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포기를 삽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뒤통수가 따가웠다. 정작 욕을 내뱉은 장본인은 껄껄 웃고 있었지만, 내 속은 반대로 하얗게 타고 남은 재만 휘날리고 있었다.
“존나 멋있었다. 왜요? 내일 사진 좀 찍지. 왜요? ‘니가 가라, 하와이.’ ‘왜요?’ 푸하하하…….”
그렇게 ‘왜요?’와 껄껄껄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배를 부여잡던 남대리님은 겨우 숨을 돌리면서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역사에 남을 거다. 박 차장한테 ‘왜요?’ 될성부른 놈인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
“내가 미쳤지.”
커피를 홀짝이는 사이 밖에서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3월도 중순이 지난 지금, 꽃샘추위도 떠났고 이제 막 이파리들도 돋아나는 봄. 감상에 젖고, 결심도 다지며 봐야 할 풍경을 나는 남 대리님과 단 둘이 직원 휴게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어떻게든 퇴근 직전 시간을 벌어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여야할 곳이었지만 금요일 저녁은 예외다.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사무실에서 버티다가, 대신 한 박자 빠른 타이밍에 가방을 덜그럭거리며 챙기는 것이다.
나야 뭐, 내일 출근이 확정되기도 했고, 어차피 밉보여서 퇴근도 어려워졌으니 휴게실에 내려와 있는 것이고. 벌써 두 잔째인 커피를 홀짝이고 있자니, 몰래 회사 살림을 축내는 것 같아 안 좋았던 기분도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 진짜 꿈 때문인가…….”
“뭔 꿈?”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나, 기대하는 눈치의 남 대리님에게 나는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지난 밤 무슨 꿈을 꿨는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면 대신 내 삶에서 뭔가를 가져가고 이루어준다던 남자, 하루만 포기하라더니 정말로 재수 옴 붙은 오늘 하루. 이렇게 남에게 하기 부끄러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남 대리님이라서 가능한 것이었다. 나보다 네 살 위인 형이지만, 때로는 친구 같고, 때로는 오히려 동생 같기도 한 사람.
“그래서, 네가 뭘 달라고 했는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휴게실의 문이 열렸고, 나와 남 대리님의 눈은 동시에 문을 향했다. 또각, 또각. 밖이 비쳐 보이고 방음도 안 되는 유리문인데 왜 그 소리를 이제야 들었을까, 왜 그 사람을 문이 열리고 나서야 발견했을까?
“설마…….”
남 대리님의 입이 열렸지만, 사실 그렇게 두 글자 이후로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렴, 바로 앞에 들어오는 사람을 본다면 누군들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올까. 검은 구두, 검은 바지, 그 위에 살구색 민소매 블라우스. 아직 추운 날씨인데도 드러난 쇄골 위로,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꽃샘추위 때 내렸던 눈이 아직 녹지 않았는지, 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 커다란 눈동자까지.
그 두 눈은 멀리서 꾸벅,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
남 대리님과 나는 머쓱하게 눈을 여기저기로 굴렸다. 꿈 얘기를 이어가기도 애매하고, 다른 이야기를 꺼내자니 달리 생각이 나지 않고. 그 사이 홍보팀의 진주리 주임은 커피를 뽑고 있었다. 한 손을 허리에 얹고, 종이컵에 쪼로록 커피가 흐르는 걸 바라보는 눈은 어쩐지 기계 같았다. 유독 차가워 보이는 눈매 때문인지도 몰랐다.
에헴, 굳은 공기를 깨우려 남 대리님이 헛기침을 했다. 그 덕에 나는 뚫어져라 진 주임님을 바라보던 눈을 겨우 거두고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때에 맞춰 진 주임님이 말을 걸어왔다.
“우 주임님, 내일 저희 팀 야유회 오신다면서요.”
그게 우리 회사에서 서로를 지칭하는 방식이었다. 우 주임, 진 주임.
“아, 네.”
“토요일인데 힘드시겠어요.”
