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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Nov 11. 2019

희수

많은 사람들은 매년 11월 11일을 빼빼로데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날이 자동차를 처음 산 날이라 일종의 기념일이다(또한 자동차보험 갱신일이기도 하다.). 군대 가기 전에 운전면허라도 따자는 생각에 입대 전날까지 시험을 봤다. 정말 입대 바로 전날에 면허를 땄는데 채점하는 경찰관에게 저 내일 군대 가니 오늘 꼭 따야 된다 아쉬운 소리까지 했다. 이미 여러 번 떨어진 뒤라서 어쩔 수 없었다. 그 뒤 대학생, 대학원생 시절에는 자동차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서울에는 버스도 지하철도 이렇게 잘 다니는데 굳이 차가 필요할 건 뭐람,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면허는 있지만 운전은 못했다. 그런데 취직을 하려 보니 면접 자리에서 운전도 하는지 자주 물어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동차 운전도 현대인의 기술 중 하나인데 할 줄 모르는 게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운전 실력을 팍팍 기르려면 결국 차를 사는 게 가장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처음 자동차를 사면 많이 망가뜨릴 각오를 해야 한다고 들었다. 운전 기술이 서툴고 하니 그런다는 것이다. 또 그때 나는 집에서 놀고만 있던 상황이라 비싼 자동차를 사는 일은 경제적으로도 부담스러웠다. 결국 망가뜨려도 마음이 아프지 않을 정도 저렴한 가격의 중고차를 사야겠다 싶었다. 어떤 차를 살 것인가. 네이버 중고나라에 '운전연습용'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50~100만 원 사이의 그런 차를 살까도 잠깐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그런 차를 샀다가 길에서 멈춰버리기라도 하면 난감하겠다는 생각에 돈을 좀 더 써야지 싶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는 전도연과 하정우가 나오는 <멋진 하루>이다. 하정우는 극 중에서 예전 애인이었던 전도연이 몰고 온 은색 아반떼를 타고 서울을 누비며 돈을 빌리러 다닌다. 그래, 어차피 돈 좀 쓰는 거라면 나도 저 은색 아반떼를 타고 다녀보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심하고 나니 자동차를 타고 서울을 누비는 현대인의 멋진 하루가 눈앞에 그려졌다. 한국에서 아반떼 중고차를 사는 것보다 쉬운 일이 없지 싶지만, 은근히 내가 찾던 옵션을 모두 가진 매물은 많지 않았다. 운전이 서투르니 후방카메라도 있어야 하고 길도 잘 모르니 내비게이션도 있어야 했다. 요즘 차들은 거의 기본으로 달려있지만 당시에는 그게 나름 고급 옵션인 듯했다. 그리고 아반떼를 사는 사람은 그런 고급옵션을 잘 넣지 않았던 거 같다.


매일 상당한 시간을 SK엔카 이런 사이트를 보는데 소비했다. 그러던 중 눈에 띄는 매물이 인근 중고차 매장에 들어온 사실을 파악했다. SK엔카 사이트를 보고 있는 게 지겨워질 때였다. 차를 사러 가는 건 생각보다 더 긴장되는 일이었다. 인터넷을 보면 중고차 파는 사람들은 모두 양아치이고 문제가 있는 걸 문제가 없는 것처럼 속인다는데 나도 그런 수법에 당하는 게 아닐까. 온갖 생각을 다 하면서 중고차 매장에 들어섰다. 이거 보고 왔어요, 라고 하니 직원이 차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줬다. 차 외관을 살펴보는데 생각보다 큰 흠은 없었다. 본넷을 열어 보여주는데 내 눈에는 그냥 부서진 곳이 없구나 정도. 뭔가 아는 사람처럼 꼼꼼하게 보는 척을 잠깐 하다 그냥 바로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SK엔카 사이트를 다시 드나들 생각을 해보니 지금 사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니 별 이상 없겠거니 하고.


차 이름은 '희수'라고 지었다. <멋진 하루>에서 전도연의 극 중 이름이 바로 그 이름이다. 하정우의 이름을 따서 '병운'이라 할 수 있지만 좀 뭔가 이상하고, 특히 영화에서는 은색 아반떼가 전도연 소유이니 그 이름을 따르는 게 맞다 싶었다. 영어는 잘하는 편이 아니지만 대개 사물에는 여자 이름을 붙이는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친구에게 차를 샀다고 하니 신난다며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다. 처음 그렇게 갔던 곳은 파주 헤이리 마을인데 비가 엄청 많이도 왔다. 어두운 밤에 운전해서 긴장되는데 비도 오니까 걱정이 산더미 같았다. 타이어는 바꿔야 된다고 하던데 혹시 오늘 타이어가 터지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나저나 와이퍼도 바꿔야 되겠네, 그런 얘기를 하며 차를 몰아갔다. 회사도 안 다니던 그때의 나는 한동안 그 친구랑 어딜 그렇게 다녔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아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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