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포기를 삽니다
다음날 나는 진 주임님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 다른 부서 사람들로 꽉 찬 엘리베이터에서 우리는 무엇을 먹을지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 좁은 엘리베이터에서도, 내게 꽂히는 몇 몇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평생 사람들 시선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살아온 내 입장에서는 괜히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전전날 밤 꿈에서 말했던 ‘평판’이라는 단어가 생각나 괜히 뒷목이 따갑기도 했다.
“머리 묶으셨네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회사 건물 밖으로 나온 뒤, 아직 쌀쌀한 삼월 말의 바깥 공기를 맞으며 나는 겨우 질문을 하나 던졌다. 늘 어깨 위로 긴 머리를 늘어뜨렸던 진 주임님은 가지런히 묶은 머리를 좌우로 한 번 흔들며 씩 웃어보였다.
“일할 때는 이게 편해서요. 수하씨는 안 묶어요?”
“네? 저요?”
“아하하, 농담이에요.”
그러고 보니 매일 출근할 때마다 왁스로 올렸던 머리가 어느덧 귀를 조금 덮을 정도로 자라있었다. 박 차장님에게 지적받지 않으려면 오는 주말에는 머리를 잘라야겠다. 대충 대답하고 어떻게든 다음 이을 대화 거리를 찾던 내게, 문득 진 주임님의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의 손목시계가 아닌, 핸드폰과 연동하는 얇은 기계식 시계.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얇은 액정에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새겨진 숫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진 주임님 시계, 혹시…….”
“아, 이거요. 얼마 전에 질렀어요.”
진 주임님은 생긋 웃으며 액정을 내게 보여줬다. 걸을 때는 잘 보이지 않았던 숫자가 또렷하게 눈앞에 들어왔다. ‘120’. 12시 정각인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나…….
“한 번 써보고 싶었거든요. 얇아서 부담스럽지도 않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 주임님의 보폭에 맞춰 발을 옮겼다.
“그런데 수하씨는 언제 주리씨라고 불러줄 거에요?”
“네?”
몇 분 뒤, 쌀국수의 첫 국물을 떠먹으며 그녀는 그렇게 물어왔다.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뻔하지 뭐. 세상에서 제일 바보같은 얼굴이었겠지.
“그 날 서로 직함 떼고 부르기로 했잖아요. 우 주임님 발음이 어려워서.”
“아……. 네. 그래야죠.”
하핫, 하고 진 주임님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반달같은 눈웃음도 여전했고, 구름 없는 밤 하늘에 뜬 달처럼 하얀 피부도 그대로였다.
“밥은 제가 살게요! 촬영 해주셨으니까.”
“아유, 아니에요. 차장님이 시켜서 한 건데요 뭐.”
“어 뭐야, 도와주려고 한 거 아니었어요? 그냥 시켜서 한 거였어요?”
“아, 아니 저 그게 아니라…….”
그리고 또 이어지는 웃음. 장난이라고 덧붙이며 시원하게 국수를 흡입하는 당신은,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걸 보니 사탄인지 천사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가는구나. 아무래도 나를 놀리는 데에 재미를 붙인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워낙 말을 못해서 그녀 나름의 진행 능력을 발휘하는 것인지. 진 주임님과의 대화는 편하게 이어졌다.
“밥 안 사셔도 괜찮은데…….”
“팀장님이 법인카드 쓰라고 한 거여서 괜찮아요.”
“그래요? 앗, 그럼 진작 말씀해주시지.”
“왜요, 비싼 거 고르시려고? 하하하…….”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칭찬이 이해가 됐다. 식탁 세팅이나 물 같은 소소한 매너부터, 주문 직후나 식사 세팅처럼 대화의 단절이 생기는 잠깐의 틈 이후에 대화의 줄타기를 이어나가는 것만 봐도 그랬다. 진 주임님의 행동은 하나부터 열까지 자연스러웠고, 마음도 편해졌다.
“……아니 근데 제가 입사한 지 이제 사년 차인데, 솔직히 너무한 거 있죠. 자기들이 내 자리에 있을 때는 진짜 지금 제가 하는 일에 반도 안했으면서, …….”
