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으로
깜깜한 새벽녘 나직이 내 이름을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인다. 어젯밤 머리맡에 미리 챙겨놓은 옷가지에 손을 더듬어 뻗어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고양이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나오니 이미 따뜻한 믹스커피가 담긴 보온 병와 비스킷 준비를 마친 아빠가 따뜻한 털모자를 씌워주신다.
"겨울 바닷 바람은 엄청 차."
강원도 동해 할머니 댁. 차로 5분만 가면 감추바다다. 가까운 삼척 주문진이나 강릉 경포대 만큼 유명 바다는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사람 붐비지 않고 한적하여 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우리 가족이 즐겨가는 곳이다.
동생이 신생아일 무렵 육아로 정신없는 엄마와 우리 집에 와계신 외할머니의 손을 덜어드리고자 아빠는 주말마다 4살박이 나의 육아를 도맡으셨다. 최고의 도움은 아이를 데리고 나가 주는 것 (엄마가 되고 보니 정말 그렇다!). 영화관 나들이도하고 동물원에도 데리고 가다가 여행 마니아이신 아빠는 아예 1박 2일 코스로 계곡, 산, 바다 등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누비셨다. 여행 중 '맛집 투어'와 '일출맞이'는 빼놓을 수 없는 코스.
아빠를 잘 따르기도 했고 워낙 어릴 적부터 따라다녀서 그런지 아빠가 '어디 가자'는 것에 '싫다'하며 땡깡 한 번 부린적도 없단다. 일출을 위해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것 또한 불만일 수 있을 터인데 오히려 초등학생 이후에는 일출의 장관과 그때의 그 가슴 벅참을 느껴본 지라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먼저 일출가자고 아빠를 조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입시 공부 핑계로 정말 오랜만에 할머니 댁에 방문했다. 도착하자마자 아빠께 바로 다음 날 아침 '바다 일출 맞이'를 제안한다. 물론 그 의향을 물어볼 것도 없이 아빠의 답변은 예스겠지만.
차로 5분을 달리자 도착한 감추바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이 유난히 시렸다. 어릴 적부터 쌓아 올린 '산타기 실력'으로 바닷가 옆 절벽을 빠르게 타고 오르다 보니 어느새 얼굴이 달아오른다. 당도한 절벽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10분쯤 기다리자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 아빠의 손을 잡은 채 조용히 그 숭고한 시간을 함께 한다. 비단 특별한 굳은 다짐을 하지 않더라도 알게 모르게 채워져 벅차오르는 가슴. '새로움, ' '시작, ' '설렘, ' '뜨거운 격려' 등 형용할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느껴진다. 태양의 끝자락이 수평선 위로 떠오르자 믹스커피와 에이스 미스켓을 건네주시는 아빠. 그 자리에서 먹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 둘의 조화가 얼마나 기가막힌지. 가슴 아래로 내려가는 뜨거운 커피에 절벽 위의 겨울바람 또한 하나도 차지 않다.
갑자기 추워진 오늘 아침, 평소 같으면 이부자락을 더 끌어올려 다시 잠을 청해야 했을 테지만 무슨 마음 때문인지 벌떡 일어나 정말 오랜만에 새벽녘 동네 산책에 나섰다. 지난주까지 68도를 웃돌았건만 오늘은 집 밖을 나서자마자 찬 공기에 코끝이 시리고 눈물이 핑돈다. 벌써 겨울인가. 추위를 이기겠다는 심산으로 함차게 뻗는 발걸음. 몇 걸을 걷다 우연히 앞쪽으로 뚫린 긴 길 위로 시작된 일출을 맞이했다. 그러면서 갑자기 오버랩되며 떠오르는 그 때 그 시절 아빠와 함께 맞이했던 동해 바다 절벽 위의 일출. 그날의 충만했던 기분 또한 고스란히 전해진다. 태양의 붉은 기운이 감도는 동네 길 위로 한 걸음씩 발을 옮길 때마다 그 시절 아빠와 함께 했던 여행 속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30분의 아침 산책과 함께 다시금 하게 된 지난날의 여행. '명품백 살래 아니면 여행 갈래'를 물어보면 주저 없이 여행을 택하는 나. 코비드 팬더믹 이후 여행에 매번 주춤해지는 것이 아쉬웠는데 이렇게 소환하는 '추억 여행'이 있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역시 남는 건 물건이 아닌 경험이다. 5-10년 후에 소환하게 될 지금 이 시절의 추억은 무엇이 될까. 그 때의 추억 여행을 위해 틈틈이 단거리라도 가족 여행을 계획해봐야겠다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