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대로 되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면
"이런! 너무 아깝겠다. 거의 다 했는데... 괜찮아, 다시 하면 되니까. 엄마 도움 필요하면 얘기해."
열심히 블록을 쌓아 올리다 실수로 블록을 모두 무너뜨린 아들.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오 노!'를 외치는 아들이 머리를 감싸며 거실 바닥에 드러눕는다. 사실 놀면서 여러 번 봐온 일이다. 본인에게도 크게 놀랍지 않은 일인 것 같다. 아기 땐 크게 실망하고 울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엿한 8살 초등생. 몇 초 후 " Another chance!"를 소리치며 다시 곧추 앉아 블럭쌓기를 시작한다.
쌓다가 무너뜨리고, 올라가다 무너지고. 사실 요즘의 내 일상이다.
최근 몇 주 마음처럼 일이 잘 안 풀릴 때가 많았다. 내 노력이 부족해서인가, 현실감이 떨어져서인가, 아니면 몸과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아서일까. 순간적으로 그 이유를 찾는데 급급해지곤 했다. 마감이 있는 이번 주, 일이 쏟아지는데 눈치없이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 팀원은 휴가까지 냈다. 그 일까지 도맡은 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글링하며 외줄타기 하는 광대'가 따로 없다. 급기야는 대학원 수업시간도 홀라당 잊어버린 사태까지 일어났으니. 무거운 마음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일을 시작해야지' 큰 다짐을 하며 잠자리에 들었건만 왜 이런 날은 평소보다도 늦게 일어나게 될까. 하필 악몽을 꿨는지 오늘 새벽녘 '엄마'를 열심히 불러대는 아이덕분에 잤어도 안잔 느낌. '그 옆에 잠깐 누웠다 일어나야지'하던 것이 급기야 늦잠을 동반했다.
'망했다'라는 생각과 함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쿵광거리며 허망한 마음이 드는 순간, 긴 호흡과 함께 잠시 눈을 감고 '멈춤의 시간'을 갖는다. 그러면서 어제 저녁 아이에게 해 준말이 그대로 나에게 해 본다.
이미 지나간 일. 다시 하면 되지 뭐. 정 안되면 동료에게 도움을 청하고.
다행스러운 점은 지금의 나는 지난날과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거 아니면 안 돼'라는 생각이 강했던 학창 시절 및 20대에는 무슨 일이든 죽기살기로 열심히 했고, 고로 작은 실패도 큰 좌절감과 막막한 심정을 느끼곤 했다. 회복 탄력성을 얻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에 내공이 생겼을까. 그럴 때마다 한 발짝 뒤로 가 '너그러운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여유로움이 조금 더 생겼다. 부질없이 주변을 탓하며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불론 빨리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나 '느리게 걸어도' 시간이 조금 더 오래 걸릴 뿐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음을 이제는 안다. 지금 내가 가진 부족함 또한 단지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는 당연한 이유 때문이리라. 내가 어쩔 수 없는 외부의 요인때문 이기도 하다. 그럴 땐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길게 시간을 들이면 되는 것이다.
오늘이 그런 것 같다.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야 되는 날. 너무 힘들면 주변의 가족, 동료,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니까. 평소와 똑같이 커피와 함께 바라보는 창 밖. 나뭇잎 사이사이로 빛나는 햇살에 갑자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속 스칼렛 오하라의 대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Tomorrow is another day.)"가 떠오른다.
사실 중학교 시절 책 속에서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때 조금은 '무책임하다' 느꼈었다. 지금의 감정과 책임을 왠지 내일로 미루며 회피하려는 듯한 느낌이 받아서.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 안에 담긴 '희망, ' '다시 시작하는 마음, ' '새로운 도전' 등 많은 함축적인 의미들이 보이니 이제서야 뛰어난 작품 속 작가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가늠할 만큼의 수준이 됐나보다.
지금의 속도로 적지 않은 시간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 뒤 돌아 봤을 때 그 성과 또한 자연스럽게 목도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태양이 새롭게 떴다. 그저 담담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신념을 가지고 한 발을 내딛어라
계단 전체를 볼 필요는 없다.
그냥 한 걸음씩 나아가라.
(Take the first step in faith.
You don't have to see the whole staircase, just take the first step.)
- 마틴 루터 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