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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치즈 Jan 10. 2023

반갑지 않은 겨울 출장을 대하는 방법

겨울출장의 새로운 매력

기차가 도착했어야 할 11시 23분이 훨씬 지났는데 감감무소식이다. 행여나 멀리서 달려오는 기차의 작은 경적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목을 더욱 빼고 기찻길 끝자라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기차 도착 시간을 보여주는 전광판에 새로이 빨간 글자가 뜬다


‘Notheast regional 195 기차 도착 7분 지연.'


하필 날씨는 오늘따라 왜 이리 추운지. 그래도 7분은 봐줄 만한 시간이다. 조금이라도 몸에서 열이 날까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거려본다. 마침내 기다리던 7분이 지나고 기차 탈 만반의 준비를 하는 순간 다시 업데이트된 전광판 숫자. ‘11분 지연.’ 휴, 숨 한번 들이쉰 후 한번 더 인내심을 발휘, ‘시간아 빨리 가라 빨리 가라’ 주문을 외워본다. 마침내 11분이 지났다! 순간 또 바뀌는 숫자. 이제는 ‘몇 분 뒤’라는 공지도 없이 그냥’ 지연(delayed)’라고만 뜬다. 순간 ‘장난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짜증이 솟구친다. 역시 주변을 둘러보니 보니 크게 불평하는 사람도 없다. 그들처럼 '그러려니'하는  도인 같은 마음에 도달하려면 미국 생활 13년 차는 아직 멀었나 보다.


곧이어 나오는 역내방송.


“시스템 문제로 인해 추후 공지가 있을 때까지 스탠바이하고 계시길 바랍니다.”

예상대로 납득할만한 자초지종이나 자세한 이유 없이 ‘통보’만 하는 불친절한 미국. 이쯤 되면 체념이란 것이 생긴다. '오늘 안에만 갈 수 있음 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왜 하필 일 년에 한 번있는 오늘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출장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출장’이 사실 반갑지만은 않다. 나의 부재중에도 남편 및 아이들의 모든 것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미덥지 못한 남편을 위해 아이들의 학교, 학원 라이드 시간부터 미리 준비해 놓은 냉장고 속 반찬에 대한 설명까지 모든 것을 정리해 냉장고에 붙여 놓아야 한다. 제 때에 가져가야 할 학교 준비물도 미리 알아놓고 필요시에 구매해놔야 한다. 고작 며칠의 '내' 출장을 위해 '가족'을 위한 준비로 일주일은 족히 써야 한다.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피하고만 싶어지는 추위를 동행하는 겨울출장은 더더군다나 흔쾌히 가고 싶지 않다. 그러함에도 이번 출장은 내심 조금 기다려졌다. 재택근무로 항상 집에서 식구들과 복작거리며 지내는 내 삶 속에서 유일하게 탈출할 수 있는 '나 홀로 시간'이 요즘 특히 더 필요했던 것 같다.


그. 런. 데. 이렇게  중요한 날 하필 기차 지연이라니.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앞으로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적어도 따뜻한 곳에서 기다리고 싶어 찾은 작은 대합실. 그러나 들어가는 순간 반 이상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거지들이 풍기는 역한 냄새에 바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냄새에 예민하기에 얼어 죽더라도 깨끗한 공기 속에서 죽는 게 나을 성싶었다. 절로 나오는 한 숨. 그 순간 내 옆의 백인 젊은 청년이 세상 편한 자세로 다리를 쭉 편채 차디찬 바닥에 철퍼덕 앉더니 해드폰을 쓰고 작은 스케치북을 꺼내 맞은편에 보이는 앙상한 겨울나무들을 스케치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여행을 즐기던 20대 시절, 강원도 겨울 기차 여행 장면이 떠올랐다. 어느 때보다 추웠던 강원도 겨울. 낡디 낡은 그 오래된 기차역에서 오랜 시간 기차를 기다리면서도 그 시간이 너무 설레었더랬다. 앙상한 나뭇가지마다 고드름처럼 달라붙어있던 언 이슬이 너무 예뻐 한참을 들여봤던 기억이 난다.


내 옆 청년을 따라 슬며시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들고 그 옛날 즐겨 들었던 조지 윈스턴의 ‘디셈버’의 음악을 재생한다. 불현듯 10여 년 전 읽었던 홍수희 시인의 시 <겨울고해>가 떠오른다.


겨울 고해

                                    김수희


겨울밤엔
 하늘도 빙판길입니다
 
 내 마음 외로울 때마다
 하나 둘 쏘아 올렸던
 작은 기도 점점이
 차가운 하늘밭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떨어지더니
 
 잠들었던
 내 무딘 영혼에
 날카로운 파편으로
 아프게 박혀옵니다
 
 사랑이 되지 못한
 바람 같은 것
 실천이 되지 못한
 독백 같은 것
 
 더러는 아아,
 별이 되지 못한
 희망 같은 것
 
 다시 돌아다보면
 너를 위한 기도마저도
 나를 위한 안위의
 기도였다는 그것
 
 온 세상이 꽁꽁 얼어
 눈빛이 맑아질 때야
 비로소 보이는 그것
 
 겨울은,
 나에게도 숨어있던
 나를 보게 합니다



그 시절 마지막 구절을 곱씹으며 '내 안에 숨어있던 나를 보게 하는 겨울의 매력'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해보곤 했던 기억이 난다. 다시금 시를 찾아 찬찬히 읽어보니 ‘짜증스럽기만 한 겨울 기차역에서의 기다림’이 ‘추운 겨울 감성에 나를 담아보는 시간’으로 바뀐다. 항상 반갑지 않았던 겨울출장이 은근히 기다려졌던 건 바로 이러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 아닐까. 야속한 기차 연착 덕분에 누린 시간이라니 아니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기차는 한 시간 반 지연되어 도착했고 덕분에 난 코끝 찡한 차가운 겨울 날씨를 오랜 시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기차가 도착하자마자 황급히 자신의 짐을 챙기는 청년의 스케치북 사이로 겨울 감성을 가득 담은 낭만적인 겨울나무들이 보인다.


너 덕분에 나 또한 과거 겨울추억여행뿐만 아니라 겨울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고. 고마운 인사를 마음속으로 전해본다.


2023년 가장 추웠던 1월의 첫 출장. 정신 번쩍 나는 추운 겨울바람처럼 올 한 해는 내 인생에 있어 신선하고도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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