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하 씨, 얼른 박 차장님 잔 채워드려.”
“예, 예.”
사회생활에 있어서 거절을 어려워하는 성향은 대부분의 경우 독이 되어 돌아오는데, 대표적으로 회식자리가 그러했다. 그나마 입사 첫 해 신입 때는 귀엽다며 많이들 넘어갔지만, 후임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조금씩 주도적인 역할이 맡겨지는 법이다. 특히나 다른 부서와 같이 하는 회식에서는 말이지.
“우 주임, 그거 내가 한참 전에 따라준 것 같은데?”
“아, 넵!”
호로록,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나는 다섯 번째 소주잔을 목 뒤로 넘겼다. 그건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냄새를 꾹 참고 목젖 너머로 술을 던져 넣는 것이었다. 최대한 술기운이 늦게 올라오길 바라면서. 힘내라 간, 일해라 내 간……. 그리고 그런 바람들이 무색하도록, 잠시나마 비워냈던 잔은 경직된 자세로 뻗어진 내 손 끝에서 다시 찰랑찰랑 차오르고 있었다. 사실 현명하게 거절하는 방법은 많을 텐데, 도무지 떠오르는 것도 없었고, 간신히 방법을 생각해내도 실행에 옮길 용기가 없었다.
그렇다. 나 같은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데에도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법이다. 조금이라도 주춤하면 왜 그러느냐 묻는 눈총을 마주하기 두려워서, 못 마시겠다는 말을 뱉었을 때 튀어나올 윗사람들의 반응과, 그들이 각자의 마음속에서 나에게 뱉을 말들에 대한 걱정이, 대안을 찾으려는 모든 노력을 수포로 만들곤 했던 것이다.
“우리 이 대리도 한 잔 하지?”
“아유, 차장님. 저 진짜 너무 힘들어서 조금만 쉬었다 갈게요.”
“아니, 힘들게 뭐가 있어, 이 대리가? 누구야, 누가 힘들게 해?”
“차장님이요! 지금! 차장님이!”
“나? 아냐, 아냐! 내가 무슨. 으하하하하…….”
맞은편의 홍보팀 직원도 상황은 마찬가지인 듯 했다. 이 대리라는 분은 이미 거나하게 취한 듯한 홍보팀의 차장님과 술 한 잔을 가지고 웃으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지만, 결국 시간을 몇 초 더 끌었을 뿐 그녀도 금세 술을 털어 넣었다. 나는 최대한 병풍처럼 있으려 노력하며 눈의 초점을 풀었다. 나는 배경이다, 나는 방석 위에 얹어진 커다란 인형일 뿐이다, 그렇게 버티다가 2차로 가기 전 무조건 탈출해서 집으로 돌아갈 거다…….
“우수하.”
“예, 박 차장님.”
“이따가 홍보팀이랑 우리팀 다 같이 들어갈 만한 노래방 하나 찾아 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적당히 빼, 인마. 홍보팀 신입보다 못 마시면 어떻게 해?”
툭. 감정이 절반 정도 실린 손찌검이 내 어깨로 내리쳐졌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위해 허허 웃었지만, 오늘도 가슴 한 구석이 그렇게 무너졌다. 세상에는 시간이 갈수록 무덤덤해지고 적응되는 일도 있지만, 방사능마냥 시간이 갈수록 축적되면서 참기 힘들어지는 일도 분명 있는 모양이었다.
“자, 이거 봐. 나 또 잔 비었잖아. 가만있을 거야, 자꾸?”
그리고 우리 재무팀의 박 차장님은 그런 부분을 기가 막히게 잘 자극했다. 어쩜 그리도 내 울화통이 터지는 부분, 내 얼굴이 붉어지고 어깨와 뒷목이 뻐근해지는 자극점을 잘 찾는지. 마사지를 하셨어도 대성하셨으리라…….
“박 차장님~”
“어, 진주리 아냐?”
그리고 내가 박 차장으로부터 두 번째 잔을 받을 무렵, 왁자지껄한 회식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박 차장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 하얀 피부, 커다란 눈. 거의 못 먹는 소주를 한 병 가까이 억지로 먹은 뒤 기억나는 건 그 정도 이미지뿐이었다.
“잘 지내시죠?”
“어, 우리 막내가 답답한 것만 빼면. 껄껄껄- 진 주임이 재무팀에 왔어야 했는데 말야.”
