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포기를 삽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이 어땠냐면…….
최고였다.
“안녕하세요, 우 주임님. 얘기 많이 들었어요. 고생하고 있다면서요? 오호호호.”
이 인간이 끼어들기 전까지! 그래, 시간 되냐고 물어봤지 단 둘이 보자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난 뭘 기대한 거람.
“저희 팀 이진아 대리님이에요. 여기는 재무팀 우 주임님.”
출처를 정확히 유추하기 어려운 갈색 털이 가득한 코트, 그 코트로도 가려지지 않는 통통한 몸, 두꺼운 까만색 뿔테안경. 이진아 대리님의 첫인상은 그렇게 딱 두 가지였다. 첫인상이자, 여태까지 기억나는 유일한 특징.
그 날에 대해 요약하자면, 최고였으나 아무 일도 없었고, 짜릿했으나 남은 건 없었다. 다만 깨달은 것이 두 가지 정도 있었다. 첫째로 진 주임님은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것이고, 둘째로 그래서 경쟁자도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쟁자는 곧 수많은 방해꾼이 있음을 시사했다.
“우 주임님은 토요일인데 일이 없나 봐요?”
“오후에 결혼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니, 그럼 끝까지 있지도 않을 거면서 왔단 말이에요?”
그러더니 진 주임님을 한 번 흘겨보고, 다시 나를 쳐다보고. 누가 봐도 착각을, 엄밀히 말하면 착각이 아니지만 아무튼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해명을 하려는데 갑자기 안전핀을 뽑아둔 수류탄마냥 웃음을 빵 터뜨린 이진아 대리는 혼자 말을 이어나갔다.
“푸하하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아니, 우 주임님한테는 미안한 얘긴데, 사실 굳이 주말에 힘든데 나올 일은 아니거든요. 일 많은데 사진기까지 들고 다니기 힘들 것 같아서, 박차장님한테 아유 사람 좀 보내주세요, 하고 징징댔던 건데. 진짜로 보내주실 줄은 몰랐지, 나도.”
너였구나, 이 주말 출근의 배후가. 정 마담이 평경장을 죽인 배후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타짜의 고니가 이런 기분이었으리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그래도 그 덕분에 진주임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는 생각으로 애써 식히며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아, 예. 그러셨구나, 이런중얼중얼젠장중얼.
“사내 게시판에 올릴 사진이라, 오전에 단체사진 촬영하고 나서는 찍을 일이 거의 없을 거예요. 제가 팀장님한테 말씀드려볼게요.”
내 속을 읽은 것인지, 진 주임님은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말을 번갈아 내뱉으며 얼버무렸지만 이상하게 내 얼굴에는 아까와 달리 진심으로 미소가 드리워졌다.
“우 주임님은 사진 좋아하세요?”
“어……. 아뇨, 잘 몰라요. 근데 풍경 같은 건 좋아해요!”
이미 어……. 에서 내 대답을 읽었던 것인지, 진 주임님은 바로 사진기를 꺼내 뭔가 조립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풍경을 좋아해요’라니! 남 대리님이 옆에 있었다면 두고두고 따라하면서 놀렸겠지. 포기를 팔면 뭐든 이뤄준다는 꿈이든, 눈앞에 소원을 들어주는 원숭이 손이든 내게는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말을 트는 정도의 소원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이 분명했으니까! 말을 트면 뭐해, 하는 말이 고작 이 따윈데!
“저도 풍경 좋아해요. 저는 그래서 아예 사진기를 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 주임님의 반응은 열성적이었다. 그러더니 가르쳐준다는 사진기를 열고 자기가 지금까지 찍어 온 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여기는 경주, 여기는 하늘 공원. 여기는 회사 앞 흡연구역에서 바라본 하늘…….
“진 주임님 담배 피우세요?”
“아뇨, 무슨 소리에요. 하하하하.”
