왔습니다.
아이는 눈을 보지 못해 아쉬워하던 엄마의 푸념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흘려보낸 푸념인데 그 걸 기억하고 눈이오자 엄마가 좋아할걸 생각해 다행이라 한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예뻐서 바닥에 내려앉으며 녹아내리는 작은 눈송이 처럼 사르르 녹아내렸습니다.
도착하여 들어서는 방의 온기가 유난히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밤이었습니다.
#3. 이모님과의 이별
24년 4월 돌 무렵부터 봄이를 2년동안 돌봐주신 하원 이모님과 작별하였습니다. 봄이가 제대로 걷지도 못할때부터 함께 했고, 봄이를 손녀처럼 예뻐해주셨던 분이었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가장 까탈스러운 것이 부모의 마음인지라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봄이를 예뻐해주는 마음만큼은 2년 내내 너무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매일 세시간. 평일은 아빠 엄마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을 것이라, 어쩌면 가족과 이별하는 마음일 거라 생각됩니다.
동네 잔치 장기자랑에 초대받아 함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장기자랑을 응원하던 것도 추억입니다. 활달하신 성격에 마당발이시다보니 잔치 곳곳에서 만난 이모님의 지인분들이 봄이를 알아보았습니다. 봄이를 향한 따뜻한 인사와 관심들이 이 낯선 현장에서도 우리가 이웃사촌임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봄이는 훗날 이 시절과 이모님을 기억해줄까요?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전해주는 온기들이 봄이를 키워내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언제 뵐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멀리 떠나지 않는다면 부쩍 자라난 봄이, 이모님과 함께 이날을 추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 티니핑
등골 브레이커로 유명한 티니핑. 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익히 들어온 악명(?) 높은 녀석들이었고, 지금 우리집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발에 치이고 있는 것들도 바로 그 티니핑들입니다.
요즘 봄이의 뇌구조는 온통 티니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자다가도 티니핑, 밥먹다가도 티니핑. 잠꼬대까지 합니다. 항상 양 손에는 티니핑이 쥐어져 있고, 티니핑 헬멧, 무릎보호대, 장갑, 가방(속에는 티니핑 피규어들이 한가득)까지 온몸이 티니핑으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백개가 넘어가는 티니핑들의 이름을 줄줄이 외우고 흡사 랩 수준의 티니핑 노래들을 수준급으로 따라부릅니다. 티니핑계의 영재가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티니핑 노래를 어느순간부터 저도 함께 따라부르고 있습니다.
3000원짜리 티니핑 열쇠고리를 받고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하는 아이를 보면 어쩌면 티니핑은 단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친구이겠구나 싶습니다. 행복해 하는 아이를 지켜보는게 저 역시도 행복하다보니 티니핑들에게 자꾸만 애정이 갑니다.
봄이를 이렇게나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티니핑들도 어느순간 장식장에서 먼지에 쌓여 뒷전이 되는 날이 올까요? 이 작은 장난감을 작은 손 안에 가득 쥐고 잠을 청하는 봄이의 이 순수한 모습은 영원히 기억날 것 같습니다.
#5. 첫 파마
설 연휴를 맞이하여 봄이 인생의 첫 파마를 하였습니다. 엄마의 목표는 뽀글뽀글 파마. 아무렴 무슨 머리를 하든 너무 귀여울 것 같았습니다.
낯을 가리면 어쩌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손에 쥐어준 막대사탕을 꼭 쥐고, 머리를 감고 헤어가운을 입은 모습이 그저 인형같아 미용실 언니들의 앓는소리를 유발하였습니다.
파마롤을 낀 모습이 너무 예뻐보여서 휴대폰 배터리가 다 닳도록 사진을 찍어대다보니 어느덧 파마가 끝났습니다. 결과는 대만족. 뽀글뽀글해진 파마머리가 엄마는 너무 마음에 든다며 더 뽀글거리게 볶지 못한 걸 못내 아쉬워 했습니다.
우리가족의 올 설 연휴는 이렇게 봄이의 인생 첫 파마로 시작했습니다. 셋이서 보내는 이토록 사소한 명절도 너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6. 챕터 원 마무리
요즘 봄이가 기분이 좋거나 행복할때면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가족이야~ 우리 가족이지? 봄이 행복해“
봄이에게 우리가 이렇게 든든하고 행복한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이 그 어떤 성공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가끔 '우리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일까?' 라고 의문을 가질때마다 봄이는 우리에게 지나친 사랑으로 답을 줍니다. 그럴때면 ‘그래, 잘 하고 있어’ 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런 식사시간이 행복합니다. 다른 말로 굳이 더 표현할 필요가 없습니다. 봄이는 기억을 하지 못하겠지만 이 행복을 느끼게 해준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3월 16일. 봄동이를 만나기 하루 전입니다.
세상이 색으로 물들고, 내가 변하기 시작한 봄이와의 만남으로부터 어언 3년이란 시간을 차곡차곡 기록해왔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문을 닫고 자기만의 세상으로 들어간 봄이에게 아빠 엄마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처음 적어내려간 일기가 어느덧 3년째입니다.
이제 챕터 원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챕터 투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봄동이를 맞이할 준비를 위해 손수건, 카시트를 빨고 집안을 정갈하게 정리합니다.
한번 경험해본 일이라 익숙한 기분일 거라 생각했겄만 여전히 새롭기만 합니다.
긴 겨울을 마치고 봄동이를 만나기 하루 전 오래만에 달리기를 했습니다.
웅크리고 있던 폐 때문에 금새 숨이 차 멈칫하다가, 그간 기나긴 마라톤을 해온 아내를 생각하며 숨을 후
고르고 다시 뜁니다.
새로운 출발입니다. 이제 네가족이 새로운 출발선에 서있습니다.
숨 한번 후 고르고, 다시 달려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