그런 그녀도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는 심한 것 같았다. 어쩌면 진 주임님이라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뭐를 맡겨도 잘하는 사람에게는 뭐든 더 맡기게 되어있으니.
“……그래서 야유회도 사실 진짜 너무 하기 싫었어요.”
“아휴, 그랬겠네요.”
“아니 그 야유회 얘기가 나온 날도, 차장님이 저한테 일을 미룬 건이 있었거든요? 그러면 양심상 일을 더 만들면 안 되잖아요. 자기 일도 처리해주는 사람한테! 근데 거기서 또 무슨 야유회를 하자, 진주임이 해봤으니까 한 번 기획해봐라 하다가, 내가 너무 일이 많아지니까 억지로 신입인 김 주임한테 맡긴 거예요.”
“어휴…….”
“아니 근데 뭐 하루 행사 짜는 게, 해본 사람이랑 안 해본 사람이랑 다르잖아요. 팀장님은 당연히 저보고 하라고 했는데, 그러다가 제가 야근 하는 거 보니까 대충 견적이 나왔던 거죠. 아니, 물론 야유회가 어려운 것보다 다른 일도 한참 미뤄놓고 야유회까지 시키니까 그 사단이 난 거지만. 아무튼, 나 혼자 다 하다간 내가 사표 쓸 수도 있겠다, 싶어서, 진 주임은 그럼 사진만 찍자고 하더라고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다행은요, 어차피 결국엔 제가 다시 다 짰는데.”
앞으로 꿈속의 그 남자가 진 주임님과 대화를 나누는 데에 일 년을 포기하라고 해도 무조건 포기해야겠다. ‘아휴’, ‘어휴’, ‘다행이네요’……. 도대체 대화는 잘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다음 꿈에서 그 남자가 ‘유연한 대화 능력’이나 ‘미쳐버린 말재간’ 같은 걸 패키지 상품으로 판다고 해도 나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리라.
“그쵸, 근데 사실 그 사진기도 진짜……. 들고 다녀봐서 아시잖아요. 엄청 무겁고, 찍는 것도 솔직히 하루 종일 들고 다니려면 진짜 힘든 건데.”
그릇 째로 들고 쌀국수 국물을 호로록, 한 모금 마신 진 주임님은 그릇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그녀는 아까보다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진아 언니 덕분이에요. 안 그래도 일이 많았는데, 언니가 어떻게든 대신할 사람 알아봐주겠다고 해서……. 아, 결과적으로 수하씨가 고생하게 됐지만요.”
굳이 볼 필요 없는 내 눈치를 보며, 진 주임님은 그렇게 덧붙였다.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야유회 때도 진 주임님이 진행할 때는 참 열심이었던 이진아 대리였다. 비록 김 주임에게는 매몰찼지만 말이다. 물론 첫 만남은 나도 몹시 짜증났었지만, 만약에 진 주임님을 챙겨주는 맥락이었다면 좋은 사람 같기도 하고.
“다 드셨으면……. 카페 갈까요?”
“네, 커피는 제가 살게요.”
“좋아요! 얼른 수하씨가 찍은 사진 보고 싶다.”
그렇게 말하고 진 주임님은 한 번 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에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내 앞에서 웃고 있다니.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도 어쩜 이렇게 주옥같고 아름다운지, 그 낮은 목소리조차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꿈이고, 구질구질하게 뭔가를 포기하는 대신 뭘 가지겠다고 구걸하는 그 시간이 현실인 건 아닐까.
삼월 말의 바깥 공기는 서늘했다. 절벽에 매달린 액션 영화 주인공처럼, 미련이 한참 남은 겨울이 아직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듯 징그럽게 길어지는 추위였다. 방심한 사람들의 틈을 파고드는 바람은 어찌나 날카로운지, 행인들의 대부분은 팔짱을 끼거나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사진 봐봐요.”
주리씨는 아까 무겁다고 그렇게 불평하던 사진기를 능숙하게 낚아채더니, 걸으면서 찍힌 사진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밖으로 꺼낸 손이 시릴 만도 한데, 그녀는 전혀 추운 기색이 없었다. 가만히 보면 스스로 튀려고 하지 않는데도 빛나는 사람이다, 진 주임님은.
