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밤산책

당신의 포기를 삽니다

by 봄단풍


“주리 씨?”

“어?”


갑자기 나타난 진 주임님은 의아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네?”

“진 주임님이라고 안하고 주리 씨라고 불렀잖아요.”


잠시 고민했다. 왜 그랬지? 왜 여태 진 주임님이라고 불렀지? 아니 왜 지금 갑자기 주리 씨라고 부른 거야? 아니, 어느 쪽이 이상한 거지?


“아니, 그게…….”

“뭘 그렇게 당황해요.”


주리 씨는 웃으면서 내 옆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2차를 가자는 부장님을 모시듯 잠시 엉거주춤하다가, 그녀를 따라 천천히 발을 옮겼다. 우리는 그렇게 어두운 대학병원을 느릿한 발걸음으로 나왔다. 이미 달이 하늘 한 가운데에 꽂힌 밤의 도시는 아직도 밝았다. 짙은 남색의 하늘, 주황빛 열매가 달린 거무튀튀한 나무줄기들의 숲. 반딧불마냥 그 사이를 질서 정연하게 돌아다니는 붉고 또 빨간 불빛들, 그리고 그 속에 지쳐있는 그림자들.


“수하 씨는 집에 어떻게 가요?”

“아, 저는 좀 걷다가……. 버스, 버스 타고 가요.”

“그렇구나.”


막 시작한 대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대학병원 담벼락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나는 겨우겨우 이어갈 말을 찾았다.


“주리 씨는 어떻게 가세요?”

“저도 버스 타고 가요.”

“아……. 평소에도 버스 타고 다니세요?”

“네. 출근은 지하철, 퇴근은 버스. 아침에는 차가 막혀서 지하철을 타는데, 저녁에는 보통 야근하니까. 그 때쯤 되면 차도 슝슝 달리거든요.”


아하.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입을 열지 못했다. 대화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이어질 때보다는, 생각보다 어려울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생각이 없으면 술술 나오다가도, 생각을 하다보면 한 글자 한 글자 내뱉기가 글쓰기보다도 어렵다.


“그…….”


겨우 새어나온, 단말마와도 같은 그 신음소리에 주리 씨는 나를 쳐다봤다. 오늘은 그녀도 생각할 거리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피곤한 것인지 말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았다. 평소였다면 공백이 생길 틈이 없이 대화가 이어졌을 텐데 말이지. 그런 생각에 다다르자, 더더욱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졌다.


“피곤하시죠? 오늘.”

“네, 오늘은 좀 그러네요.”


그리고 또 대화가 끊어졌다. 대학병원 담벼락을 따라 걷는 길에는 사람도 없었다. 보도블록을 두드리는 주리 씨의 구두소리, 같은 바닥을 쓸듯이 지나가는 내 구두소리. 간간이 이어지는 경적소리만이 그나마 우리 사이의 여백을 겨우 채워줄 뿐이었다. 제발, 제발 우수하 뭐라고 말 좀 해봐…….


“팀장님은 사진 맘에 드신대요?”

“네, 뭐…….”


주리 씨의 대답은 또 짧았다. 그런데 계속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어째 마음에 걸렸다. 자, 다음. 다음 소재, 뭐라도 찾아봐 우수하……. 그렇게 천천히 걷다가, 문득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주리 씨의 손목에 매달린 시계. 살짝 과장을 보태서 팔찌만큼이나 얇은 그 액정에는, 오늘도 작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115’. 한시 십오 분, 열한시 오 분……. 둘 다 아닌데.


“그 시계…….”

“네?”

“시계 맞아요? 숫자가 시간 같지는 않아서요.”

“아…….”


주리씨는 자신의 손목을 들어보이며 잠시 말을 끊었다. 혹시 실례가 되는 질문을 한 건가 싶어서 마음을 졸이던 찰나, 그녀는 금세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네. 시간은 아니고, 건강……. 그, 심박 수 같은 거에요.”

“아아.”


115. 심박 수가 115이라. 아주 잠깐, 여태까지 걷던 느린 발걸음으로 두 걸음정도 가는 사이, 어느새 머릿속에서는 쿼드코어 CPU마냥 빠르게 머리가 굴러가고 있었다. 심박 수가 세자리면 높은 거 아냐? 심박 수가 높다는 건, 혹시 주리씨도……. 괜한 기대와 함께, 가슴과 머리가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하 씨.”

“넵.”


