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0분 남았다.
오늘따라 아침에 못 일어나 밍그적 대던 아이 덕분에 모든 일이 늦어졌다.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면 보통 8시 반이어야 하는데 오늘은 20분이나 늦은 것이다. 초초한 종종걸음과 교통 체증 속에서 날린 그 시간이 아깝지만 억울해봤자 지나간 일이다. 남아있는 10분이라도 잘 사용해야 한다.
보통 일을 시작하기 전 30분간, 집 근처를 산책하곤 하는데 오늘은 대신 뒤뜰이 보이는 창가 탁자에 앉아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 멍 때리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최근 들어 불쑥 화가 올라오는 날이 잦다.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요즘 ‘나를 위한 충전의 시간’이 부족했던 건 아닐까. 복잡한 생각 없이 천천히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니 순간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해진다.
아이 어릴 적에는 아이가 커서 초등학생이 되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겪게 되는 육체적 피로감은 여전히 유효했고 더불어 정신적 피곤함까지 더해졌다.
워킹맘으로 그와 동시에 해야 하는 역할은 일이었다. 물론 한국의 시스템보다는 나은 면도 많다 (한국에서 일한 10여 년 전의 한국 기업들을 떠올려봤을 때). 아이들, 가족의 일이라면 눈치 안 보고 조기 퇴근을 요청할 수 있다. 물론 일 완수를 위한 메이크업 시간은 별도로 있어야 한다. 또한 일이 종류에 따라 다른 나라 시각에 맞춰 새벽에 일할 때도 있지만, 웬만해서 9시부터 5시 이외의 시간에는 회사에서 따로 오는 전화도 없다. 그렇다고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율적이기에 책임감이 더욱 크다. 나의 성과는 연말 평가와 보너스에 고스란히 반영되며 아무리 잘 나가는 윗선의 사람이더라도 '경기 침체'를 핑계로 하루아침에 잘리는 것은 미국에서는 다반사다. 그런 환경에서 오는 긴장감은 언제나 있다.
게다가 재택근무에서 오는 특수성도 있다. '집에서 일하니 너무 편하겠다', '아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겠다'는 주변의 부러움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실제로 파자마 바지에 위는 블라우스를 입은 채 화상 미팅에 참여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따로 없는 미국의 일 문화 속에서 중간중간 아이들을 학교에서 픽업하고, 조금만 기침해도 아이 데려가라는 학교의 요청에 학교와 집을 오가며 회사 일과 육아를 저글링 하다 보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5시 이후 이어지는 저녁 준비부터 학원 라이드까지. 그리고 저글링으로 미처 못 마친 일을 위한 '셀프 야근'까지 하다 보면 어느새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오는 시간이다.
이 와중에 또 다른 나의 타이틀은 아내다. 물론 위의 두 가지 역할에 비해서는 에너지를 많이 쏟고 있지는 못하다. 다행인 즉, 코로나 팬데믹 이후 남편 또한 재택근무를 하면서 '매일 정신없이 보내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옆에서 보는지라 이해의 폭이 조금 더 커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아내의 관심 결여'가 불만으로 쌓여 폭발하는 주변 남편들을 볼 때마다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옆에 둔 기분이다. 그 한계선 안에서 눈치를 보며 '남편에게 너무 무심하지 않으려' 나름 애를 쓰는 것 역시 하루를 더 피곤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일이다.
물론 모든 역할을 잘했다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항상 최선을 다해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럼 어떠한 성취감이나 보람이 따라와야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감만 몰려왔다. 엄마로서 최선을, 아내로서 최선을, 직장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를 파고들어 가는 가던 중 문득 깨달았다. 정작 '진짜 나'로 지내온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이 모든 역할을 하기 전, 가장 먼저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나 자신'이 어느 순간 제일 뒤로 밀려나 있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아예 고려조차 되지 않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2020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팬데믹 이후 코로나 블루와 함께 '왜 행복하지 않을까'에 대한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그 처절한 고민 끝에 찾은 답은 간단했다.
‘하루 중 단 10분이라도 내 안에 진짜 나로 살기’이다.
그렇기에 오늘, 이 10분은 그 어떤 시간보다도 소중했다. 단 10분이지만,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시간. 엄마의 역할도, 아내의 의무도, 직장인의 책임도 내려놓고, 그저 나 자신으로 숨 쉬는 시간.
아이들 등교 시간까지 온통 아이들에게 집중되어 있던 내 감각들을 자연의 소리로 옮겨온다. 이후 깊이 들이쉬고 내쉬는 내 호흡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이후 느끼게 되는 마음의 여유로움. 그것이 가져다주는 평화로움으로 내 마음을 서서히 채워본다. 조금씩 ‘진짜 나’를 찾아가는 소중한 이 시간. 이 10분을 시작으로, 오늘을 보낼 내가 서서히 충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