천사가 분명하다. 이런 헛소리에도 웃어주는 걸 보면. 아무튼, 뭔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든 말해주고 싶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저도 흡연구역에서 사진 가끔 찍어요’, 라고 말하려고 보니 ‘아, 그래요’ 밖에 이어질 말이 생각나지 않았고, 길 가다가 찍은 사진을 모아놓은 인스타 계정은 있었지만 보여줄 만한 수준은 아니었고. 내가 속으로 분주히 대화의 거리를 찾는 사이, 진 주임님의 사진 투어는 어느새 해외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 사진은 런던에서 찍었던 건데, 뒤에 배경은 흐릿하고 앞부분만 선명한 거 보이시죠? 이거는…….”
새로운 사진을 소개받을 때마다, 진 주임님의 말 속에 조금씩 생소한 용어들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 어려운 용어가 늘어갈수록 내 손은 점점 땀에 젖어갔다. 설마 지금 하는 말들이 오늘 하루 종일 활용해야 할 기술은 아니겠지. 한 마디 한 마디 기억하려 애쓰는 사이, 갑자기 진 주임님이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보여드리려니까 허리가 아프네요. 옆에 앉아도 되죠?”
덜컹, 내 심장이 뒤로 밀렸다. 아니, 의자가 뒤로 밀리고 심장이 깜짝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분홍빛 코트를 의자에 걸고, 아무런 무늬 없는 하얀 니트에 딱 붙는 청바지를 입은 진 주임님은 일어나서 성큼 내 옆자리로 와 앉았다. 그리고 그 행동 한 번으로 그 때까지 들었던 모든 사진 용어들은 그렇게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풍경을 좋아하시는구나. 그럼 구도나 이런 걸 몰라도, 대충 어떻게 찍으면 예쁜지 감은 있을 것 같은데?”
봄이다. 아직 거리에 까맣게 늘어 붙어 녹지 않는 눈들이 있지만, 지금은 봄이 분명했다. 눈앞에는 분홍색 선녀옷이 의자에 걸린 채 흔들리고, 옆에서는 시원한 물에 잠긴 자몽향이 머리카락에 실려 오고. 머릿속에서는 마음에 품어오던 여인과 함께 유럽의 풍경을 걷고 있으니, 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고.
“주임님은 평소에 찍은 사진 없어요?”
“아, 저……는 인스타에 조금 올리긴 했는데…….”
청소를 하지 않은 방을 공개하는 것처럼, 나는 부끄러운 손가락을 바삐 놀려 핸드폰에 인스타 계정을 띄웠다. 나는 황급히 손가락을 내려 지금까지 찍어서 보관했던 사진들을 진 주임님 앞에 펼쳐놓았다. 전문가가 볼 때는 구도든, 초점이든, 아니 뭐든 엉망인 사진임이 분명했다. [팔로잉 23, 팔로워 20.] 초라한 숫자는 좀 가려 놓을걸! 그리고 하필 그 떡밥은, 잠시 잊고 있었던 방해꾼이 기가 막히게 낚아챘다.
“아니, 우 주인……. 아니 뭐래, 우 주임님도 인스타해요? 어머, 우 주임님 성이 그러니까 부르기 되게 불편하다. 팔로워 숫자는 왜 이래요? 100명도 안 되네? 친구 연락처 연동만 해도 100명은 넘지 않아요? 게다가 팔로워보다 팔로잉이 더 많네. 우 주임님 진짜 우주인인가봐. 호호호호.”
겨울이다. 동풍이 건듯 불어 쌓인 눈 녹여내도, 아직 거리 곳곳 녹지 않고 까맣게 고여 있는 것들만 봐도. 또 나무에 돋은 새순이 펼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만 봐도 지금은 겨울이 분명했다. 당장 눈앞에 이진아 대리님이 얄미운 것보다도, 내 초라한 인스타 계정이 진 주임님 앞에 낱낱이 파헤쳐졌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늘 사진이 많네요? 풍경 좋아하신다더니 하늘을 제일 좋아하시나 봐요.”
