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포기를 삽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뭘 원하시나요?”
며칠 뒤 또 다시 같은 꿈을 꾸게 됐다. 모기향이 피워진, 몹시 어질러진 사무실. 수염과 머리를 대충 기른 남자는 가운을 입고 귀찮은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고, 나는 또 다시 신기한 듯 방을 둘러보고 있고.
“그래도 이제 두 번 정도 해보셨으니, 효과가 있다는 건 아셨을 텐데.”
“네, 그리고 포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게 됐고요.”
꿈속에서의 나는 감정 표현이 능숙했다. 남자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빈정대자, 그는 처음으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나를 쳐다봤다.
“아뇨, 수하 씨는 아직 포기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그렇게 화가 난 걸 보면요.”
“아, 그래요?”
대충 대답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만남에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던 남자는 어느새 혈색도 돌아와 있었고,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미소를 지을 정도로 여유도 생긴 모양이었다. 나는 방을 둘러보는 척 그에게 등을 돌리고 섰다.
“수하씨, 연애를 해본 적 있으신가요?”
“뭐 한 두 번……. 그건 조회가 안 되나 보죠?”
“그러면 이해하실 텐데요. 연애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많은 포기를 강요하지 않던가요? 평일에 비어있던 시간, 친구와 편안한 게임 한 판, 혹은 맥주 한 잔. 감정 없이 친한 이성과 주고 받을 몇 번의 문자, 며칠 동안의 커피 값을 아껴서 살 수 있던 애장품. 수하 씨의 인생 중, 불과 몇 달 만에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연애 말고 또 있었나요?”
나는 여전히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귀에는 그 남자의 목소리가 잘 꽂혔다.
“생각해보세요. 박 차장의 칭찬이 평소에 그리도 갈급하셨나요? 아니면, 박 차장의 험담이나 훈계가 평소에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일이었나요? 편안한 저녁을 위한 칼 퇴근 한 번 마다 겪던 소소한 일상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얘기하니까 할 말이 없네. 자존심이 상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남자를 쳐다보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는 치우지 않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포기를 하고 있어요. 수하씨도 늘 그래왔고. 다만 당연해서 포기라고 생각을 안 하거나, 하도 자주 포기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왔던 거죠. 자, 보세요. 다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풀릴 뿐입니다. 저희는 단지, 수하 씨가 할 선택에 따라 포기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드릴 뿐이에요.”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 속에서 생각을 하는 나를 생각하자니……. 이게 무슨 말이야. 이러니까 중요한 순간에 바보 같은 선택을 하는 거다. 나는 남자에게 휘둘리지 말자,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며 그의 얼굴을 마주봤다.
“혹시 불안하면, 더 작은 것으로 한 번 더 해보시겠어요?”
수작이다. 그래, 영업 사원의 소소한 책략일 뿐이다. 무료로 한 달만 체험 해보세요, 한 번 사용만 해보세요. 아무리 꿈속이라고 해도, 정신이 멀쩡히 박혀있는 내가 여기에 혹할 리는 없었다. 적금도 백 만원씩 붓는 내가 고작 이런 멘트에 넘어갈리 있겠는가.
‘……다음엔 저도 데려가주세요.’
왜 하필 그런데 그 때, 진주임님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거냐고.
“진 주임님하고 산책을 하고 싶어요.”
“가능하죠.”
“그럼 뭘 포기해야 하는데요?”
남자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한참을 모니터를 쳐다보던 그는 곧 다시 나를 보며 대답했다.
“가족과의 식사 한 번을 포기하시면 됩니다.”
응? 생각보다 쉬운데? 아니, 아니지. 잠시만.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차피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입장에서 한 번의 식사를 포기하라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앞서 포기했던 하루(덕분에 최악으로 보냈던), 혹은 박 차장의 칭찬(덕분에 멀리 퍼진 내 험담을 포함해서)과 비교하면,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 꿈속의 나는 결국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고, 어딘가 찝찝하지만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