화끈. 민망함, 부끄러움, 그리고 짜증과 분노가 동시에 솟구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가 그동안 뭘 못했는데? 억울했다. 못하는 술을 먹는 것도, 내 시간을 포기하고 회식 자리를 지키는 것도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한 건데 그래도 부족했나보다.
“아유, 제가 갔으면 박 차장님 저 무지 욕하셨을걸요. 그런 말씀 하시는 거 보니까 재무팀 막내는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슬쩍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무늬 없는 하얀색 블라우스와 검은 바지를 입은, 단정한 차림의 진주리 주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보였고, 그녀는 똑같이 고개를 꾸벅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길게 기른 검은색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크게 찰랑거렸다.
“우리 홍보팀에 새로 온 직원이 있어서 소개 좀 시켜드리려고요. 잠깐만 앉을게요.”
진 주임님은 그렇게 말하며 나와 박차장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홍보팀에 새로 왔다는 김 주임이 앉았다. 짧은 머리카락, 뿔테안경, 절도 있는 동작. 내가 처음 회사에 왔을 때, 혹은 처음 자대배치를 받았을 때의 모습과 꼭 닮아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홍보팀 김지호 입니다.”
“어, 그래그래.”
박 차장님과 김 주임은 그렇게 술잔을 나눴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재무팀 우수하입니다.”
“선배님,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네? 아니 뭐……. 저랑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요.”
크흠. 옆에 앉은 박 차장님의 헛기침 소리가 오른쪽 고막에 박혔다. 메아리처럼 고막에 꽂혀서 울리는 그 불만 많은 소리에, 나는 어영부영 뒷말을 덧붙였다.
“앞으로 차차 자주 뵙고 편하게 해요.”
“크흐으음.”
오히려 더 맘에 들지 않았던 듯, 박 차장님은 한 번 더 길게 기침을 한 뒤 담배를 피운다며 자리를 떴다. 식당의 큰 유리문을 열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힘드시죠? 박 차장님.”
“네?”
맞은편에 앉은 진 주임님은 그렇게 말을 걸어왔다. 사실 진 주임님은 여러모로 회사에서 유명인사였던 터라, 나는 괜히 연예인을 만나는 것처럼 몸이 얼어붙었다. 회사에서 진주리 주임님을 대표하는 단어는 하나가 아니었다. 예쁘다, 일 잘한다, 똑똑하다, 센스있다, 인기가 많다……. 나는 행여 얼빠진 모습을 보일까봐 황급히 대답을 이었다.
“아, 아뇨. 아뇨. 막 힘들진 않아요.”
“원래 박 차장님이 유명해요. 꼰대 중에 꼰대로.”
진 주임님은 그렇게 얘기하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겪어보니 어때요? 많이 갈구고 그러죠?”
“어…….”
마음 같아서는 고개를 폭풍처럼 끄덕이며 흉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주량을 넘겨 술을 마신 탓인지, 하고 싶은 말이 제대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조리있게 생각할 정신도 없었고, 대답을 차근차근 정리할 시간도 없었다.
“술은 확실히 세신 것 같아요.”
“풋- 우 주임님 술이 약하시구나.”
“네. 아하하하…….”
부끄러웠다. 아까와는 달리 순전히 창피함 순도 100%로 붉어진 얼굴을 살며시 들고 진 주임님을 쳐다봤다. 미소를 한껏 품은 그녀의 미모는 확실히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만했다. 하얀 피부위에, 누가 그려놓은 것처럼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썹, 그 아래 비슷하게 구부러지는 눈웃음까지…….
“여기 있었네?”
“과장님.”
박 차장님이 앉아있던 자리에 처음 보는 홍보팀의 직원이 앉았다. 얼마 전 인사이동으로 다른 부서에서 옮겨왔다는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하지만 그 때부터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던 터라, 나는 그의 목소리가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고왔다는 것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지호는 많이 먹었지? 좀 쉬고. 주리 너도 한 잔 하지?”
“과장님, 저 지금은 못 마셔요.”
“왜?”
“컨디션이 안 좋아요.”
“야, 팀장님 앞에서 그런 말하지 마라. 나니까 그냥 넘어가는 거지……. 그냥 잔이라도 채워봐.”
“그럼 과장님이 나중에 병원비 대주시는 거죠?”
옆에 앉은 남자의 몸이 잠시 굳었다. 그리고 몇 초 후, 싸늘하게 굳어가는 분위기를 아슬아슬하게 깨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파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천천히 하자고.”