“죄송합니다, 건질 사진이 몇 장 없죠…….”
“에이, 무슨 소리에요. 잘 찍으셨는데요?”
회사 로비의 1층 카페로 들어올 때까지 연신 삑삑거리며 사진을 확인하던 그녀는 이내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자리에 앉았다. 사람이 많을 시간인데 용케 자리가 난 것을 보면 우리가 쌀국수를 꽤 빨리 먹어치운 것 같았다.
“확실히 수하씨가 감각이 좋은 것 같아요. 사진 배운 적 없다면서요?”
“네, 한 번도 안 배웠어요.”
“와, 서운하네. 저한테 배웠잖아요?”
“아 맞다…….”
“농담이에요, 농담. 하하.”
그렇게 웃더니 오오,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몇 번 끄덕끄덕. 진 주임님은 한 손으로 사진기를, 한 손으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나를 잠시 쳐다봤다. 커피가 나오는 동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내가 찍은 사진들을 하나씩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 어제 엄청 봤어요.”
“네? 뭘요?”
“수하씨 인스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초라한 팔로워와 팔로잉 숫자가 바로 떠올랐고, 우주인이냐며 놀리던 이진아대리가 연이어 생각났다. 나는 별다른 대답도 하지 못한 채 하하, 멋쩍은 웃음만 흘렸다.
“출퇴근길에 사진 많이 찍으시나 봐요?”
“아, 네, 저……. 그 딱히 낙이 없어서요.”
아, 제발. 이럴 줄 알았으면 화법 강의라도 들어둘 걸 그랬다. 길거리 아티스트라며, 시덥잖은 농담 따먹기가 적힌 책을 수십 만 원에 팔고 강의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기사만 봐도 코웃음치고 넘기던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강의조차 절실했다. 낙이 없다니! 이토록 없어 보이는 대답이 또 있을까!
“다 예쁘던데요, 왜. 다음에 저도 한 번 데려가 주세요. 핸드폰 말고 사진기 가지고 갈게요.”
가슴이 확 뜨거워졌다. 카페의 소음이 순식간에 작아지고, 나라는 존재도 이 커다란 우주 속에 떠돌아다니는 먼지가 된 것 마냥 작게 느껴졌다. 귀가 뜨거워지는 걸 느끼면서, 나는 간신히 네, 하고 대답했다. 정작 진 주임님은 계속 카메라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거, 팀장님 얼굴은 일부러 오른쪽에 놓고 찍으신 거예요?”
“사람들을 아래쪽에 놓고 찍은 건 뒤에 풍경 나오게 하려고 그런 거죠?”
진 주임님은 간혹 내가 어떻게 찍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사진을 보여주며 의도를 물어오긴 했지만, 내가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그렇게 찍으면 좀 예쁠 것 같아서, 그게 내가 했던 대답의 전부였다. 그러면 진 주임님은 나의 감각을 칭찬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곤 했다. 그녀와의 대화는 대본을 미리 준비한 토크쇼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아 근데, 진 주임님……. 어제는 괜찮았어요?”
“네?”
“팀장님이 어제 사진 필요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 그거…….”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다시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수하 씨가 사진 좀 보고 하루 정도 검토하고 보정해서 보내준다고 했어요.”
“아, 근데 저 보정 할 줄 모르는데…….”
“괜찮아요. 팀장님 보여드리기 전에 제가 할 거니까.”
미간을 찡긋하며 웃은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사진에 집중했다. 어쩜 사람이……. 이렇게 완벽할까. 갑자기 이 사람과 단 둘이 카페에서 마주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이 사진은……. 수하 씨 거기서 잘 보여요?”
“아, 제가 그 쪽으로 갈까요?”
“진주리 여기 있었네?”
깜짝이야!
진 주임님과 나란히 앉기 위해 엉덩이를 들어 올리던 찰나, 바로 뒤에서 누군가의 손이 나타나 내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나는 의자에 억지로 파묻혀진 채 고개를 뒤로 돌렸다. 진 주임님과 비슷한 정도의 키에 통통한 체구, 회색 코트에 오대오 가르마로 기른 머리. 마에스트로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올 법한 외모의 사내는, 내가 회사에서 몇 번인가 마주쳤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