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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두번째 꿈

당신의 포기를 삽니다

by 봄단풍

다음 꿈은 주말 마지막 밤에 찾아왔다. 하얀 가운 입은 남자는 처음 만날 때처럼 똑같이 이름을 불렀고, 나는 낡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 마주 앉았다.


“진 주임님이랑 자려면 뭘 포기해야해요?”


꿈이니까, 평소였다면 꺼내지도 못했을 말이 쉽게 흘러나왔다. 누구라도 기분 나빴을 법한 질문인데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모니터를 몇 번 두드리더니 대답했다.


“그러면 진 주리 씨를 포기하시면 됩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에요. 뭐 내일이라도 해드릴 순 있는데, 대신 앞으로 다시는 그 분을 못 만날 거에요.”

“아……. 네. 저도 그냥 물어본 거였어요.”


남 대리님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형, 역시 형의 생각은 쓰레기 같은 생각이었어. 내일 아침 출근하면 꼭 말해줘야지. 하지만 원래 쓸데없는 용기에는 미련도 따르기 마련이다.


“혹시, 나중에 진 주임님이랑 친해진 다음에 제가 여기 와서 자고 싶다고 하면……. 그 때는 포기해야 할 것이 좀 바뀔 수도 있나요?”

“바뀔 수 있죠.”


흐음. 영화 속 주인공들이 생각을 할 때 왜 턱을 쓰다듬는지 몰랐는데, 꿈속에서는 나도 자연스럽게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이전보다 사무실이 너저분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 없던 달팽이 모양으로 타들어가는 초록색 모기향이 탁자위에 하나, 바닥에 하나씩 놓여있어서 그런가. 문득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여름이 다가오면 늘 신문지 위에 모기향을 피워 놓으셨었는데.


“음……. 그럼 진 주임님 마음을 좀 더 움직이려면 뭘 포기해야 해요?”

“말씀하신 사항은 다소 막연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세요.”

“어……. 그분하고 제일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앞으로 반년 동안 회사에서의 평판을 포기하시면 됩니다.”


오호라. 이유는 충분히 납득이 갔다. 이미 진 주임님의 회사 내 평판은 극과 극이다. 능력은 인정받을 만 하나, 뒷얘기가 많은 전형적인 연예인 스타일. 일종의 셀럽인데, 그런 분과 관계가 가까워지면 당연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테지. 하지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는 곧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사그라들지 않더라도 내가 신경만 쓰지 않는다면 큰 지장은 없을 테고. 그런데…….


“왜 반년이에요?”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괜찮아지는 거예요?”

“그것도 알려드릴 수 없어요.”


아니 그 이유를 말해줘야 포기를 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냐, 이 사람아. 그러나 꿈에서도 내 소심함은 어디가질 않아서, 나는 차오르는 질문을 가슴 한 구석에 꾹 밀어 넣은 채 다시 머릿속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시간은 금방이다. 야근, 오늘도 야근, 주말에 한숨 자고 사람들을 만나면 어느새 반년이 가있기 마련이었으니.


“그……. 평판을 포기하라는 게, 얼마나 포기하는 건데요?”


그러니까 얼마나 심한 욕을 먹는 건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고, 남자는 몸을 내 쪽으로 조금 기울이더니 역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지저분하게 자란 남자의 수염을 한 가닥씩 뽑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뭐 얼마나 하겠어, 그냥 진 주임님 예쁘다는 소문 듣고 추근거리는 구나, 정도겠지. 그건 전혀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업무에도 충실하고, 주위 사람들을 평소보다 잘 챙기면 분명 개선의 여지가 있으리라. 포기하라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아예 전부 다 포기하는 거예요?”


하지만 결국 질척거리는 질문을 던진 나를 무시한 남자는, 눈을 모니터로 돌리며 키보드를 다시 두드렸다.


“평판이 너무 큰 것 같으면, 조금 더 작은 걸로 해보시죠. 밥을 한 끼 같이 먹어보는 건 어때요?”

“밥이요?”

“네. 단 둘이 식사. 지금 그 정도면, 음……. 박차장님의 칭찬 한 번만 포기하시면 됩니다.”


그게 뭐야?


