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OO팀을 위하여!”
“이번 우리의 OO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하여!”
“우리 회사를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20대 시절 회사 회식 자리에서 팀장의 말씀이 끝나면 누군가의 선창에 이어 모두 일어나 함께 외쳤던 구호들이다. 물론 오래전의 일. MZ세대들이 신입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지금의 한국 사회는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그러면서도 저녁 아이들이 보는 한국드라마 속 회식의 장면에서 보여준 이 같은 떼창 모습이 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물론 드라마 상의 모습이긴 하지만).
사회 초년생 시절, 마감기간이 다가오면 당연히 새벽까지 일할 각오를 하며 밤 10시 무렵에 야식을 한가득 사 왔고, 가족보다 훨씬 더 많이 보는 가족 같은 팀원들과 함께 컵라면을 먹으며 ‘우리’만의 끈끈한 유대감을 높이곤 했다. 덕분에 사회관계 속에서 싹트는 인간적인 정도 느꼈고 한국 가면 연락하는 선배도 생겼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면 남의 일도 내일처럼 여기며 굳이 필요 없는 열정을 발휘했을 때도 많았던 것 같다. 우리 팀과 우리 회사를 위해서.
“너는 우리 회사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싶은데?”
“너의 개인 발전을 위해 우리 회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
“내년에 너의 개인 향상을 위해 배우고 싶은 프로그램이나 트레이닝 있다면 제시해 줘. 회사 측에서 연계시켜 볼게.”
미국 회사의 경우 취업 단계에서부터 개인의 강점과 회사가 어떻게 시너지를 일으켜 윈윈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한다. ‘직원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듯한 회사는 특히나 개인을 중시하는 미국 사회에서 바로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매 해 2-3번씩 가지는 팀리더 및 임원과의 연말 평가 자리에서 또한 직원의 성과에 대한 평가는 물론 ‘나의 강점을 이끌어내도록 회사 측이 해줬으면 하는 일’을 제안하는 자리다.
‘회사 내에서 자신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고 그것이 잘 발휘될 수 있는 작업 환경이 갖춰지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동기부여이자 나아가 회사 전체에 이득이 됨을 회사도 아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확장되어 가는 ‘우리’.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싶다. 물론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인간적인 관계보다는 비즈니스적인 관계가 중심이 되다 보니 불황기 회사 사정이 안 좋아지면 아무리 좋은 기업도 50-100여 명으로 이루어진 부서를 하루아침에 없애 모두 정리 해고시키기도 한다. 처음에는 ‘정 없는 나라’라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지만 5-6개월 안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시금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는 것을 보면 해고만큼 취직의 기회 또한 많은 건 사실이다 (확실히 나이에 대한 제한은 한국의 장벽보다는 낮다). ‘정 때문에’, ‘인강 도의상’, 또는 ‘회사의 관례’로 일도 안 하고 고임금만 챙기는 오래된 직원을 해고하지 못해 상대적 불평등을 느끼게 하는 회사보다는 낫지 않을까.
개인주의가 발달했다고 해서 미국 사람들 모두가 자신만의 안위와 이익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상적인 부분은 내 주변의 사람들 대부분 어느 정도 안정적인 위치에 오르게 되면 소소한 자선 및 봉사 활동 등으로 자신의 동네 및 속해있는 커뮤니티를 위한 활동들을 많이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의미 있는 삶’에는 항상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에 봉사하는 등 사회적 환원을 하는 것’이 꼭 들어있었다. 이는 학교에서 또한 아이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부분 중의 하나였다.
‘네가 진정 원하는 꿈을 찾아라. 그 꿈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발현시키자. 나아가 그것으로 내가 속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하라.”
‘우리’를 먼저 설정해 놓기보다는 나를 시작점으로 하여 만들어가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항상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를 강조하는 이유다. 이런 연유로 가끔씩 내가 미국 회사 문화를 경험해 보고 있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과거 회사에서 오래 지냈다면 아마 지금의 나는 ‘직장 내 꼰대’가 되진 않았을까 싶다. 물론 지금의 세대들이 만들어낸 한국의 회사 풍경은 많이 달라졌으리라 믿는다. 모습 오늘 본 한국 드라마 속 회식 풍경은 아주 가끔씩 경험하게 되는 ‘과장된 한국 직장의 일면’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