그리고 갑자기 그녀의 입이 열렸다. 그녀의 부름은, 망한 게임을 정리하러 온 고인물 플레이어의 선언과도 같았다. 이 멋쩍은 대화를 끝내러 왔다, 가만 두면 얼마나 잘 하나 지켜봤는데 영 아니어서 내가 나서야겠다, 그런 느낌. 그리고 고작 삼사년의 짧은 사회생활을 통해 깨우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이런 순간에는 자존심을 세우지 말고 그 사람에게 바통을 넘겨줘야 한다는 것이다.


“넵이 뭐에요, 기합 바짝 들어가서는.”


푸하핫, 그녀는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어깨가 움츠러들어서, 나는 주리 씨 몰래 어깨를 몇 번이고 돌려야했다.


“수하 씨는 회사에서 친한 사람 있어요?”

“네?”


갑자기?

단박에 남 대리님 얼굴이 떠올랐다. 사실 남 대리님 말고는 마땅히 친하다고 할 사람이 없기도 했다. 아니, 물론 부서원들과는 모두 인사야 주고받지만, 친하다는 건 또 다른 의미잖아.


“수하 씨는 늘 예의도 바르시고, 허점도 없어 보이고. 한 번에 마음을 여는 스타일은 아니구나, 싶어서요.”


곰곰이 돌이켜봤다. 내가 허점이 없다고?


“왜, 보통 사람들은 그렇잖아요. 처음 보는 사람이어도 술 한 잔에 절친 됐다가, 십 수 년을 사귀다가도 연락 한 번에 절교했다가도 하는데. 수하 씨는 그런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고요.”


내가 한동안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묵묵히 걷자 그녀는 그렇게 설명을 덧붙였다. 다만 이제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는데,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네…….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에요.”

“아, 그런 뜻은 아니에요. 수하 씨는…….”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한 번 나를 쳐다보며 말을 마무리했다.


“수하 씨는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에요. 친구하고 싶은 사람.”


덜컹. 낡은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펜티움 쓰리 컴퓨터가 부팅을 시작할 때처럼 머리와 가슴 언저리가 둔중하게 울렸다. 정전기가 퍼져나가는 느낌이 정수리부터 가슴아래까지 퍼져나가면서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빠르게 연산하기 시작했다. ‘친해지고 싶다’, 좋은 의미다. 좋은 의미겠지?


그럼 ‘친구하고 싶다’는?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주리 씨는 그럼 친한 사람이 있어요?”

“저요? 저야 뭐…….”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하긴 회사에는 없긴 하다. 안과장님 정도? 진아 언니랑.”

“안 과장님…….”


뭐?


내가 입으로 내뱉지도 않은 대답이 머릿속에 울려 퍼질 때 쯤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물음표를 던지기 시작했다. 뭐? 누구? 뭐라고? 뭐?


“안 과장님이요?”

“네, 뭐. 음……. 여러모로 수하 씨 하고는 다른 스타일의 사람이긴 한데, 다른 사람도 잘 챙겨주고, 후배들도 잘 가르쳐주고, 친절하고……. 뭐 그래요.”


며칠 전 내 어깨를 누르고, 인사도 무시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배도 나오고 머리도 괴상하게 기른 그 남자가 친절하다고? 몇 번이고 날 무시하고 째려봤던 그 사람이? 게다가 그 사람이랑 제일 친하다고?


불과 몇 초전에 들었던, 친해지고 싶다는 말은 이미 내 기억에서 사라져 있었다. 지금 유일한 희망은 그 말을 뱉은 그녀의 말투가 썩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것도 내 주관적인 해석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내가 듣기에는 그랬다. 확실하게 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 분……. 되게 무서워 보이시던데.”


행여 험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나빠 보이지 않을 선에서 살포시 의문을 표했다. 그리고 이어질 그녀의 답변을 예상했다. 아, 그런 면이 있죠 라든지, 인기가 많은 편은 아니라든지, 그냥 저한테는 잘 해주셔서 라든지…….


“안 과장님이?”


하지만 주리씨는 오늘 하루 중 보였던 가장 큰 반응을 보였다.


“안 과장님이 무서워 보인다고요?”


두 눈을 크게 뜨고, 꼭 이상한 것을 본 것처럼 그녀는 나를 쳐다봤다. 얼굴이 괜히 뜨거워지고 머리가 핑핑 돌아가면서, 나는 간신히 설명을 덧붙였다.


“아……. 그. 지난번에 뵈었을 때 인사를 안 받아주셔서……. 무뚝뚝해보였다고 해야 하나요.”

“수하 씨가 뭐 잘못한 건 아니에요?”

“아니에요!”


