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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밤

[긴긴밤, 루리 글 그림, 문학동네]를 읽고

by 십이월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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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으로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p.18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예전 일들을 수없이 돌이켜 보고는 해. 그러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때 버깥 세상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들 줄 하나야.”


p.30

“악몽을 안 꾸는 방법을 내가 알고 있긴 한데 말이야••••••.”

”••••••.“

“기분 좋은 얘기를 하다가 잠들면, 무서운 꿈을 꾸지 않아. 정말이야. (이하 생략)."


p.81 하지만 노든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게 주었다.


p.124 나는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은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그리고 치쿠와 눈을 마주쳤던 웜보의 마음을, 혼자 탈툴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드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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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언제나 추락하는 순간을 포함하고 있다. 가장 평화롭고, 명예롭고, 사랑이 충만한 계절이 있다면 또 언젠가는 불안하고, 비참하고, 서글픈 계절이 찾아오기도 한다. 가장 반짝이는 어느 완벽하고 아름다운 저녁, 모든 것을 잃어버린 노든처럼.


가족을 잃은 아픔과 복수심으로 스스로를 까맣게 태우던 노든은 앙가부와 치쿠, 그리고 검은 점박이를 가진 알을 만나고나서야 스스로가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어쨌든, 열심히 살아낸다는 것. 그 존재의 이유로 노든은 충분히 빛난다.


사실, 노든을 살아가게 한 것은 악몽을 꾸지 않는 작은 비법과 같은 아주 소소한 주변의 관심과 사랑이다. ‘같이’는 힘이 들고, 번거롭고, 많은 이해를 필요로 하는 기술이지만, 사실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기적이다. 우리 모두는 생을 살아가며 삶의 어느 지점에서는 비슷한 아픔과 슬픔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기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나누어줄 수 있다.


노든은 그 마음을 어린 펭귄에게 나누어주었다. 뿔이 잘리고 다리를 절뚝이는 나이든 코뿔소와 바다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이제 막 태어난 어린 펭귄은 각자의 길이 다르다. 긴긴밤 속에서 저마다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은 내가 누구이며,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에 대한 물음을 쫓는 시간들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와 이름도 없지만 당돌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지켜나가는 어린 펭귄의 이야기를 따라 나서다 보면, 어느새 <벌새>의 한구절에 당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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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4-205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벌새, 김보라>



노든, 이름없는 아기 펭귄, 그리고 벌새의 한 구절.

이상하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난다.


20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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