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은 많은데 왜 이리 공허할까
한 일은 많은데 왜 이리 공허할까.
엄마, 아내, 직장인... 해야 할 역할이 많아질수록 나의 하루들은 빈틈없이 채워지고 있었다. 첫 아이 출산에 둘째 아이까지 얻으면서 잠시 앉아 숨 고를 틈도 없었던 것 같다. 일이 끝나면 다시 엄마로, 그리고 다시 야근 모드로. 이 이상 생산적으로 보낼 수 없을 정도로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왜 하루가 끝나가는 시점, 잠자리에 들었을 때 뿌듯함이 없을까. 이상한 일이었다. 그 많은 일을 했는데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이 느낌. 나의 에너지를 모두 써 피로감은 몰려오는데, 정작 그 에너지를 무의미하게 소진한 것 같은 이 공허함.
일에서 오는 매너리즘인가, 중년의 위기인가, 이른 갱년기인가. 별의별 이유를 붙여보게 되는 날들이었다.
Women need solitude in order to find again the true essence of themselves.여성은 자신의 본질을 다시 찾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 앤 머로 린드버그 (Ann Morrow Lindbergh)
너무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는 어느 밤, 우연히 접한 앤 머로 린드버그의 <바다의 선물(Gift from the Sea)>에서 만난 문구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녀는 또한 '혼자 있는 시간은 외로움이 아니라 회복의 시간'이라 말하고 있었다.
나는 과연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있었나. 생각해보니 24시간 안에서 잠 이외의 모든 시간을 촘촘한 계획 아래 보내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아이들과 가족, 그리고 일을 위한 시간이었다.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는데, 정작 그것을 충전하는 시간 없이 계속 투여만 하니 몸에 피로가 쌓이면서 번아웃 상태까지 온 것이다.
A woman must have money and a room of her own.
여성에게는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
—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으며 나만의 공간이 있나 돌아보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일하는 공간이 있었다. 아이가 아기였을 때는 베이비시터의 도움을 받아 일하는 시간만큼은 그나마 그 공간에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딱 일하는 시간만 허용되었다. 일이 끝나자마자 베이비시터가 퇴근하면 바로 직장인에서 엄마의 역할로 전환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유아원에 가면서부터는 일하는 중간에 데리러 가야 했고, 나는 자연스레 서재 공간에서 나와 거실 식탁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를 불안하게 홀로 둘 수도 없을뿐더러 중간중간 엄마를 찾아오는 아이에게 계속적으로 대응하면서 그야말로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소화했기 때문이다. 유치원까지는 어떻게든 애프터 프로그램을 활용해 4시에 픽업했지만, 초등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는 픽업 시간이 2시 반이 되었다. '아이가 클수록 수월해진다'는 말은 나에게 그리 적용되지 않았다. 아이 간식을 챙겨주고 숙제를 봐주는 등 아이의 성장과 함께 새롭게 생겨나는 일들은 계속적으로 내 역할에 덧대여 졌다.
가정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에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찾고자 허름한 호텔 19호실을 매일 찾는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 속 주인공 수전 마음이 너무나 마음에 와닿는 순간이었다. 아이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도 행복하지만, 그 외에 나만의 시간, 나 혼자만의 공간. 그것은 사치가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후 접하게 된 여러 심리학자들의 강의에서도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 멈추고 나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나 역시 삶의 루틴을 조금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바쁜데, 도대체 나만의 시간을 언제 갖는다는 말인가. 그래서 단 30분만 찾기로 했다. 거창하게 한두 시간이라 하면 처음부터 불가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결혼 전까지만 해도 다이어리 꾸미기를 좋아했던 나인데, 출산 이후로는 아이 일지는 꼬박꼬박 기록하면서 정작 나의 다이어리는 쓰고 있지 않다는 게 새삼 떠올랐다.
그래서 제일 처음 한 것은 나만의 다이어리를 사는 것이었다. 신년에만 살 이유가 어디 있으랴. 그날 당장 인터넷을 뒤져 좋아하는 디자인과 색상의 다이어리를 주문했다. 출산 후 줄곧 아이 관련 용품만 사봤지, 나를 위해 이렇게 즐겁게 뭔가를 산 적이 있었던가. 단 12달러짜리 다이어리를 사면서 오랜만에 느꼈던 그 설렘이란. 기분 좋았던 그날 밤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다이어리가 도착하면서 나는 하루 일과를 시간별로 적어보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 밖의 틈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규칙적으로 지속할 수 있는 시간대를 분석해 보니 큰 틀에서 크게 세 군데였다.
아이가 잠든 후 30분
아이를 유치원·학교에 데려다주고 온 뒤 일하기 전까지 30분
아이가 일어나기 30분 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쾌재를 불렀다. 발견을 했으니 다음은 실행이 필요했다. 우선 나는 그 시간대를 하나씩 정해 일주일 이상 꾸준히 실험해 보면서 어떤 것이 나에게 더 잘 맞는지 관찰하기로 했다. 1번은 조금 늦게 자는 패턴이고, 3번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미라클 모닝 패턴이라 1번과 3번을 동시에 시도하면 수면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하나씩 해보기로 한 것이다.
아이의 식사, 배변, 수면 패턴만 관찰해 봤지, 나를 위해 스스로에게 관심을 갖고 관찰해 본 적이 있었던가. 이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부터 실행에 옮겼다.
— 이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