푸하핫, 그녀는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농담이에요. 안 과장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부족하다, 부족해. 그냥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설명은 부족하다고! 나는 이진아 대리가 몇 번이고 주리 씨와 안 과장님을 엮으려고 했던 대화를 기억해냈다. 하긴, 그 때도 사람 좋고 착하다는 점에서는 동의했었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번 더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아 별 건 아니고……. 지난번에 진아 대리님이 말씀하시는 것 보고, 주리 씨를 곤란하게 하셨거나 그런 줄 알았었어요.”

“아…….”


주리씨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혹시 내가 선을 넘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젠장, 항상 말하기 전에 세 번은 더 생각하고 말을 뱉어야 하는데. 꼭 중요한 순간에는 그런 법칙을 까먹곤 한다.


“진아 언니가 억지로 엮기는 하는데, 그런 것만 빼면……. 사실 회사에서 제일 친한 사람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엮으려는 것도 있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지만, 그 미소는 손등에 바른 소독약처럼 금방 증발해버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화를 내지 않아서 다행, 하지만 안 과장이 하필이면 그녀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서 불행. 누가 인생사를 새옹지마라고 했나, 인생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번갈아 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벌린 잘못과 남이 초래한 잘못이 있는데, 그 둘이 동시에 혹은 번갈아 오고, 어느 하나를 운 좋게 만회하는 순간이 어쩌다가 찾아오는 것이 바로 인생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대로변에 있는 정류장인데도 기다리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언뜻 보니 전광판에 새겨진 예상 시간은 7분. 아, 제발. 3분만 더, 인간적으로 두 자리 숫자로 좀 채워줍시다. 내가 급하게 타려고 할 때면 맨날 두 자리더니…….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도로를 바라보고 섰다. 그녀는 핸드백을 앞으로 든 채로, 나는 배낭을 어색하게 한쪽 어깨에만 걸친 채로.


“확실히 수하 씨가 세심하네요.”

“네?”

“그런 대화도 기억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주리 씨는 어느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소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찌푸리고 있지도 않았다. 간혹 켜져 있는 가로등 불빛에 얼굴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면서, 조각처럼 변함없는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


괜히 뒷목을 잡고 앞을 바라봤다. 어, 괜한 걸 말했나, 스토커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앞으로는 이런 일에 끼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인가.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웃어 넘겨야 하나,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나……. 어, 아니 세심하다고 한 건 칭찬 아냐?


“원래 그……. 다 막 기억하고 그러지는 않는데…….”


뒷목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가,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뒤통수를 긁적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는 그 때까지도 나를 쳐다보고 있는 주리 씨를 흘끗 쳐다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역시 사과를 하는 것이 맞았나, 고민하는 순간, 갑자기 그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아니면 힘 뺀 엉덩이에서 새어나오는 방구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풋.”

“네?”

“푸핫, 아니, 뭐가 네? 에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폭풍처럼 웃음을 쏟아냈다. 마치 나와 걸어오는 내내 웃음을 참고 있었던 것처럼, 주리 씨는 한참을 웃다가 결국 그 자리에 걸음을 멈췄다. 아니, 웃는 이유라도 알았으면 같이 웃거나 할 텐데. 나는 허리를 숙인 채 웃고 있는 주리 씨를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웃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 대체 뭐가 죄송해요?”

“네? 아니…….”

“그리고 뭐가 네에요, 네는! 그냥 웃은 건데. 진짜 수하씨도 참 독특하다.”


갑자기 인터넷에서 하는 우스갯소리가 떠올랐다. 군대에서 함께 근무를 서던 선임이 방구를 뀌었는데, 그 소리를 듣고 무슨 말을 했나 싶어 ‘잘못들었습니다?’를 했다가 오지게 맞았다는 이야기. 설마 내가 그런 짓을 저지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나는.


“그런 성격으로 박 차장님이랑 일하려면 힘들겠는데. 안 그래요?”

“아 뭐…….”

“오늘도 박 차장님이 오자고 한 거 거절 못해서 온 거죠?”

“그……. 네, 뭐.”


주리씨는 혼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버스가 오는 방향을 살폈다. 괜히 혼자 웃음거리가 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상상했던 산책은 이런 건 아니었는데, 사진 이야기, 밤 산책, 서로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친해지고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로맨틱한 대화를 나누는 거였는데! 이래서 꿈이든 현실이든, 계약이나 청탁을 하려면 구체적인 부분까지 상세하게 잘 살펴야 하는 거다. 만에 하나 그 꿈을 한 번 더 꿀 수 있다면, 그 남자 멱살을 한 번 잡고 시작할 거다…….