또록, 마지막 방울이 떨어진 커피를 집어든 진 주임님의 몸이 이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또각, 또각. 사실 이후에도 기억나는 건 그 티 없이 맑은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잔뜩 꼈다는 것뿐이었다. 오히려 나 때문에 환한 얼굴에 그늘이 진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아니에요, 가야죠. 그런데 제가 사진을 잘 못 찍어서 걱정인데…….”
“괜찮아요, 찍어주시기만 해도 감사하죠.”
허허, 멋쩍은 웃음이 오고 갔다. 그 사이 남 대리님은 슬쩍 몸을 일으켜 냉장고로 향했다. 낄만한 대화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나름의 배려였던 것인지. 자리를 옮긴 그를 슬쩍 쳐다본 진 주임님은 곧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괜히 박 차장님께서 오버하셔가지고…….”
나는 갑작스레 가까워진 거리감에 하하,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혹시나 기울어진 민소매 옷의 틈새를 찾으려는 눈동자를 애써 진 주임님의 얼굴에 고정한 채로. 그 차가운 입 꼬리에도 아이 같은 키득거림이 깃들 수 있구나, 그 짙은 눈썹과 쌍꺼풀도 구름다리처럼 높게 휠 수 있구나. 제대로 대화를 해본 적 없는 상대의 새로운 표정을 발견하는 것은 놀랍도록 신선했다.
“대충 일정은 들으셨죠?”
“네, 10시에 남산 케이블카 타는 곳에서 본다고…….”
신선했던 순간은 찰나.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눈앞에서 커피를 홀짝이는 진 주임님에게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조용한 시간. 늘 처음 대화하는 상대와는 이런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서로 마땅히 할 말은 없는데, 그렇다고 보내기에는 예의가 없어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순간.
『하루만 포기하면 돼요.』
문득 꿈속에서 남자가 읊었던 대사가 머리를 울렸다. 잠깐, 그럼 그 하루가 오늘이야, 내일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을 해야 하는데. 용기를 내려다가도, 여전히 저 멀리서 냉장고와 씨름하는 척을 하고 있는 남 대리님이 들을 생각을 하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 때 진 주임님이 머리를 한쪽 어깨로 넘기며 눈을 창가로 다시 돌렸다. 금방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은 불안함에, 나는 아무 계획 없이 입을 떼고 말았다.
“어, 저…….”
커다란 눈이 다시 이쪽을 향했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세상이 도는 기분, 지구가 세차운동을 두 바퀴쯤 역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 꿈이 진짜라면, 오늘은 내가 포기한 하루가 분명하다. 그 말인즉슨, 무슨 말을 해도 대화가 이어지겠지!
“춥지 않으세요?”
“…….”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진 주임님 눈이 아니다, 내 눈이다. 이따위 하찮은 말이 설마 내 입에서 흘러나오리라고는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열어둔 냉장고 문 뒤에서 꿈틀대는 남 대리님도 들은 것이 분명했다. 진 주임님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잠시 눈을 내리깔아 자신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무실에 옷이 있어요. 실내라서 그냥 왔는데, 좀 추운 것 같기도 하네요.”
분명하다. 대답하기 전 몇 초간의 정적은 그녀가 실망했다는 뜻일 거다. 설마 모욕감을 느꼈으면 어쩌지? 지금 으슬으슬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팔을 어루만지는 건 정말 추워서일까, 내 말이 추워서일까, 앞으로 우리의 관계는 굳이 따뜻해질 필요가 없다는 무언의 대답일까?
“아 그렇죠, 아직 3월이라……. 퇴근은 언제하세요?”
“저는 곧 하려고요.”
커피를 한 번 홀짝인 그녀는 슬쩍 창문을 돌아봤다.
“이제 들어가서 마무리하고 퇴근해야죠. 우 주임님도 얼른 퇴근하세요! 내일 일찍 나오셔야하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휴게실을 나갔다. 그리고 또각, 또각. 진 주임님은 나가는 길에 남 대리님과의 인사도 빠뜨리지 않았다. 아무튼 참 완벽한 사람이다. 아름답고, 예의도 바르고, 친절하고, 그래서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야, 설마 소원이…….”