진 주임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렇게 말을 이어나갔지만, 여전히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대충 대답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고 나서는 후회로 마음을 그득하게 채웠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답할 걸, 그랬으면 훨씬 멋져 보였을 텐데! 그냥 좋아하는 사진 저장하는 용도로 쓴다고, 비상 연락망 정도로 쓴다고, 몸 뒤로 젖히면서 ‘나는 좋아요 개수 따위에 목을 매는 사람이 아니다’의 분위기를 팍팍 내면서!
“근데 제일 최근 사진이 단풍이네요……. 작년 가을이에요?”
“아, 아뇨 며칠 전에 출근길에 찍은 거예요! 봄에도 단풍이 있더라고요.”
“오, 신기하다.”
다행이다, 그녀가 그 작은 핸드폰 화면에 집중하고 있어서. 당황하고, 콧잔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얼굴이 붉어져서 어떻게든 식히려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돼서.
“아니 근데, 주리야. 그렇게 아무한테나 옆에 가고 그럼 안 돼. 안과장님 샘난다? 오호호호.”
“아 언니, 진짜 그러지 마요. 자꾸 그렇게 몰아가는 거 짜증나요.”
쫑긋. 속으로 분함을 삭히는 중에도 귀는 열려있었다. 안 과장님?
“아유, 장난이지. 누가 진짜 만나래? 자꾸 그러면 안과장님만 몰아가는 게 아니라 더 늘어날 수도 있다, 그 말이지. 홍보팀 사람들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입은 더 빠르다, 얘.”
진 주임님 입에서 처음으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충 이진아 대리가 하려는 이야기는 짐작이 간다. 사실 진 주임님에 대한 이러저러한 소문은 회사 전반에 퍼져 있었다. 신입사원 연수를 1등으로 마치고, 배치를 받자마자 사내 웹진에 인터뷰와 사진이 올라오고. 평소에 활동은 하지도 않는 사내 동아리들 대표들이 홍보팀에 줄을 섰던 건 유명한 일화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사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소문들도 많이 흘러 다녔던 것이다. 그리 새로운 소문도 아니다. 남자의 시선을 즐긴다든지, 성격이 까탈스럽다든지, 소문만큼 예쁜 건 아니더라, 라든지.
“근데 뭐, 안과장님이 막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니고. 착하잖아?”
“착한 거랑은 다르죠, 언니. 착하다고 다 만나나.”
사진을 내려놓고 한숨을 한 번 더 내쉬는 진 주임님을 흘끗, 그리고 앞에서 얄미운 말만 내뱉으며 핸드폰만 똑딱거리는 이진아 대리님을 한 번 흘끗. 가만히 있으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몰라. 그래서 안과장이 누구냐고?
“과장님 평소에 말하는 태도도 좀 부담스럽고…….”
“착해서 그래, 나중에 결혼하면 착한 남자가 최고다?”
저 입, 입! 딱 십초만이라도 꿰맬 수 없나?
“언니이이. 그만. 하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정색하고 있으면서, 입으로만 웃는 진 주임님의 표정은 다소 섬뜩했다. 정작 그 모습을 봐야할 사람은 여전히 자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깔깔대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전 회사에서 연애할 생각이 없어요. 절대.”
아, 그랬구나. 그렇지, 당연한 일이지. 진 주임님처럼 인기가 많은 사람은 외려 주위 시선에 더 많은 피로를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랑은 뭐 평소에 만나서 이야기를 해본적도 별로 없으니까. 그런데 왜 내 기분이 꿀꿀하지……. 장마다, 장마가 머지않아서 그렇다. 100일 정도, 아니 150일 정도 밖에 남지 않은 장마 전선이, 겨울과 봄을 뛰어넘어 마음 한 구석부터 번져가고 있었다.
“우주인님. 아, 아니 우 주임님. 아하하.”
진 주임님은 얼굴에 정색을 풀고 다시 웃음을 활짝 터뜨렸다. 그렇게 장마전선, 호우경보는 순식간에 해제됐다.
“죄송해요, 진짜. 우 주임하니까 부르기 불편하네요. 그냥 수하 씨라고 불러도 돼요?”
