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내 나를 알리는 글 소통
"Good morning!"
통통 튀는 20대 답게 언제나 상큼 발랄한 같은 팀 B양의 메신저 인사. 공식적인 일의 시작을 알리는 오전 9시가 되기도 훨씬 전인데 이메일을 보내왔다. 오늘도 뭔가 일에 도움이 필요한 듯. 많은 일이 요청하는 이메일은 반갑지 않지만 항상 경쾌한 인사로 시작하는 그녀의 이메일은 매번 기분 좋게 읽게된다.
한국에서 7년, 미국에서 13년. 각기 다른 문화 속에서 만나게 되는 직장 내 사람들. 성격도 분위기도 저마다 다양하다. 그러함에도 '인상이나 말투를 보면 그 사람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진리는 어느 곳이나 통하니 만국에 적용되는 공통 명제가 아닐 수 없다.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났던 한국에서의 7년 직장생활. 사람을 많이 만날 수록 상대를 빨리 파악하고 상대에 맞춰 알맞은 표현력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스킬 또한 자연스럽게 늘어갔다. 이제는 처음 상대의 얼굴만 봐도 대강 그 사람의 성격을 가늠할 만큼의 촉이 생긴 것 같다. (물론 첫인상으로 상대의 모든 걸 결정짓진 아니지만).
재미있는 점은 '인상이나 말투로 대강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이같은 방식은 미국인들에게도 잘 먹혔다는 점이다.
나의 첫 외국인 인맥이라 할 수 있는 아이 유치원 친구들의 엄마들. '나 심술궂어요'라고 은근히 쓰여있는 듯한 그녀 또한 평상시에는 애써 노력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아이들끼리 투닥거리거나 나름의 긴급한 순간을 맞딱뜨리게 되면그때마다 그녀의 숨겨진 '못된 심보'를 참지 못하고 '얄미운 말투'로 자신의 진짜 성격을 드러내곤 했다.
그러나 재택근무를 하면서 약간의 고충이 생겼다.
'표정과 말투 캐치'라는 나만의 은근한 무기가 '재택근무'라는 환경에서는 상대적으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화나 화상 미팅을 자주 하긴 하지만 소소한 미팅에서는 대부분 비디오를 끄고 이야기를 하는 편. 큰 회의 때 얼굴을 보일 때에도 각기 조명도 다르고 '필터링'을 활용해 얼굴 메이크업을 하는 사람까지 있으니 (참 편안한 세상이다!) 정작 회사에서 실제 대면했을 때 '화면 속 그 사람이 이 사람 맞나' 싶을 때도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한국인오 아닌 미국인아닌가! 우선 예상치 못한 그들의 반응을 만났을 때 그것이 '그 사람만의 취향 및 성격'때문인지 '지극히 보편적인 미국 사람의 성향' 때문인지 그 원인을 분간하기 부터가 어려웠다. 게다가 대체적으로 아시아인들보다는 하이톤에 텐션이 높은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반갑게 '하이!'를 외쳐댄다. 처음에는 이것만 보고 '미국인들은 정말 다 친절한 사람들'인 줄 오해했다. 그러나 오전에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 그날 오후 갑작스럽게 직원을 해고시키는 상사를 보고, 상대방이 떠나자마자 웃는 얼굴에서 바로 비아냥 거리는 표정으로 탈바꿈하는 그들의 포커페이스를 보면서 이후에는 무작정 '보이는 대로 믿지 않으려' 조심했다. 그러함에도 대부분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들이 보여준 일관성 있는 말투와 인상은 그들의 성격을 거의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재택근무에서는 말 만큼 중요한게 글이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표정과 말투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 보게 된 건 바로 그 사람이 쓰는 글. 재택근무 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건 이메일과 메신저다. 특히나 코비드 팬더믹 이후에는 개개인마다 일하는 시간에 대한 자율성이 더 부과되다 보니 웬만큼 급한 일 아니고서는 갑작스럽게 전화도 하지 않고, 모든 화상미팅은 미리 미리 정해진다. 메신저 또한 다른 일로 바쁠 때는 상태 표시롤 해두어 말을 걸지 말라는 표시를 해둔다. 이렇듯 이메일과 메신저로 글을 통한 의사소통을 하다 보니 오히려 지금은 그 사람이 쓰는 텍스트로 그 사람의 성격과 말투를 가늠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일은 잘하지만 차가운 것 같은 A팀장은 이메일에서 항상 궁금한 용건부터 직선적으로 바로 물어보며 시작한다. 내용 또한 1, 2, 3을 붙여 명료하게 말하길 즐기는 편. 모든 일에 의심이 많고 자신이 직접 컨트롤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은 N팀장은 글을 쓸 때 상대가 이미 결정 내린 의견에도 항상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고, 상대의 의도로 재차 확인하길 좋아한다. 남들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배려심이 많은 C 팀장은 (내가 존경하는) 이메일에서 자신의 코멘트로 일 방향을 정해준 뒤, '내 의견에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른 인사이트나 제안이 있으면 알려달라.'는 말을 잊지 않고 첨부한다. 사람에게 사교적이고 만날 때마다 가족 안부를 물어봐주는 D팀장은 이메일을 보낼 때 항상 앞부분에 '어떻게 지내냐', '크리스마스 계획은 세웠느냐'하면서 자신의 일도 언급하는 등 오픈 마인드적인 느낌을 준다.
