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계절을 네 가지로 나누고 가른다. 인식은 그러하나 과연 각 계절의 시작과 끝은 언제일까. 오늘부터 겨울! 오늘부터 봄! 이렇게 정할 수 있는 일일까. 사막에 가면서 그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사막의 한가운데는 어떻게 봐도 사막이겠으나 그 시작은 어디부터일까. 여기부터 사막! 저기까지 사막! 이렇게 정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내가 갔던 사하라 사막은 정말 여기부터 사막이구나 싶을 정도로 그 시작점이 분명했다. 정말 여기부터 사막! 궁금하면 가봐야지 더 이상 설명할 도리가 없다.
2.
계절은 사막처럼 눈에 보이지 않기에 달력상 12월부터 겨울이라 정하기도 한다. 나는 무슨 근성이 있어서인지 12월 이전에는 패딩점퍼를 입지 않는다. 가을인데 가을 옷을 입자. 비닐같이 바스락대는 긴 코트를 입고 추위에 떨어대며 가을을 양껏 머금는다. 그런데 아직 겨울이 아님에도 더 매서운 추위가 찾아오는 가을날도 있다. 오들오들 떨면서도 겨울이 아니니 패딩을 안 입겠다는 21세기 선비를 마주한다. 겨울이 아니로되 겨울 옷을 입을쏘냐.
3.
계절은 순환하기에 돌아오는 계절은 예전의 그것인가 싶지만 전혀 새로운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있으리라 믿었던 어린 시절에는 몰랐으나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일은 틀림없이 유한하다. 유한한 것은 누리면 차감된다. 계절은 알아서 오니 알아서 차감된다. 겨울이 오면 인생에서 겨울을 맞이할 기회 한 번이 절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과연 몇 번이나 겨울을 맞이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얼추 50번 정도나 남았을까. 그 횟수를 모두 채우는 평탄한 인생을 소망한다. 내 작은 소망을 떠올림과 동시에, 더 이상 겨울을 맞이하지 못하는 몇몇의 이름이 기억을 스친다. 그들의 평탄하지 못했음은 내 탓이 아니겠으나, 어느 날 걸려온 전화를 무시한 것은 내 일이 맞기에 때때로 생각이 난다.
4.
양평 용문사 커다란 은행나무를 생각한다. 천년을 넘게 살았다는 빌딩처럼 큰 은행나무. 올해 11월, 은행나무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은행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었다. 가을을 붙잡길 포기한 그 모습에 먼 발걸음을 했던 나는 허탈할 뿐이었다. 아직 서울 우리 동네에 있는 은행나무들은 한창인데 용문사의 가을은 누가 도둑질해 간 것인지. 그 커다란 은행나무는 언제까지 살까. 영원히 살 것이라면 가을을 차감하는 나에게 그 샛노란 빛깔을 좀 더 품어 보여주었다면 좋았건만. 11월에, 가을 옷을 입고, 친구가 모는 포터 트럭을 타고 용문사에 갔다가, 은행잎처럼 터벅터벅 그렇게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