“아, 네!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그럴게요. 수하 씨도 그냥 편하게 불러주세요.”
그리고 두 눈이 또 반달모양으로 깊게 휘었다. 나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네, 진 주임님이라고 대답했다.
한 시간이 그토록 빨리 흐른 적은 처음이었다. 진 주임님, 아니 본인의 요청으로 겨우 주리씨라고 부르게 된 이후로는 특히 더 그랬다.
“거 봐, 우리 나이도 비슷하잖아요.”
놀랍게도 주리 씨는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았다. 그러니까 한국 나이로 서른이다. 원 세상에, 불공평하기도 하지. 누구는 스물아홉에 자녀가 몇 살이냐는 이야기를 듣는데, 누구는 서른에 몇 학번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니. 그 말을 듣고, 나는 은근슬쩍 다시 진 주임님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인스타 저도 팔로우 할게요. 사진 되게 맘에 드는 거 많다.”
진 주임님은 목소리가 좋았다. 누구나 좋아할 것 같은 하얀 피부에 큰 눈, 긴 생머리에 어울리지 않는 낮은 톤이지만 어디 긁히는 소리 없이 곱게 흘러 나왔다. 새소리는 새소리인데, 위엄 있고 덩치 큰 새가 군가를 조곤조곤 노래하는 것 같은……. 아니, 썩 적절한 비유는 아닌 것 같다. 아무튼, 낮고 고우며 발음도 또렷했다. 하지만 곧 홍보팀 직원들이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진 주임님의 목소리도 더는 감상하지 못하게 됐다.
“오전 10시 13분, 홍보팀 전원 집합 완료했습니다.”
뿔테 안경에 등산복, 배낭을 메고 가슴팍에 배낭끈을 연결하는 끈까지 묶은 김 주임이 쓸데없는 보고를 올릴 때까지, 나는 홍보팀 한 사람 한 사람과 인사하기 바빴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인사하고, 악수를 주고받고. 분위기 자체는 내가 속한 재무팀보다 확실히 생기가 넘쳤다. 남녀 성비가 균형이 맞으니 분위기도 좋고, 판단도 적절하게 합리적이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천천히 걸어 내려오자고 하신 걸 보면. 우리 팀이었다면 무조건 걸어서 오르락내리락 했겠지.
“그리고 야무지게 돈가스 먹고 빠빠이 하자고!”
홍보팀장님의 성격은 시원시원했다. 소문에 의하면 홍보팀장에게 뚝배기가 박살난 직원이 여럿이라고 하니 주의해야겠지만, 앞으로 자주 마주치지는 않을 테니까. 잠시 숨 막히는 재무 회계 팀의 사무실과 박차장이 생각났다. 그래도,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보다야 함께하는 시간 내내 큰 기복 없이 조금 불편한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것이 마음은 더 편할지도 몰랐다.
“우 주임도 오늘 처음보지만 잘 부탁하고.”
그 뒤로는 별다른 지시사항은 없었다. 다른 직원들과도 인사를 마친 후로는 별다른 대화를 하지 못했다. 결혼식 사진사가 된 것 같았다. 사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섞이고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부담스런 내 입장에서는 다행이기도 했다. 팔각정에 올라 단체사진을 찍고, 흩어져서 쉬엄쉬엄 걸어 다니는 홍보팀 개인 사진을 찍기도 하고. 내가 사진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만 빼면 마음은 편했다.
아까 이상한 집합 완료 보고를 올렸던 뿔테 안경의 김지호 주임은 작년에 입사한 신입이었다. 그래서 이번 야유회 준비의 총괄을 맡은 듯한데, 본인의 성격과 이런 행사의 진행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케이블카에서부터 시간을 칼같이 재며 자음 퀴즈니, 보물찾기니 이런 저런 게임을 진행했지만 영 분위기가 살지 않아 이진아 대리의 핀잔을 들어야했다. 죽어가는 야유회의 분위기를 살린 건 역시나 진 주임님이었다.