물론 우스개소리로 '성격은 좋지만 무능한 상사보다 성격은 나빠도 똑똑한 상사가 낫다' 말하지만 이왕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차가운 글보다는 따뜻한 글에 마음이 더욱 열리게 된다. 같은 말을 전하더라도 어떻게 시작하고 끝맺는지에 따라 글을 받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다. 나만해도 같은 부탁이 있다면 항상 경쾌하게 인사말을 건내고, 찬성과 긍정의 표현에는 자주 느낌표(!)를 붙이면서 호응을 잘 해주는 B양의 부탁을 먼저 들어주게 된다.
그러나 이면을 보면 그 반대의 상황이 주는 부작용도 있다. 자신의 따뜻한 성격과는 달리 유난히 글에서 만큼은 그 부드러움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A팀장. 요점만 말하는 그녀의 이메일에는 나 역시 최대한 군더더기를 붙이지 않으려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작년 말 회사 출근하여 그녀 개인 미팅을 하면서 수다를 좋아하는, 여리고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임을 알고 놀랐다. 역시나 글 하나로 한 사람을 파악하긴 충분히 않았고, 그녀의 건조한 글 또한 그녀 성격이 차갑고 메말랐을 것 같다는 오해와 선입견을 낳았다.
이러한 경험은 이 후 나의 글쓰는 방식을 조금 바꿔주었다. 이메일을 보낼 때에도 가급적 상대방에 맞춰 표현을 쓰되 그 간 건조해 보일 수 있었을 나의 글 표현에도 생동감을 주려고 했다. 공식적인 이메일에는 전문성을 담아야하지만 몰아쳤던 일들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개인적인 글쓰기로 소통을 하려고 했다. 함께 한 팀원에게 메신저로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미국의 큰 명절이 다가오면 그들의 계획을 물어보기도 하고, 나 역시 적절한 선에서 내 개인사를 편안히 공유를 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 '미국 문화에 대해 확신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항상 조심성을 갖게 되었던 미국인과의 관계에서 다소 '방정맞아보이는' 표현들을 첨가해 내 모습을 보여주는 데 적극성을 띄려고 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러한 노력은 조금씩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우선은 간결, 명료함만을 보여줬던 상대의 이메일이 조금 더 길어진 듯한 느낌. 게다가 부드럽고 친숙해진 느낌들었다면 나만의 착각일까.
혹시나, '그 동안 내가 그들에게 준 이미지에 대응하여 그들 또한 나한테 그랬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어쩌면 나 또한 내 성격과 다른 이미지로 그들에게 오해받았을 수도 있겠다. 남 탓하기 전에 나부터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행복한 직장 생활에서 빼놓을수 없는 인간관계. 한 사람을 알아갈 때 어느 정도의 오랜 기간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친구'도 아닌 '직장 동료' 모두에게 일일이 내 소중한 시간들을 투자하는 건 누가봐도 어리석은 짓이다. 내가 좋은 이미지라면 그들 또한 좋게 받아들이고 다가올 터. 그들을 한 명 한 명 파악하기 이전에 내 스스로 '직장 내에서 나에 대한 이미지가 전반적으로 좋을수 있도록 구축해 놓는 것'이 어쩌면 가장 빠르고도 현명한 길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나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글의 표현력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어제 휴가 즐겁게 보냈어?"
"사실 휴가 다 못쓰고 oo 프로젝트 때문에 일이 있어서 오후에는 일했어. lol"
"오노! oo 프로젝ㄴ트 데이터 올 때까지 한 시간 정도 시간 비는데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그때 커피 타임 가져. haha"
처음에는 부드러운 인사말의 첨부로 시작했을 뿐이었다. 몇 달이 지난 지금, B양과 이제는 종종 수다 채팅을 떠는 사이가 됐다. 직장맘들이 가장 즐겨하는 시간이 아이들이 아닌 자기 또래의 직장 동료와 함께 갖는 커피 시간이라지 않는가. 비록 재택근무로 직접 만나진 못하지만, 각자의 책상에 커피 한 잔씩 가져다 놓고 마음 편히 채팅을 할 수 있는 친숙한 동료 한 명 있는 지금. 그것으로 충분하다.
'조용한 아시아인'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나 '은근히 적극적인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오늘도 난 내 텍스트에 열심히 '방정맞음'이란 양념을 첨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