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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May 16. 2019

선생님

1.

나는 고등학교를 조용히 다녔다. 그러다 보니 다른 애들처럼 선생님들과 친하거나 인사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공부를 곧잘 하는 편이었지만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나를 잘 몰랐다. 내가 그들을 잘 모르듯이.


한 번은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혼을 냈다. "너는 공부를 좀 하면 선생님들에게 인사도 좀 해야 실기 시험 점수도 잘 받고 그럴 거 아니냐." 아마도 인사를 하지 않은 탓에 너무 정직한 점수를 받은 뒤였을 것이다. 물론 정확하게는 내가 못한 탓에. 어쨌든 나는 말을 잘 듣는 학생이다 보니 정말 곧이곧대로 실기 선생님을 찾아가서 담임 선생님이 인사라도 한 번 드리라 해서 왔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가서 인사를 드리라는 게 다른 의미였을지도 모르겠지만.


2.

선생님들 중 거의 유일하게 교감 선생님만 나를 알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을 제외하면 내가 누군지 아는 유일한 선생님이었다. 물론 그분은 학생 거의 모두의 이름을 알고 있으신 분이었지만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참 신기한 일이다.

백발의 노신사인 그분은 언제 어느 장소에서 마주쳐도 항상 다정하게 말을 거셨다. 그분은 나를 조용히 불러서는 자신을 teacher가 아니라 friend라고 생각하라 하셨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셨다. 나를 my friend라 하시고는 나에게도 그리 부르라 하셨다.


그렇게 3년 동안 우리는 마주치면 친구처럼 얘기했다. 한 번씩 그분은 my friend로 시작하는 손편지를 적어 집 주소로 보내주시기도 했는데 나도 꾸역꾸역 답장을 적어 보냈다. 고등학생일 때도, 내가 재수를 할 때도, 군대에 있을 때도 그랬다. 군대에 있을 때는 우표도 동봉해서 보내주셨었다(누구에게 온 편지냐 동료들이 호기심에 물었을 때 선생님 편지라 말하면 보이는 황망한 반응이란...). 내가 마음이 헛헛하거나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는 직접 찾아가 뵙기도 했었다. 그분 댁에서 과일을 먹으면서 벽에 걸린 액자를 한참 쳐다보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도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할아버지이구나 생각하며


3.

군대에서 맞는 마지막 성탄절을 맞아 휴가를 나왔다. 나름 크리스마스 콘서트도 예약해서 시간도 없고 하여 신년 인사겸 보내야지 하고 조그만 카드를 하나 샀다. 어차피 지금 부쳐봐야 성탄 전에 도착할 수는 없으니 부대에 복귀하면서 보내면 되겠다 싶었다.

"경성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임하셨던 허OO선생님께서 12월 25일 0시 30분 별세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주/유족 허OO..."라는 문자를 받기 전에는 그랬다.


장례식장에 가니 아들인 상주분이 어떻게 오셨냐고 물었다. "아끼시던 제자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저의 friend였던 분'이라 되뇌었다.




0.

선생님은 내가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하셨다.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그러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항상 그 말씀을 떠올리고는 조금 마음을 다잡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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