와. 저렇게 하면 되는구나. 나는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를 한쪽 어깨로 넘겨 정리하는 진 주임을 멍하니 쳐다봤다. 별 거 아니구나, 그냥 당당하게 저렇게 거절하면 되는 건데, 나는 그 한 두 마디가 왜 그리도 어려운걸까…….
“우 주임님, 홍보팀 안 과장님이에요.”
“안녕하세요. 우수하입니다.”
“처음 보네. 술 마시지?”
안 과장은 술병을 든 채 내게 물어왔다. 나는 어떻게든 대답하려 했지만, 입이 마음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방금 들은 것처럼 해, 멍청아. 그냥 못 마시겠다고, 힘들다고 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대답한다고 누가 널 미워하는 것도 아니고, 찍히는 것도 아니라고!
“아, 그……. 네.”
느려진 정신임에도 손은 이미 빈 술잔을 들고 있었다. 곧 잔이 채워졌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움직여 억지로 술잔을 입가에 가져갈 때쯤, 갑자기 차가운 손이 내 손 위에 얹혀졌다.
“우 주임님. 잠깐.”
그리고 그 시원한 감각은 곧 손을 타고 온 몸으로 퍼졌다. 짜증, 분노, 술기운, 온갖 부정적인 것으로 따뜻하게 달궈졌던 몸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면서 정신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 시원한 손의 주인이 다름 아닌 진 주임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과장님! 아까 그 자리에 누가 앉아있었는지 알아요?”
“누가 앉았는데?”
“박 차장님이요. 우 주임님 오늘 계속 박 차장님이랑 같이 있었어요.”
“그게 왜?”
“박 차장님이라니까요! 엄청 드시잖아요, 그 분. 우 주임님 좀 쉬게 두세요.”
천사다. 나는 술기운으로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그렇게 외쳤다. 천사다, 이 사람은. 나는 온 몸이 딱 굳은 채, 내 손 위에 얹어진 하얀 손을 멍하니 쳐다만 봤다. 얼굴만큼이나 하얀 손은 곧 술잔을 잡은 내 손을 꾹 눌러 탁자 위에 내려놨다.
저렇게 하면 되는데, 저렇게 당당하게.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와 걸크러시…….]
→[인정. 반할만 하다. 우리 사수가 그랬으면 좋겠네.]
→[그래서? 그래서 그 다음은?]
깜빡거리는 모니터 알림을 보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나는 재빨리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게 다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해피엔딩이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알림이 떠올랐다. 왠지 친구한테 놀림을 받은 기분이라, 나는 인상을 팍 쓰고는 게시판을 화면 아래로 내려버렸다. 그래, 실컷 비웃어라. 어쩌라고, 그럼? 다른 부서라서 볼 일도 많이 없고, 워낙 인기도 많은 사람이라 만나도 인사 한 번 나누기 힘든데.
→[다음 계획 같은 건 있어? 어떻게 말을 걸고 어떻게 친해질지.]
→[아니, 사실 그런 걸 좀 물어보려고 올린 건데…….]
→[아 정말로 이게 다야? 힘들겠는데.]
→[222222222222 그냥 달리 해줄 말은 없고, 힘내라.]
다시 한 번 욱 했지만 마땅히 대꾸할 말도 없었다. 그래, 사실 나도 안다. 진 주임님만큼 외모나 목소리가 멋진 것도 아니고, 사회생활을 잘 하는 것도 아니니까. 하루하루 회사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혹은 박 차장님에게 미움 받지 않도록 노력하며 버티는 것뿐인걸. 그리고 그렇게 버둥거리며 사는 사람에게 내세울만한 재산이나 성격, 혹은 그 외의 다른 어떤 조건이든 채워져 있을 리가 있나.
한숨을 쉬고 잠시 허공을 바라봤다. 괜히 모니터 앞에 어른거리는 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둥실, 혼자서 춤을 추던 그 실오라기 하나는 천천히 밑으로 가라앉다가, 허벅지 근처에 왔을 때 눈에서 사라졌다.
“수하 씨, 잠깐 보지.”
댓글들에 한참 몰입했을 때쯤, 나의 불편한 부분을 자극하는 박 차장님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나는 재빨리 게시판과 알림을 끈 뒤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다.
“오늘 회의자료 언제 보냈어?”
“아까 오전에 차장님 메일로 송부드렸습니다.”
