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을 위한 엄마의 미션
산타 할아버지가 있을 것이라는 내 어린 동심이 무너진 건 초등학교 2학년. 나의 소망과는 달리 그 시점이 생각보다 빨리 왔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이면 동생과 나는 자기 전 머리맡에 각자 준비한 큰 빨간 양말을 걸어두곤 했다. 다음날 빵빵해져 있을 양말을 잔뜩 기대하며. 그 해는 모처럼 강원도 할머니 댁에 놀러 가 연말을 보내기로 했다. 떠나기 전 ‘우리가 집에 없어서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주면 어쩌지’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은 ‘산타할아버지는 다 알고 찾아올 거야.’라는 엄마의 말에 금세 사그라들었다.
친척들과 열심히 놀면서도 9시가 되자마자 산타 할아버지가 일찍 오실 수 있도록 나와 동생은 잠자리에 들었고 잊지 않고 가져온 빨간 양말 또한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방문 밖은 여전히 시끌벅적. 모처럼 다 모인 친척들의 대화 소리가 작진 않았지만 '신이 날 내일 아침’을 위한 만반의 기대에 그 소리 또한 백색소음으로 다가왔다.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잠순이었건만 왜 하필 그날에는 새벽녘에 잠이 깼을까. 아마도 자정 무렵이었을 듯하다. 문이 조용히 열리며 방문 틈으로 밖의 강한 불빛이 새어 들어왔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양말 안을 여러 선물들로 채우고 있었다.
‘오 역시 산타할아버지는 우리가 할머니댁에 온 지 알고 있었어!’
산타를 마주하다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러나 내가 깨어있다는 걸 들키면 안 된다. 눈을 꼭 감고 열심히 자는 척을 하고 있길 몇 분, 그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조용히 문을 닫으며 나간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들려오는 그의 말.
“언니, 애들 정말 곤히 잘 자는데? 오늘 피곤했나 봐.”
분명 여자 목소리다. 올해는 산타 할아버지가 아니라 산타 할머니가 오신 것인가. 애써 이런저런 나름의 이유를 붙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었다. 그 목소리는 우리 식구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매우 낭랑한' 우리 막내 고모의 목소리였으니까.
그때의 실망감이란. ‘산타는 바로 너희 엄마 아빠라고.’ 말하는 반 아이들의 말을 무시하며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를 굳건히 믿어왔건만. 고모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 여동생을 체크했다. 다행히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
그 순간 ‘여동생만이라도 산타의 존재를 오래 믿게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내가 느낀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크리스마스 선물을 푸는 순간 옆의 여동생이 들으라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와~역시 산타할아버지는 내 마음을 알고 계신가 봐! 내가 원하던 펜, 필통 세트를 사주셨어! 넌 뭐 받았어? ’
유난스레 호들갑을 떨었고, 동생을 선물에도 더 크게 손뼉 쳐주며 감탄했다.
이후 몇 년간, 동생이 ‘애들이 산타가 없다는데’라며 친구들의 말을 전하면
‘무슨 소리야. 언니가 옛날에 직접 카드도 썼는데 진짜로 답장이 왔다니까!’
며 콧웃음을 치며 응수를 했다. 엄마 아빠가 행여나 선물을 잊지 않으셨을까 해서 그 간 받은 용돈으로 동생이 좋아하는 물건을 사서 크리스마스이브날 머리맡에 놓아두기도 했다.
“언니 그거 알아? 난 바보스럽게도 진짜 중학교 2학년까지 산타의 존재를 믿었다니깐.”
몇 년 전 연말, 밖에서 여동생을 만나 고기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동생이 '자신은 참으로 미련했다는 듯' 한 마디를 한다. 오랫동안 동생이 동심을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나의 노력도 조금은 보태졌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은 뿌듯해진다.
“하하 그래? 그래도 믿고 있을 동안에는 크리스마스이브 날 설레지 않았어?”
“왜 아니겠어? 엄청 그랬지. 제일 좋을 때잖아. 그래서 우리 애들도 오랫동안 그 존재를 믿었으면 좋겠는데 요즘 애들이 그런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아는 아이들도 많대.”
나 또한 우리 아이들이 산타의 존재를 오래 믿길 바란다. 9살 둘째는 여전히 믿는 듯하지만 10대의 큰 아이는 이미 현실과 동심의 갈림길에 들어섰다.
“엄마, 아이들이 산타가 없다고 말하는데 사실... 나는 그냥 믿고 싶어요. 꼭 선물을 받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없다고 생각하면 그냥 조금 슬플 것 같아서.”
그래서 자신의 ‘위시리스트’를 몰래 써놓았다는 아이. 아마도 산타가 알아주길 그래서 선물로 그의 존재를 증명해주길 바라는 듯했다.
그리고 난 어제 아이 방에서 빨래를 걷어오는 중 우연히 책상 구석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덜렁거리는 딸이 어찌나 고맙던지.)
조심히 스티커를 뜯어 목록 중 첫 번째로 적혀있는 것, '한국 아이돌 앨범'을 바로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산타의 존재를 조금 더 믿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켜줄 수 있어서 다행스러운 마음이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산타는 사실 ‘올 한 해 잘 지내온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며, 가장 열심히 잘해다 칭찬해 줄 수 있는 존재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걸.'
그전까지는 얼마든지 아이의 산타 노릇을 기쁘게 해 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