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니 채워지는 것
이른 아침 창문을열자 마자 만난 건 예상했던 콧끝 시린 가을 바람이 아니었다. 마치 여름이 다시 온 듯 후덥지근한 공기. 이게 무슨 일인지. 부랴부랴 창고 한 켠에 꺼내 정리해 두었던 여름옷 박스에서 부랴부랴 반팔들을 꺼내 아이들에게 입혀 학교에 보낸다. 물론 추위보다는 햇살 가득한 따뜻한 날씨를 훨씬 좋아하긴 하지만 선선해야 마땅한 가을에 어울리지 않은 날씨를 접하니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다. 일기예보를 체크 보니 내일까지 덥고 이후부터는 갑자기 또 엄청 추워진단다. 근래 들어 자주 왔다 갔다 하는 날씨. 이럴 때마다 지금의 지구 건강은 얼만큼 안좋은 것인지 걱정이 된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된 우리 아이들이의 미래와 지구 환경. 그러면서 지구 온난화, 넘쳐나는 쓰레기로 점점 죽어가는 우리의 지구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코비드가 도래했을 땐 우리 모두가 절실한 마음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지구의 경고같았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연 보전하고자 하는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팬이 되었고, 아이용품 및 주방 용품을 살 때도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자연에 해가 덜 가는 재료들을 고집하는 브랜드들, 세븐스 제너레이션이나 메소드를 구매했다. 한창 주식의 붐이 일 때도 나름 ESG 지수를 따져가며 회사를 판단했다. 이에 더해 집안 쓰레기 줄이기 등 소소한 실천을 해오는 데는 아이들의 영향도 컸다. 어느덧 자기 생각을 다부지게 주장할 줄 아는 나이가 되면서 아이들 또한 '나의 작은 실천이 큰 변화를 만든다'며 알아서 이면지를 사용하고, 산책을 나설 때 쓰레기를 스스로 줍는다. 이런 아이들을 보면 지금의 환경을 이렇게 만든 세대로서 크나큰 책임감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든다.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한 하루. 오후 무렵이 되자 에어컨을 안 켠 집안 내부가 더욱 후끈 달아올랐다. 안되겠다 싶어 더욱 얉은 소재 옷을 찾기 위해 옷장 문을 연다. 출산 후 운 좋게도 돌아가 준 몸무게와 다시금 돌아오는 유행 덕분에 옷을 새로 거의 사지 않았음에도 어쩜 옷장이 옷들로 넘쳐난다. 재택근무를 하기에 따로 외출할 일도 거의 없는 터. 사실 몇 가지 옷들이면 사는데 무방하다. 코비드 팬더믹 이후로는 옷을 산 기억조차 없건만 빽빽하게 옷들로 채워져 있는 옷장. 결혼 전 마치 시즌별로 최신 유행을 선보이는 옷들을 사느라 바빴던 지난날들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심지어 지난 몇 년간 옷장에 박혀 전혀 빛을 보지 못한 옷들도 수없이 많다. 이제는 나의 키에 버금가는 큰 아이라도 즐겨 입어 주면 좋으련만 살랄라 페미닌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내 옷들은 블랙 레깅스와 스포츠 웨어를 좋아하는 아이에겐 전혀 관심 밖이다. 사실 지난 몇 년간 틈틈이 안입는 옷들을 나눔하거나 기부하기도 했지만 '조금은 아까워서' 간직했던 옷들이 여전히 많은 것이다.
'몇 년간 안 입 없다면 앞으로도 입을 일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작은 미련을 버리고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것 또한 지금의 환경 보전에 더욱 필요한 일 아닐까. 내 친김에 박스를 가져와 몇 년간 옷장에만 있었던 옷들을 하나 둘 꺼내 담았다. 옛 기억이 소록소록 담긴 옷들. 물론 박스에 담길 주저하게 되는 옷들도 있지만 '큰 기억을 담은 대표적인 몇 가지만으로도 그 많은 추억을 떠올리긴 충분할꺼니까' 스스로를 격려해준다 .
몇 시간 동안의 옷 정리에 방 공기가 더욱 후끈해진다. 그래도 두 박스 가득 담긴 옷들과 조금은 헐렁해진 듯한 옷장을 보니 마음에 후련한 바람이 부는 듯 상쾌한 기분이다. 그 간 소중하게 보관해 온 옷들이니 그 누군가에게도 소중한 선물이 되겠지.
이제는 화려한 옷으로 가득한 옷장이 아닌, 알맞은 수만큼의, 꼭 필요한 옷가지 들로만 채워진 옷장. 삶의 모든 것에 있어서 적당히 비울 줄 알고, 비우면 더욱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이 좋다. 다음에는 어느 곳을 비워볼까. 더불어 새로운 목표를 세워본다. 더 크게 채워질 내 마음의 행복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