“아니, 내가 전날 보내 놓으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 지시사항이 있었지, 한 육 개월 쯤 전에. 차장님이 늘 회의 직전에야 회의 자료를 출력해서, 당일 오전에 보낸 지가 이미 몇 달째긴 하지만, 그래, 처음에는 그런 지시가 있었지. 다만 오늘 회의에 참석했던 부장님의 심기가 좋지 않았을 뿐이다. 평소처럼 준비를 하지 않았던 차장님이었지만, 유독 오늘 회의 때 심하게 깨진 터라 문제를 삼는 모양이었다.
“그럼 어제 메일 안 보내고 퇴근했다는 거잖아. 왜 그러는 거야?”
교무실에 불려가 혼나는 고등학생처럼, 나는 차장님 탁자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니, 왜 이렇게 근무 태만이야, 진짜. 무슨 일 있어?”
평소에 자료를 읽어보지도 않는 건 근무 태만이 아니고? 어떻게든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르려, 나는 숙였던 눈을 들어 괜히 주위를 살폈다. 파티션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남 대리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이내 자신의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내가 왜 전날에 보내라고 하겠어? 들어가기 전에 읽어 보고, 준비를 해야 할 것 아냐, 나도. 주간 회의야 물론 우리 부서만 하지만, 부장님도 있는 자리잖아. 만약에 본부장님 오시고, 어? 하면, 어? 어떡하려고 그래?”
코웃음이 나왔다. 물론 진짜로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회의 시작 1분 전에 출력하기 바쁜 사람이 준비를 한다고?
“죄송합니다.”
늘 그렇듯 마음의 소리와 입 밖에 나오는 소리는 달랐다. 사회생활이란 그런 것이다. 마음과 현실의 괴리를 인정하며, 뱉지 못한 현실의 말을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울려보는 것.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 내 머릿속이 대나무 숲이다! 박차장님은 말없이 한참동안 나를 올려보다가, 잠시 모니터로 눈을 돌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건 그렇고, 우주임 내일 일정 있어?”
“내일이요?”
잠시 얼이 빠진 이유가 있었다. 내일은 토요일이었으니까! 공식적인 휴일에 갑자기 차장이 내 일정을 묻는다는 건 불길한 징조임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파티션 너머로 나와 비슷한 냄새를 맡은 머리통들 서넛이 귀를 연 채로 스르륵 올라왔다.
“네, 친한 친구 결혼식이 있습니다. 오래 알던 친구라서…….”
그리고 정말 일정이 있기도 했다. 나는 괜찮겠지, 다른 사람을 찾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솟아오른 머리통들에 떠오른 불길한 표정을 머릿속에서 애써 지웠다.
“내일은 시간 좀 비우지.”
“네?”
“내일, 저, 홍보팀에서 야유회를 가는데 사진 찍을 사람이 없대. 수하 씨가 가서 도와줘.”
“왜요?”
입사 이래 처음으로 마음의 소리가 그대로 입 밖에 튀어나왔다. 눈은 똑바로 차장에게 고정한 채. 모니터만 바라보던 차장의 눈이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내게로 향하고, 동그랗게 떠진 눈 아래 더 동그란 입 모양으로 천천히 소리가 새어나왔다.
“왜요……?”
“아니, 저, 홍보팀 행사인데 왜 제가 사진을 찍나, 해서요. 사진은 홍보팀에서 훨씬 잘 찍을텐데.”
최대한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나는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식은땀이 등 한가운데로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삐끗하면 낙사다. 나는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농담이었다, 분위기를 전환 시키고 싶었을 뿐이다라고 설득하기 위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가라면 가, 그런 걸 물어. 결혼식은 몇신데?”
오후 다섯 시입니다. 나는 뒷짐을 지며 다시 진지해진 태도로 대답했다. 그걸로 의구심은 풀린 것인지, 차장은 눈을 모니터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일단 가. 일단 가고, 야유회 사진 찍는 건 오전이랑 오후에 조금만 할 수도 있으니까 가서 잘 말해봐. 사정 있으면 빼주겠지.”
“…….”
“가. 왜 대답을 안 해?”
“아, 저 근데……. 좀 오래 전부터 잡아놨던 약속이라…….”
차장의 입에서 거친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문득 속도를 내기 직전의 증기기관이 떠올랐다. 내 심장이 급속도로 움츠러들면서, 동시에 박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망했다.
“그럼 내가 갈까? 우주임. 내가 가?”
“아닙니다.”
결국 나는 그렇게 힘없이 자리로 돌아왔다. 내게 설레는 얼굴로 청첩장을 건넸던 친구에게 뭐라고 사과를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