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한 감성을 자랑하던 여고생 시절. 문학시간은 매 시간 선생님께서 낭독해 주시는 한국 현대 소설들을 들을 수 있는, 특히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중학교 1학년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으로 시작된 나의 외국 고전 문학에 대한 사랑이 한국 현대 문학 쪽으로 옮겨진 것도 아마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아내가 그토록 바라던 설렁탕을 들고 왔건만 이미 차가운 주검이 된 아내를 보며 울부짖는 김첨지의 비통한 외침에 선생님의 울먹이는 목소리는 떨렸고 나 또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 시절 선생님께 읽어주신 한국소설들은 그 시대상을 반영하듯 가난에 허덕이던 우리 민족의 비통한 삶들이 더욱 현실감 있게 보여주었고 그것들은 외국 소설의 것보다 더욱 깊은 여운을 남기며 강렬히 다가왔다. 이후 지하철, 버스 통학을 하며 틈틈이 읽었던 한국 작가들의 소설. 그리고 점점 교과서 밖의 작가들의 작품들도 접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은 감각적이고도 섬세한 문체로 그 당시 사춘기 소녀였던 나의 예민한 모든 감성들을 하나하나 열리게 한 작품이다. 시대보다는 조금 더 인간의 감성에 집중을 하게 하고 상상을 하게 해 준 이 책은 그 어느 책 보다 자극적이기도 했다.
성공과 안정적인 삶은 있지만 진정한 ‘나’가 없는 ‘서울’을 떠나 ‘무진’으로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는 그는 무진의 명물인 ‘안개’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지만 ‘혼란스러움’ 또한 느낀다. 결국 두 공간 사이에서 갈등하다 현실이라는 서울로 도피하듯 빠져나오게 되는 그. 그러나 ‘살아있음’이 배제된 ‘안락함’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발걸음을 공허하게만 느껴지니 나이가 들수록 접할 때마다 그 공허함이 무엇인지 조금 더 이해가 되는 책이기도 하다. 시대적 배경이 다른지라 최근에 와서는 지금의 가치관에 반하는 부분들도 적잖이 보인다. 그러나 그의 '담담한 돌아섬'이 남긴 여운은 여전히 그 어느 책 보다 공감이 된다. ⠀
무엇보다도 이 책의 탁월함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체. 이 전에는 사실적인 문체의 한국 단편 소설 위주로 읽어봤기에 (아무래도 일제강점기 배경의 책들이 많았어서) 이 책을 읽있을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순수한 우리나라 말이 이렇게 아름답구나’라는 것이었다. 물론 현시대에는 아름다운 글들이 많지만 1964년 당시로서는 너무도 파격적인 문제다. 그것도 고적 23살 나이에 쓴 작품이라니 여전히 놀랍다. 지금 봐도 감각적이고 아름답다. 한국 문학사상 최고의 단편 소설에 항상 꼽히고 왜 여전히 작가 지망생들이 필수적으로 필사하는 작품인지도 이해가 된다. <폭풍의 계절> 속 에밀리 브론테의 개성적인 문체에 매료되어 이후 외국 고전문학 읽기에 더욱 열심이었었다면 <무진기행>은 이후 여러 현대 문학 작가들의 여러 작품들을 많이 찾아보고 읽게 만들어 준 기폭제였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을, 겨울이 되면 한 번쯤 생각나 들춰보게 되는 책. 특히나 오늘처럼 안개 낀 하늘, 스산한 바람에 단풍잎이 하나 둘 떨어지는 날이면 더욱 생각나는 책이다. 오늘 일이 끝나면 읽어봐야지, 책상가에 살포시 꺼내 놓는다. 주인공처럼 다시 돌아올 곳이 이 자리인 줄 알면서도 퇴근 후 잠시 책과 함께 떠 날 '나만의 일탈'에 벌써부터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