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포기를 삽니다
“안 과장님. 식사 뭐 하셨어요?”
진 주임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건넸다.
“그냥, 뭐. 팀장님 모시고 제육 먹었지.”
안 과장은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에 올렸던 손을 거두더니, 흘끗 나를 쳐다보고는 나와 진 주임님 사이의 탁자 옆에 섰다.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썩 탐탁치 않았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지만, 그는 나를 무시하고 진 주임님만 쳐다봤다. 그래, 이 인간이 그 안 과장이구나.
“아까 약속 있다더니, 무슨 일이야?”
“아, 여긴 재무팀 우수하 주임이에요. 야유회 때 사진 찍어주셔서 검토하고 있었어요. 팀장님이 오늘까지 받아달라고 하셔서.”
진 주임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아까처럼 가볍게 얼굴에 미소를 걸쳤다. 안 과장도 똑같이 미소를 지어보이며, 한참동안 그녀를 마주보기만 했다. 그는 진 주임님의 소개에도 불구하고 내 얼굴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슬슬 들어가야지. 오늘 오후에 회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직 시간이 좀 있어서. 그리고 회의자료 오전에 차장님께 컨펌 받아 놨어요.”
안과장님의 표정이 아주 조금 어두워진 것 같았다. 잠깐, 아까 나를 흘겨봤을 때만큼이나 잠깐이었지만 미간이 찌푸려진 것 같았는데. 하지만 그는 금세 굳은 얼굴을 풀었다.
“그래도, 원래 회의 전에는 좀 일찍 들어가는 게 좋지. 그리고 팀장님이 너 식사 후에 좀 보고 싶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아, 그거 김 주임이에요. 적응 잘하고 있냐고 면담하고 싶어하시던데.”
또 다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답한 것은 어느새 안과장의 뒤로 다가온 이진아 대리님이었다. 눈치 없는 그 대답이 얼마나 감사했던지,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 보니 카페 계산대 앞에는 주말에 만났던 홍보팀 직원 몇 명이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진 주임님을 제외한 홍보팀 전원이 함께 식사를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또 잠깐, 이진아 대리를 흘낏 보는 안 과장의 표정이 이번에는 눈에 띄게 썩어 들어갔다. 인사를 해야 하나, 슬쩍 일어나야 하나……. 안절부절 못하던 그 상황을 정리한 것은 역시 진 주임님이었다.
“그럼 같이 들어가시죠. 사진도 미리 보여드리면 좋으니까.”
대답을 들은 안 과장의 얼굴에는 슬그머니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는 진 주임님이 커피를 일회용 잔에 바꿔서 담아오는 동안에도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꼭 혼자 숙제를 다 해온 초등학생의 뿌듯한 표정처럼 느껴졌다. 언뜻 회식 때 본 것도 같지만, 그래도 제대로 만나서 인사하는 건 처음인데…….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 통통한 볼을 몇 대 때려주고 싶었다. 시원하게 때리는 게 아니라, 최대한 기분 나쁘도록 톡톡.
그렇게 몇 분 뒤, 나는 홍보팀 직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게 됐다.
“수하 씨, 미안해요. 사진 다 보지도 못했는데. 야유회 와준 것도 사진 찍어주신 것도 고마워요. 수당은 차장님께 말씀드려놨으니까 다음 달 분에 들어갈 거예요.”
홍보팀 직원들과 나만 타있는 엘리베이터에서 진 주임님은 그렇게 인사했다. 다행히 다들 두런두런 얘기하는 분위기였던 터라 그 대화가 튀어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인사에 답했다.
“쌀국수 말고 더 맛있는 걸 먹을 걸.”
진 주임님은 그렇게 속삭이며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하필 그 때 엘리베이터 한 가운데 서 있던 안 과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분명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왠지 아까의 기분 나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그 얼굴을 애써 무시한 채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다음에 더 맛있는 걸 먹으러 가요.”