꿈속인데도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물론 코에서. 애초에 박 차장님은 누군가를 잘 칭찬하는 사람도 아닐뿐더러, 그 사람의 칭찬이 무슨 의미가 있어? 아까 평판을 포기하라더니, 요구하는 소원이 작으면 포기하는 것도 이렇게 소소하게 가는 건가 싶기도 했다. 나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에서 깼다. 그리고 출근하자마자 방금 꾼 꿈 내용도 인터넷에 올렸다.


[근무시간에는 졸지 마라. 코고는 소리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기왕 쓸 거면 좀 이어서 써봐. 요새 안 그래도 사무실에서 몰래 할 것도 다 떨어졌는데.]

[다른 건 몰라도, 머리카락은 절대 포기하지마라. 진심이다.]

→[22222]

→[333333... 혹시 그러면 그 사람 머리를 다 뽑아버려.]


반응은 어제보다는 시큰둥했다. 어쩔 수 없지. 사실 나도 아직 그 꿈에 확신을 갖고 있진 않았다. 개꿈, 가끔 이어서 꾸는 개꿈이지만 묘하게 기억도 잘 나는 꿈일 뿐, 한 번 진 주임님과 대화를 나누게 된 정도로 믿을 수는 없지. 나는 내 이야기를 비웃는 댓글들을 따라 실소를 흘렸다.


『수하씨 안녕하세요!^_^』


그 때, 회사 메신저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보낸 사람의 이름을 잘못 본 것이 아닌지, 몇 번이고 확인한 뒤에야 나는 서둘러 손가락을 키보드 위로 가져갔다.


『진 주임님 안녕하세요!』

『주말에는 고생 많으셨어요 ㅎㅎ 혹시 점심 먹고 오후에 시간 잠깐 괜찮으세요?』

『네! 아 근데 혹시 용무가..?』


꿈속의 자신감 가득했던 나를 한 대만 때려주고 싶었다. 용무가 뭐야, 용무가. 도대체, 컴퓨터로도 말은 왜 이렇게 밖에 안 나오는 거야?


『사진 찍어주셨잖아요. 감사의 커피라도 사드리려고요 ㅎㅎ 사진도 받고.』


커피라는 말에 설렜다가, 사진이라는 말에 가슴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생각해보니 지난 주말, 진 주임님의 사진기를 챙긴 채로 친구의 결혼식에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기는 지금 내 방 침대 위에 고스란히 놓여있었다. 나는 황급히 모니터에 눈물 가득한 이모티콘을 섞어가며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앗, 진 주임님!』

→『제가』

→『카메라를』

→『깜빡하고 방 침대에 두고 온 것 같아요ㅜㅜ』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바로 필요하실 줄 모르고ㅜㅜ』


다행인지 불행인지, 답변은 금방 왔다.


『엇 오늘 팀장님이 사진을 보자고 하셔서 꼭 필요한데..ㅜ』


난 죽일 놈이다. 평소였다면 죄송하다, 내일 가져오면 늦을까, 등으로 어떻게든 미뤄봤을 테지만, 하필 평판을 포기하라는 꿈을 듣고 난 뒤라 괜히 뒷덜미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필 찍었던 사진에 자신도 없었던 터라 마음이 더욱 편치 않았다.


『제가 그럼 점심 먹고 차장님께 말씀드려서 얼른 집에 다녀올게요! 죄송합니다 ㅜㅜ』

『아니에요! 걱정 안하셔도 돼요 ㅎㅎ제가 팀장님께 잘 말씀드릴게요. 대신 내일 꼭 가져와주세요!』

『네 그럴 게요ㅜㅜ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괜찮아요ㅎㅎ 내일 봐요!』

『네 내일 뵙겠습니다!』


그 다음 몇 분간 답장이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쪽같은 성격으로 직원들의 뚝배기를 여럿 부쉈다는 홍보팀장님이 무서운 것도 있지만, 회사 사람들로부터 받게 될 시선이 더 두려웠고, 그녀에게 덜렁대는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딱 두 배 정도 더 두려웠다. 물론 그마저도 ‘괜찮아요’ 한 마디에 순식간에 녹아버렸지만. 정말 천사인지도 모른다, 진 주임님은.


그 때, 꺼진 줄 알았던 메신저가 깜빡거렸다.


『수하씨 아니면 내일 점심을 같이 먹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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