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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Dec 27. 2019

승리

1.

성산동 시영아파트 상가 앞에는 '승리'라는 이름의 개가 살았다. 폐품을 이용해 허술하게 만든 개집 옆에는 "이름 : 승리, 성별 : 남, 연령 : 6개월, 관리처 : 시영상가"라는 설명이 검은색 매직으로 죽죽 쓰여 있었다. 그 위에는 붉은색 글씨로 "개조심"이라 적혀 있었는데 유심히 봐야 겨우 보였다.


2.

내가 보기에 승리는 이미 큰 개였다. 어느 때의 연령이 6개월인지 지금 와서 알 수 없고, 내 지식이 얕은 탓에 6개월 정도 큰 개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이유였다. 승리의 얼굴을 보아하니 일단 강아지 느낌은 아니었고, 특히 컹컹 짖 소리가 꽤 큰 것으로 보아 이미 다 컸음이 틀림없었다.


3.

나는 그즈음에 공부를 하고 있었다. 게으른 탓에 남들처럼 이슬을 맞으며 나가지는 못했다. 점심을 먹고 나가면 부지런한 날이었고, 때로는 하늘빛이 붉어질 무렵에도 집을 나섰다. 승리는 컹컹 짖었는데 붉은 시간에 그 소리를 듣자면 이제는 갈 수 없는 시골 외할머니 댁이 생각났다. 눈 앞에는 서울 월드컵경기장이 보이만 눈을 감으면 외할머니 댁 앞이었다. 연기 냄새도 날 것 같은.


4.

나는 멀리서만 승리를 바라봤다. 컹컹 짖는 소리가 크고 인상이 썩 친근하게 보이지 않았던 이유였다. 가까이 갔다가는 덥석 물려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은 승리 앞에 어린이들 여럿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어린이들은 승리를 둘러싸고 서있었는데 승리도 서있었다. 그냥 서있는 것도 아니라 어떤 여자 어린이와 춤을 추고 있었다. 어린이는 두 손으로 승리의 두 손 또는 두 발을 잡고서 덩실덩실 너풀댔다. 그간 험악하게 보이던 승리의 얼굴이 강아지처럼 보였다. 그 순간 나도 공부가 끝나면 그 누런 빛깔 목덜미를 쓸어 만져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필기시험을 봐야 하는데 혹시라도 손을 물리면 낭패이니 시험이 끝나고 난 뒤에야.


5.

어느 날 다른 때처럼 버스를 기다리는데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승리 집이 텅 비어 있었다. 시골이라도 간 것일까. 승리 집은 남아 있으니 기다리면 오겠거니 생각했다. 기대와 달리 며칠 뒤에는 승리 집마저 창고가 되고 말았다. 누가 관리하는지 알면 승리의 행방을 물어라도 볼 텐데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나쁜 생각도 들긴 했지만, 난 그냥 승리가 마음껏 뛰어놀 너른 대지가 있는 시골로 갔으리라 여기기로 했다. 결국 머지않아 시험이 끝났어도 그 북슬북슬한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지 못했다. 가끔 승리가 있었던 그곳을 볼 때면 미루다가 영영 하지 못한 일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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