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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꿈

당신의 포기를 삽니다

by 봄단풍

[이 글은 실화입니다.]


한참을 키보드에 손을 올려뒀다가,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나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좀 더 많이 읽을지를 고민하며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러다가, 썼던 문장을 얼른 지우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야 신기한 꿈 꾼 썰 푼다ㅋㅋ]


그리고 또 한참을 고민했다. 좀 주목을 받으려면 어떻게 써야하지? 그냥 일기처럼 적으면 될까……. 조금이라도 각색을 해야겠지? 아냐, 근데 지금 이렇게 시작하는 건 아무래도 너무 천박해 보인단 말이야.


[이 글은 전부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나는 그 문구를 띄워놓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무슨 글을 쓸지, 어떻게 하면 더 거창하게 보일지, 더 사람들이 읽어줄 지를 고민하면서.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썩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짚어봤다. 나는 얼른 화면을 지운 뒤 새 창을 열었다.


[고민 상담 좀 하려는데 들어줄 사람?]


때로는 망가진 체계가 화자의 진심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법이다. 나는 대충 생각나는 대로 쓴 뒤, 속 시원히 엔터키를 눌렀다. 그리고는 주간 회의 자료를 박 차장님께 넘길 때보다 초조한 마음으로 모니터를 노려봤다.

→[마침 한가해서 가능함. 한 번 썰 풀어봐.]

→[연애상담만 받아줄게.]


익명으로 운영되는 게시판이라 그런지 댓글들이 거침이 없었다. 새삼 취업을 준비하면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들어가는 길이 바늘구멍일지언정, 우리나라에 회사는 많다고. 회사가 많으니 이렇게 늦은 오후에 딴 짓을 할 수 있는 회사도 간간이 있는 것이겠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뒷내용을 이어쓰기 시작했다.

[이상한 꿈을 꿨는데, 꿈에서 소원을 빌었거든. 그런데 꿈에서 얘기한대로 되어가는 것 같아.]


이번에는 엔터키를 치자마자,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서 알림이 뜨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뭐가 이상했는데?]

→[오, 예지몽 같은 걸 꾼 거야?]

→[로또번호 혹시 봤으면 세자리만 알려줘봐…….]


풋, 저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옆자리 남 대리님의 의아한 얼굴이 파티션 뒤 쪽으로 빠져나왔지만 나는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새끼, 하여튼…….”


그새 내 모니터를 본 것인지, 남 대리님은 한 번 웃고는 다시 파티션 너머로 사라졌다. 그는 내가 인터넷에 올리려는 고민의 내용을 다 들은 사람이라, 더 이상 궁금한 내용은 없을 터였다. 생각해보면, 철없어 보이는 인터넷 댓글들보다 더 아이처럼 반응을 해주던 남 대리님이었는데. 어쩐지 아이를 낳은 이후부터 사람이 급격히 묵직해진 느낌이었다.


“나도 자동사냥이나 돌려놔야겠다.”


취소. 남 대리님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파티션 밑에서 핸드폰을 몰래 가로로 눕혀놓고 게임을 톡톡 두드리는 남 대리님에게서 눈을 거두고, 다시 눈앞의 모니터에 집중했다.


[소원을 빈 건 맞는데, 정확히는 빈 게 아니라 판 것 같아.]


→[뭘 팔아?]

→[꿈에서는 그런 거래 하지 말라고 누가 그러던데…….]

→[일단 자세히 얘기 해봐, 무슨 꿈을 꿨고 무슨 소원을 빌었는데?]


그 때쯤, 나는 전날 밤 꿈에서 처음 들었던 문장을 떠올렸다. ‘당신의 포기를 삽니다. 원하는 것을 편히 말씀하세요…….’


[원하는 걸 말해주면, 뭘 포기할지 알려준다는 꿈이었어.]


→[개꿈이네.]

→[그래서 뭘 빌었는데?]

→[일단 그 꿈 얘기 좀 자세하게 해봐.]


나는 다시 모니터와 내 눈 바로 앞 사이의 허공을 쳐다봤다. 둥실, 둥실. 하나 뿐이었던 먼지는 어느덧 몇 개로 늘어나 있었다. 회사 창문턱을 힘겹게 넘어온 늦은 오후의 햇살은 무대 위 빔 조명처럼 그 먼지들을 비췄고, 먼지들은 자기들끼리만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것처럼 느릿하게 둥실거렸다. 나도 모르게 그 먼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나는 어느새 몇 시간 전 꿨던 꿈을 다시 꾸고 있었다.