“좋죠!”
그리고 또 그녀는 웃었다. 도저히 저 미소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바보처럼 마주 웃어 보이며 주머니 속에 손을 꼼지락 거릴 뿐이었다. 다행히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홍보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하 씨, 사진 제대로 배워보셔도 좋을 것 같은데. 감각이 좋으셔요.”
“감사합니다. 진 주임님이 많이 가르쳐주신 덕이죠, 뭐.”
안과장님이 내리고, 이진아 대리님이 내리고. 마지막 남은 진 주임님은 내리다가 잠시 발을 멈추고 돌아봤다. 눈을 가늘게 뜬 그녀는 문이 닫히기 직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리 씨라고 부르기로 했잖아요.”
그리고 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엘리베이터는 따뜻했다. 다음 문이 열리고 내가 내릴 순서가 될 때까지, 나는 귓가에 메아리치는 진 주임님의 말을 한음절씩 곱씹었다. 주,리,씨,라,고……. 이미 그 때쯤에는, 중년 남성의 느끼한 미소와 째려보는 눈빛 정도는 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야, 너 점심에 무슨 약속이었냐?”
“진 주임님이랑. 왜?”
몇 분 뒤,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다가 만난 남 대리님은 내 대답을 듣고는 그러냐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오늘 원래 부서 점심이었잖아. 박차장이 갑자기 너 찾더라고.”
“날? 왜?”
칫솔로 혀를 닦다가 콜록콜록, 전부 게워낼 듯한 격한 기침을 하던 남 대리님은 힘겹게 대답했다.
“부서 점심인데 빠진다고, 사회성 없다고 졸라 깠지 뭐.”
“하…….”
이상했다. 주마다 정례화된 부서 점심이라지만, 박 차장님 마음대로 자기 아래 직급만 모으는 거라 누가 빠지든 말든 신경 안 썼었는데. 물론 부장님을 제외하면 부서 총원이긴 하지만. 아무튼, 왜 갑자기 나를 언급하는 것도 모자라 험담까지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문득 박차장의 칭찬을 포기하라는 꿈속의 남자가 떠올랐다.
‘아니, 칭찬을 포기하라며.’
이럴 거였으면 애초에 욕을 먹는 거라고 얘기를 해주든가!
칵 퉤, 거품을 대충 뱉어내고 얼굴을 닦았다. 갑자기 평판을 포기하라던 말도 떠올라서,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신경 쓰지 마라. 뭐 그 인간 꼰대인 거 모르는 사람 있었냐.”
그는 내 등을 한 번 툭 쳐주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후, 한 박자 늦게 흘러나온 한숨에 복잡한 머릿속도 다 흘러갔으면.
[혹시 이거 그린라이트 인가요?]
흘러갔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서, 자리로 돌아온 나는 인터넷에 글을 한 편 더 실었다. 철 지난 유행어는 덤. 지난 번 이상한 꿈을 꿨다는 썰을 푼 뒤로는 세번째였다. 진 주임님과 함께했던 식사, 나눴던 대화, 마지막 인사까지, 있었던 일을 그냥 주욱 풀어쓰기만 했는데도 왠지 마음이 풀어지는 기분.
[백프로네.]
→[손을 잡았어야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 다 들리게 ‘주리씨, 안녕히 가세요’라고 했었어야지.]
→[222222]
→[333 아 이거다. 이렇게 했으면 대박인데.]
[그런데 이 정도면 진짜로 그 꿈 맞는 거 아냐?]
[혹시 꿈 팔 생각은 없어?]
놀랍게도 반응은 전보다 뜨거웠다. 역시 개꿈 얘기보다야 이성에 대한 고민 상담이 남자들에게든 여자들에게든 잘 먹히는 것 같다. 아니 근데, 달달한 연애 웹툰이나 소설만 보면 SF명작 잘 봤다며 비꼬는 인간들이 왜 이런 글에는 좋다고 훈수를 두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