“재무팀 우 주임님에 대해서 맞혀보는 걸로 해요!”
대신 날 제물로 삼았다, 그녀는.
입사 일자와 소속, 부서에서 몇 번째인지, 이름이 무슨 뜻인지, 형제는 몇 명이고 키는 몇 인지, 남중 남고를 나왔는지 공학을 나왔는지, 진 주임님은 즉석에서 하는 데도 능숙하게 게임을 진행했고, 분위기는 살아났고, 나는 민망함을 감추려 어영부영 대답하면서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다. 돌이켜보면, 고작 그 정도의 게임으로도 살아날 분위기였던 것이다. 수고 많았어, 김 주임.
그렇게 놀기를 불과 한 시간, 우리는 천천히 산책로를 따라 하산하기 시작했다. 넓은 길을 다 차지할 것처럼 다 같이 일렬로 가다가 결국 몇 명씩 흩어지고, 이 사람이 저 줄에 붙었다가 저 사람이 뒷줄로 사라지고. 재무팀의 등산 때보다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셔터를 마구 눌러댔다. 한 장 한 장 멋진 사진을 찍어낼 자신이 없으니 많이라도 찍어두는 것이다. 한 장 정도는 괜찮은 사진을 건지겠지. 나는 내려가던 발을 멈추고 잠시 사진기를 들여다봤다. 설마 진짜 한 장도 못 건지는 건 아니겠지?
“쁘아!”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내 발밑에서 바지를 당기는 당신은 누구시길래 대답을 이어주시는지요. 나는 카메라를 옆으로 살짝 치워 발밑을 살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했을 무렵일 아이가 카키색 바지에 파란색 후드티를 입고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혼자 후다닥 뛰어오다가 내 발 위로 넘어진 모양이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해야지!”
조금 뒤에서 할머니로 보이는 어르신은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며 연신 고개를 숙여보이셨다. 괜히 내가 잘못한 것 같아 나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 대답했다. 옆에 다가온 할머니는 바로 아이를 안아들기보다, 그 쪼그만 아이에게 인사를 권유했다. 얼른, 안녕하세요, 해야지! 하얀 피부, 터질 듯한 볼 살, 낯을 가리지 않는지 한껏 말아 올라간 입 꼬리. 내 정장 바지를 한 줌에 쥐고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제독님 마냥 당당하게 서있는 그 아이는 이미 나 말고도 주변의 많은 시선을 독점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묵직한 사진기를 들어 아이의 얼굴을 비췄다. 렌즈 너머 마주친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 아이는 마치 사진기를 잡고 걷기라도 할 것처럼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찰칵. 나는 잠시 렌즈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를 멍하니 쳐다봤다. 아이, 막상 가지려고 생각하면 막막하지만, 그래도 너를 보니 왜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지 조금은 알 것 같구나. 까르르, 낯선 이의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보고도 입을 활짝 벌리며 웃어주던 그 아이는 곧 할머니 손을 잡고 다시 아장아장 발을 옮겼다.
문득 시간을 너무 허비했나 싶은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홍보팀은 저만치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팀장을 비롯한 다른 남자 직원들과 어울려서 이야기를 나누는 진 주임님은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마침 그 때, 그녀도 누군가를 찾는 것인지 갑자기 뒤로 한 걸음 물러나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고 다시 주위를 열심히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이내 자신의 바로 위 나무를 손가락을 가리키면서 입모양으로 말했다. ‘봄단풍’ 이라고.
그래, 봄단풍이다. 언제 물들었는지도 모르는. 다들 휘날리는 꽃잎, 곳곳의 새싹, 따뜻한 바람으로 봄을 노래할 때 혼자 알게 모르게 물들어 있던 단풍이 있었다. 둘이 나눠 쓴 우산 아래 젖어든 어깨처럼, 언제인지도 모르게 마음 속 깊이 스며든 당신은 봄단풍을 닮았다고, 나는 혼자 속삭이며 다시 카메라를 들어올렸다.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