꿈속의 나는 병원 대기실처럼 좁은 복도에 일자로 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앉아있었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과 말을 트고 인사를 나눴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떻게 오셨어요?”

“신문 보고 왔어요.”


그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나는 고개를 괜히 끄덕였다. 그리고 나와 그 남자는 열심히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한참 얘기를 하다가, 그 처음 보는 사람은 갑자기 작게 속삭인 것이다.


“조심해요. 여기 왔다가 자살한 사람이 수두룩하대요.”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금세 문이 열리고 수척한 얼굴의 여인이 나왔고, 속삭이던 남자는 이름을 불려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나는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제야 문에 달린 간판을 확인했다.


『당신의 포기를 삽니다.』


나는 후다닥 일어나 복도 저 멀리 사라져가는 여인을 붙들었다. 좀비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수척한 얼굴의 여인은 초점없는 눈으로 나를 천천히 돌아봤다. 나는 놀라는 대신 그녀에게 무엇을 포기했냐 물었고, 여인은 잠시 땅을 내려다보다가 대답했다.


“딱 하나요.”


그렇게 말하고 여인은 돌연 사라졌다.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이후 한참동안 아무도 없는 복도에 홀로 앉아있던 나는,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린 후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그 곳은 병원 진료실 같았다. 집 근처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내과. 수염을 길게 기른, 또 수염만큼이나 기다란 주름이 얼굴 곳곳에 흐르는 남자가 하얀 가운을 입고 책상 너머에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는 수염을 만지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그는 몹시 지쳐보였다. 남자는 턱이 빠질 것처럼 크게 하품을 하더니 입을 쩝쩝 다시며 말했다.


“우수하씨. 처음이시네요?”


끄덕끄덕. 나는 대답 대신 몸으로 대답했다.


“저희가 뭐하는지는 알고 계시죠?”


절레절레. 꿈속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자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푹 쉬더니 이내 내가 들어온 문을 턱으로 가리켰다. 문에는 금속 활자로 몇 줄의 글이 적혀있었다.


『당신의 포기를 삽니다. 원하는 바를 편히 말씀해주세요. 소원, 갖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바라던 인생, 뭐든 좋습니다. 크기에 따라 당신이 포기해야 할 것들을 알려드리고, 대신 말씀해주신 사항은 확실하게 보장해드립니다.』


“살면서 원하는 걸 전부 가져본 적 없죠? 항상 뭔가를 얻으려면 다른 뭔가를 포기해야했고. 포기를 해도 원하는 걸 확실하게 얻어 본 적은 없을 거예요. 그 정도의 준비와 각오는 모두가 하지만, 운도 따라야하고 환경도 도와줘야하죠. 저희는 그럴 일이 없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맞춰서 딱, 몇 가지만 포기하도록 도와드리고, 대신 원하는 건 확실하게 이뤄드려요.”


지친 기색인데도 남자의 말은 미리 준비된 응대 멘트처럼 술술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도 평소와는 달리 넉살 좋게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에이, 그걸 어떻게 믿어요.”

“그럼 한 번 시험해 보시든가. 지금 당장 원하는 게 있어요?"

그래서 나는 당장 떠오르는 걸 바로 뱉었다.


“돈이요. 10억 원 정도?”

“그럼 당신의 건강을 포기하시면 됩니다.”


남자는 그렇게만 답하고 빤히 내 눈을 바라봤다. 예로부터 건강은 절대 놓쳐선 안 된다, 건강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배워왔던 터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10억을 주는 대신 암이나 백혈병을 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래서 그 때부터, 내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떠지지 않는 눈으로 간신히 씻고 옷을 걸쳐 입고, 신문지 게임을 방불케 하는 좁은 지하철에 간신히 발을 올리고, 그 때까지도 감긴 눈과 정신을 토닥토닥 달래가며 회사로 향하고. 그 때 못 차린 정신을 깨워보면 이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 뒤, 겨우 집에 들어오면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뭔가를 하자니 지치고, 아무것도 안 하자니 억울한 그 시간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부은 눈을 깜빡이며 잠이 들고.