“아니야.”
진 주임님이 나간 후 덜컹거리던 휴게실 유리문이 멈추자마자 내게 후다닥 달려온 남 대리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대답과 상관없이 이미 이 인간은 백퍼센트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아니다.
“하루를 포기하는 대신 하룻밤을 사고 뭐 그런 거 아니지?”
“절대 아냐.”
“하긴, 진 주임이면……. 하루가 아니라 남은 인생의 절반 정도는 팔아야 하는 거 아냐?”
마시기 좋게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남 대리님은 기지개를 켰다. 굳이 대답이 필요한 질문이 아닌 것 같아, 나는 입을 닫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봄비인지, 아직 미련이 남은 겨울의 투정인지, 오랜만에 만난 비는 후련히도 내리고 있었다. 닫힌 창문 너머로도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쏴아아, 하고. 낚시터에 온 것처럼 편안한 침묵으로 둘이 함께 창문을 쳐다보길 몇 분. 그는 또 갑자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봐. 뭐였는데.”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다시 창밖으로 눈을 옮겼다. 어떻게 말해도 지질해 보일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몸을 뒤로 젖히며 대답했다. 쿨해 보이도록, 난 허접한 꿈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니, 그. 꿈이니까. 그냥 말이나 한 번 트게 해달라고 했지.”
그 작은 소원을 가지고 놀릴 줄 알았던 남 대리님은 웬일로 어어, 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채 몇 초가 지나기도 전에,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오른 듯 물어 왔다.
“방금 그럼 지나갔네?”
“그러네.”
“소원은 끝났네?”
“그렇지.”
“하루는 아직 안 지났고?”
“어.”
“와, 오늘 남은 하루는 여전히 조진 거 아니냐, 그럼?”
그러고 보니 진짜 하루 종일 재수가 없었지만, 긴 하루 중에는 결국 진 주임님과 말을 텄다. 꿈에서 얘기한 대로 된 것 같은데, 아직 오후 다섯 시임을 감안하면 남은 일곱 시간은 여전히 재수가 없으리라는 말이 된다. 세상에. 이거 쉽지 않구나. 한숨이 흘러 나왔다.
“저…….”
그 우울한 생각에 가득 차서, 나는 유리문이 빼꼼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또렷하면서도 고운 목소리가 새어 들어온 다음에야 나와 남 대리님은 화들짝 놀라 문을 바라봤다.
“진 주임님? 안 가셨어요?”
“아 저……. 우 주임님, 카메라 잘 모른다고 하셨죠.”
말은 남 대리님이 걸었지만, 그녀는 나를 불렀다. 원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람. 나는 황급히 자리를 고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몰라요. 아니 하나도 몰라요.
“혹시 내일 시간 되면……. 한 시간 정도 먼저 볼래요? 사진기 제가 가져갈 거라, 간단하게 찍는 법은 가르쳐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네! 네! 그럴게요.”
“네 그럼. 내일 아홉시에 명동에서 봐요.”
어디서 볼지는 연락하면서 정해요, 라고 말을 맺으며, 그녀는 씩 웃더니 다시 유리문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아까처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불과 몇 초 전 내뱉은 숨과 그렇게도 다를 수가 있을까. 그리고 이번에도 바로 옆에서 음흉한 눈을 흘기는 남 대리님을 미리 알아채지 못했다.
“이 새끼…….”
……좋아 죽는 거 봐라. 그리고 남 대리님은 몇 마디를 덧붙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 시간. 문득 꿈속의 남자가 생각났다. 그래, 이건 그런 거다. 통신사에 첫 가입하면 경품을 주는 것처럼, 말을 한 번 주고받는 것에 덤으로 한 시간을 얹어 준 거다. 언뜻 머리에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파국을 맞은 여러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떠올랐지만, 나는 설마 똑같은 꿈을 또 꾸겠냐는 확신으로 그 불안을 내리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