“그래도 그런 대화라도 기억해주니까 기분 좋네요.”


주리씨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바로 싱긋 웃어보였다. 하얀 얼굴 위에 초승달 같은 눈 두개가 떠오르고, 입가에는 연못 같은 보조개가 살며시 들어가고. 똑바른 콧대, 매끈한 피부, 두툼한 입술, 그 밖에 더 자세한 것을 살피기도 전에, 그 그림은 내게서 시선을 돌리고 다시 앞을 향했다.


“기억력이 좋은 편이에요? 아니면 내가 수하 씨한테 이제는 친한 편이라 기억해준 거?”


정신이 없다. 불평을 하려던 차에 레프트 라이트가 연속으로 꽂히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버버하는 것만큼 사람이 없어 보이는 것도 없다! 나는 그 갑작스러운 순간에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말해봐, 우수하. 뭐가 됐든, 당당하게만.


“기억력이 좋진 않은데……. 친한 건 남 대리님이랑 친해요.”

“푸하핫. 그렇구나. 어쩐지 친해보였어요. 그 때 휴게실에서도 같이 있었잖아요.”


나를 타자화할 수 있다면 당장 눈앞에 놓고 턱을 세게 한 대만 때리고 싶다. 아니, 딱 내가 뱉은 음절 수 만큼만. 아니, 진짜……. 하……. 남 대리님이 거기서 왜 나와.


“아, 버스 왔다. 수하 씨, 다음에는 사진 더 보여줘요. 원래 그거 보려고 따라 나온 거였는데.”


주리 씨는 그렇게 말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손을 흔드는 그녀에게 똑같이 손을 흔들흔들 하다가, 생각해보니 원래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했던 사이라는 걸 떠올리고는 얼른 팔을 내렸다. 어차피 버스는 지나갔고 그 모습을 주리 씨가 볼 일은 없었지만. 알라딘의 자스민 공주가 된 것처럼, 나는 주리 씨를 싣고 날아가는 새파란 버스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밤 열한시를 넘겨 집에 들어가자, 그 때까지도 기다리던 엄마가 물어왔다.


“아 회사 부장님 한 분이 상을 당하셔서. 형은 자?”

“응. 할머니가 너 좋아하는 콩국수 해놓으셨다. 먹고 잘래?”

“아냐, 괜찮아.”


할머니 방의 문을 열었다. 어두운 방 안에 거실의 불빛이 쏟아져 들어가자, 문 쪽으로 돌린 할머니의 등이 보였다. 그리고 몇 초 후 바람 빠지는 듯한 힘겨운 숨소리가 들리면서 할머니의 등이 조그맣게 들썩였다. 나는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고 나와, 옷을 벗기도 전 침대에 몸을 던져버렸다.


씻기 귀찮아서가 아니었다. 다만 바로 쏟아지는 수돗물에 씻겨 내리기에는 아쉬운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아니 가슴 한 구석에서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그거 보려고 따라 나온 거였는데.’


따라 나왔다고, 날 따라 나온 거였다고!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분위기가 굉장히 좋다! 하지만 그런 기분에 취할 무렵, 또 다른 목소리가 귓가에서 앵앵대기 시작했다.


‘제일 친한 건……. 안 과장님?…….’


나는 베개 속 깊숙이 머리를 묻었다. 그러고도 마음속에서 앵앵대는 소리 덕에,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또 꿈에서 가운을 입고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남자를 만났다.


“이번에는 뭘 포기하실 건가요?”


이제는 익숙해진 듯, 남자는 편하게 말을 건넸다. 나도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앉아서 바로 대답을 하려다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를 쳐다봤다.


“그건 아저씨가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여전히 들쭉날쭉 지저분하게 수염을 기르고 있는 남자는 잠시 생각하듯 눈을 치켜뜨고 천장을 쳐다보다가, 실없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네요. 이번에는 뭘 얻고 싶으신가요?”


한참을 생각했다. 사실 무엇을 말할지는 자기 전부터 분명히 결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며칠 전부터. 다만 그래도 될지, 포기해야하는 것은 괜찮을 지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늘 지름신이 자제력을 꺾게 되듯이 나는 책상에 한 팔을 올려놓으며 물었다.


“주리 씨와 제일 가까워지려면 뭘 포기하라고 했었죠?”

“회사 내에서의 평판입니다.”

“반 년 동안?”

“네.”

“그럼 반 년 뒤에는 어떻게 돼요?”

“말씀드릴 수 없어요.”

“지난번하고 똑같은 거죠?”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깐 머릿속에 안 과장님을 떠올렸다가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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