그렇다면 그 이전의 삶은 흥미로웠냐하면, 딱히 기억에 남는 드라마틱한 전개도 없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공부를 누가 시킨 것처럼 하면서 대입을 준비하고.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꿈같은 대학생활을 맛만 본 뒤, 후배를 받기도 전에 군대를 다녀왔다가, 홀로 남은 캠퍼스에스 외로이 취직 준비를 위해 학점을 관리하고, 이력서에 채울 한 줄의 글을 만들기 위해 관심에도 없는 동아리와 학회를 기웃거리고. 이만하면 논문을 두 세편을 썼겠다 싶을 정도로 자기소개서를 많이 쓴 뒤에 겨우 붙은 회사에 들어와서 지금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당장 원하는 건 삶의 변화. 하루하루 큰 사고 없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부러워하는 시선도 받아보고, 사랑이라는 걸 경험해줄 연애를 통해 가족도 만들어보고, 그 가족들에게는 삶의 안정이자 자랑스러운 아들, 남편이자 아버지로 바로 서는 삶. 또 그만큼 경제적인 부담도 없이, 마음대로 쓰지는 못하더라도 가족들과 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수입을 벌어들이는 것.


“욕심이 많으시네.”


한참을 듣던 남자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큰 걱정 없이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삶을 원하는 것도 욕심이 많은 거구나. 문득 몇 년 전 헤어진 여자 친구가 이별을 통보하기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오빠는 왜 그렇게 욕심이 없어?’ 이것 봐,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것보다 더 큰 욕심이 있을까, 요즘 세상에?


남자는 어딘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한참을 바라보더니, 이내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면 딱 하나만 포기하면 돼요.”

“뭔데요?”

“당신의 행복.”


계산을 마치고 키보드에서 손을 뗀 남자는 안경 너머로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당신에게 남은 인생의 행복.”


그가 너무나도 자신 있게 말을 꺼내서, 나는 잠자코 그가 말을 이어나가길 기다렸다.


“행복 하나만 포기하면 방금 말씀하신 걸 전부 다 드릴 수 있어요. 당신의 가족은 경제적인 부담 없이 살 수 있고, 친구나 동료들로부터는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 할 수 있죠. 대출이자 걱정, 사람들 시선 걱정, 혹시나 나에 대해 실망할지도 모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 말씀하셨던 걱정 없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어요.”


행복해지고 싶다는 얘기를 했는데 행복을 포기하라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생각해봐요. 살면서 뭔가를 포기한다고 해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지킬 수가 있었습니까? 포기한 건 다시 되찾을 수 없고, 그렇다고 지키려던 것을 죽을 때까지 지킬 수도 없는 노릇이죠. 결국 삶이란 건 끝에 다다르기 전까지 당신이 가진 것들을 하나씩 버리는 과정이에요. 그리고 지금 저는, 당신이 가진 것 중에 딱 하나만 버리면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분명 말투는 영업사원인데, 정작 말하는 사람은 지쳐보였다. 지친 그 눈을 보고 있자니 문득 하나만 포기했다던 여인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살한 사람이 많았다고 조심하라고 일러주던 남자도.


“딱 하나만 버리면 돼요. 이 기회를 놓치면, 아까 말씀하셨던 돈, 명예, 가족의 행복, 그리고 당신의 행복까지 통째로 다 놓칠 걸요. 살아가면서 혼자 저 모든 걸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다가 죽기 전엔 다 포기해야 할 걸요?”


아니, 행복하려고 돈도 벌고, 사람들 시선과 안정적인 가정을 원했던 건데 행복을 포기하라니? 행복하기 위해 갖고 싶은 것들인데, 정작 행복을 포기해야 가질 수 있다는 건 무슨 말이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보다 쉽고 간단한 건 없느냐 물었다. 남자는 눈을 다시 컴퓨터로 돌리며 대답했다.


“그건 제가 여쭤봐야죠. 한 번 간단한 것부터 시험해보세요.”


곰곰이 생각했다. 결국 이 사람이 말하는 건 원숭이 손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세 가지 소원을 이루어주지만, 대가가 따른다는 것. 돈을 달라 했더니 아들이 죽어서 보상금이 나오고, 죽은 아들을 살려 달라 했더니 몸이 잘린 시체를 그대로 일으켜서 집으로 데리고 왔었나……. 한 가지 다른 점은, 내가 원하는 뭔가를 얻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이 뭔지 미리 알려준다는 점이었다. 쇼핑하는 것 마냥, 밥 값 계산하는 것 마냥. 그렇게 생각하면 그다지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 당장 소소하게 원하는 것이 뭐가 있을까? 대가가 두렵지 않은, 소소하게 원하는 것.


고민하고 있었지만, 이미 마음 한 구석에서는 호기심 비슷한 작은 욕망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깨를 넘는 검은 머리카락, 하얀 피부, 차가운 표정에서 흘러나오는 똑 부러지는 목소리. 회사는 물론이고 근처 식당과 노점에서도 기억하고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정과는 다르게 마음이 따뜻해 보이는 사람.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꿈속인데도 기억나는 밝은 미소가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냥 그 사람하고 말 좀 해보고 싶어요.”

“말을 터보고 싶다…….”


처음으로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내내 귀찮아하던 남자에게 한 방 먹인 것 같아 묘하게 통쾌했다. 남자는 컴퓨터를 한참 노려보고, 키보드를 여러 번 두드리고, 손도 안 대던 책상위의 차트를 뒤적거리고, 규정집처럼 보이는 두꺼운 책을 몇 번 훑어보더니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사소한 소원이 오랜만이라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아니 이 아저씨가?


“산정 해보니까 간단하네요. 하루만 포기하세요. 당신 남은 인생 중 딱 하루.”

“하루를 포기……. 그게 무슨 말인데요? 수명이 줄어드는 거예요?”

“일어나면 알게 돼요. 자, 그럼 다음에 뵐게요.”


[그리고 눈을 떠보니까 꿈이었더라고.]


→[개꿈이네.]

→[개꿈이네22222]

→[333]

→[그런데 꿈치고는 되게 자세하긴 하다.]

→[조심해. 아는 사람이 꿈에서 그런 거래를 요구하면 절대 들어주지 말랬어.]

→[근데 하루를 팔았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수명이 줄어든 거 아냐?]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네.]


사실 첫 댓글이 맞다. 개꿈이다, 개꿈. 제 아무리 선명하게 기억난들 굳이 사무실 컴퓨터에 남길만한 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어떻게든 나누려고 했던 건, 오늘 하루가 최악이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뜨고 보니 평소랑 다르게 참새소리가 들리고, 알고 보니 핸드폰에 충전기를 꼽아놓지 않아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고. 시계를 살펴보니 출근 삼십분 전, 회사까지 걸리는 시간은 바로 출발해도 45분. 하필이면 가는 길마다 신호에 걸리고 지하철도 연착, 엘리베이터는 문 앞에서 닫히고, 늘 지각하던 박 차장님이 오늘따라 제시간에 와서 와장창 깨지고, 핸드폰을 충전시켜놨더니 요즘 것들은 책상 정리는 안하고 핸드폰만 챙긴다면서 박 차장님께 또 깨지고. 하필 이런 날 부장님은 심기가 불편해서 오전 회의 내내 분위기는 험악했고…….


그래, 그 모든 건 그 꿈 때문이다. 꿈같지도 않은 꿈! 원하는 걸 말하면 들어준다니, 요즘 내 삶이 어지간히 퍽퍽했던 모양이었다. 누군가 꿈은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욕구의 발현이라고 했었잖아, 그런 얘기지. 다만, 이번 꿈은 지나치게 생생하기도 했고, 지나치게 타산적이기도 했다.


‘원하는 걸 말씀하시면, 들어드리는 대신 포기해야 할 것을 말씀드립니다.’


만약에 그 꿈이 사실이라면, 그 포기하라는 하루가 뜻하는 건 오늘이 분명했다. 아니, 그런데 거래를 진행하려면 당연히 고객하고 어느 하루로 할지 먼저 동의를 구하고 서명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냐? 만약 내 하루가 이 모양으로 흘러가는 것이 꿈속의 그 아저씨 짓이라면, 당장 오늘이 끝나기 전에 결과물을 눈앞에 내놔야 할 거다.


→[그래서, 뭘 빌었는데?]


속으로 이를 아득바득 갈 때쯤, 알림이 울리면서 새로운 댓글이 모니터 구석에 떠올랐다. 나는 괜히 손님을 기다리게 한 맛집 사장님이 된 것처럼, 허겁지겁 키보드로 손을 가져갔다.


[회사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누구? 선배? 후배?]

→[나보다 입사 1년 정도 먼저한 선배야.]

→[오 일 년이면 사수겠네.]

[아 그건 아니고, 다른 부서 선배.]

→[잉 그럼 어떻게 좋아하게 된 거야?]

→[아니 잠깐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풀지 말고, 좀 차근차근 첨부터 얘기해봐. 넌 몇 년차고 그 사람은 다른 부서인데 어떻게 알게 됐고 어떻게 좋아하게 된 거야?]


마지막 댓글을 읽고 나서, 나는 차분히 기억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더라, 언제 처음 감정이 생겼었더라……. 나는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 멍한 눈으로 기억을 펼쳐놓은 허공을 헤집었다. 기억은 금세 몇 달 전의 회식자리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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