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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퀴즈

당신의 포기를 삽니다

by 봄단풍

찰칵 -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할머니에 대한 검사는 이틀 동안 진행됐고, 그 동안 할머니의 팔뚝에는 울긋불긋한 멍이 몇 개 더 생겼다. 확실한 답이 나오는 대로 보호자를 부른다고 했으니, 곧 엄마나 아빠가 다녀오고 말씀해주시겠지. 할머님은 검사의 여파 때문인지, 이틀 동안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시고 하루 종일 잠만 주무셨다.


찰칵 -


그리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출근을 했다. 형도 마찬가지였지만, 뭔가 무거운 짐을 엄마와 아빠에게 전부 짊어드린 것 같아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물론 당연히 가족 중에 생계를 책임진 사람은 일을 해야지. 그리고 저녁에도 교대로 할머니의 곁을 지키기도 했고. 하지만 썩 충분히 할머니를 보필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마다, 어김없이 지난 꿈속의 질문과 고개를 가로젓는 내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찰칵 -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닐까? 지금 할머니를 위해 우리 엄마가 고생하듯, 우리 엄마가 아프면 내가 고생 할 테니 굳이 지금 사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니, 사실 그 때문이 아니잖아. 그 꿈속에서, 나는 주리 씨를 포기했어야 했나…….


찰칵 -


소주가 맛이 없다 하는 사람에게도 소주가 끌리는 날이 찾아오는 법이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도 마음 속 근심을 연기에 담아 멀리 보내버리고 싶은 날이 있는 법이다. 그럴 때 적절한 대체재를 찾지 못하면 바로 그 둘로 넘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운동이나 게임, 연애, 혹은 달달한 음식 등으로 버티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아슬아슬하게 경계에서 매달려 있는 쪽인 것 같았다.


찰칵 -


나는 하늘을 찍던 핸드폰을 내리고 유심히 화면을 살폈다. 새파란 하늘, 그 하늘을 삼분의 일쯤 덮은 커다란 구름들. 담배 피우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흡연 구역에서, 나는 빌딩 사이의 좁은 하늘을 어떻게든 핸드폰 카메라에 꽉 차게 찍으려고 이리저리 돌려봤다. 다만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 어딜 어떻게 찍어도 옆 건물의 모서리가 툭 삐져나오기 일쑤였고, 그렇다고 확대해서 하늘만 찍자니 사진이 썩 예쁘지 않았다. 좋은 사진을 건질 때면 스트레스가 풀렸지만, 어떻게 찍어도 내가 바라보던 아름다움이 담기지 않으면 오히려 새로운 스트레스일 뿐이었다.


찰칵 -


핸드폰을 한참 내려다보고, 몇 초가 더 지난 뒤에야 나는 방금 전 찰칵 소리가 내 핸드폰에서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휙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쳐다봤다.


“어…….”

“안녕하세요.”


바닥에 한 쪽 무릎을 쭈그리고 앉아서 핸드폰을 세운 채 내 쪽을 찍고 있는 주리 씨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검은 단화, 복숭아 뼈가 보이는 검은 정장 바지, 손목이 드러나는 정장 재킷과 그 안에는 쇄골이 드러나는 하얀 블라우스까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긴 흑발을 휘날리며, 주리 씨는 성큼성큼 내 옆으로 다가왔다.


“수하 씨 담배 피우세요?”

“아, 아뇨. 그냥 여기…….”

“사진 찍으러 오신 거구나.”


어느새 옆에 다가온 주리 씨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잘 안 나오네요.”

“어디 봐요.”


주리 씨는 내가 내민 핸드폰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가로로도 돌려보고, 세워서 보고, 몇 장을 넘겨보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씩 웃으며 핸드폰을 돌려줬다.


“이럴 줄 알았어.”

“왜요?”

“잘 찍었는데요, 뭘! 하나같이 다 예쁘게 잘 나왔는데.”

“아유, 과찬이십니다…….”


나보다 잘 찍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연신 고개를 숙여 보이며 손을 저었다. 주리 씨는 그 모습에 파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저도 여기 좋아해요. 그나마 우리 회사에서 하늘이 제일 잘 보여서.”


주리 씨는 나와 달리 금방 하늘을 찍었다. 별 고민 없이, 한 손으로 툭.


찰칵 -


“어때요? 괜찮죠?”


주리 씨는 웃으며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하늘은 맑았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아직은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옷을 여며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상청 예보로는 며칠 전과 기온은 비슷했는데. 어쩌면 옆에 서있는 여인이 유독 하얀 손목과 발목을 내놓고 있어서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구름 되게 맛있게 생기지 않았어요?”


얼마간 하늘을 바라보며 핸드폰으로 찰칵거리던 주리 씨는 한참 동안 자기가 찍은 사진을 나에게 보여줬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이지만, 곳곳에 자리한 뭉게구름도 나름 잘 어울렸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주리 씨가 내민 핸드폰 사진을 들여다 봤다를 반복했다.


“그러네요. 무슨 크림처럼 생겼네.”

“그쵸? 수하 씨 인스타에 이런 사진 많던데. 구름 좋아해요?”

“어……. 네. 그냥 하늘을 좋아해요. 이런 저런 모습들.”


주리 씨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핸드폰을 하늘로 높게 들었다. 먹이를 노리는 야수처럼, 한참동안 핸드폰을 통해 하늘을 노려보다가, 핸드폰을 이리저리 기울였다가,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일어났다가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그녀는 조심스럽게 사진을 담았다. 찰칵. 핸드폰이 폴라로이드 사진기라도 되는 것처럼 액정을 조심스럽게 닦고 혼자서 한참을 들여다본 후에, 그녀는 아까처럼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내게 건넸다.


“이건 어때요? 되게 신비롭게 나오지 않았어요?”


나는 주리 씨가 넘긴 액정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두툼한 구름 더미에서, 가운데에 옅은 부분을 폭포수처럼 뚫고 내려오는 햇빛을 담은 사진이었다. 나는 그냥 하늘이랑 구름만 대충 나오게 찍곤 했는데.


“어, 네. 진짜.”


주리 씨도 사진을 배운 적은 없다고 했다. 그냥 취미로 찍으면서 공부한 것이라고. 다만 확실히 나와는 접근도 다른 것이, 나는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보고 괜찮은 걸 고르는 수준이라면, 그녀는 똑같은 핸드폰 사진을 찍으면서도 초점을 바꾸거나 특정 부분을 확대하면서, 같은 구도에서 다양한 느낌의 사진을 연출해냈다.


“에이, 웬만한 사람들은 다 할 줄 알아요.”


그리고 주리 씨는, 안 그래도 격차를 느끼는 나의 기를 그런 말로 더 죽여놨다.


“수하 씨도 참 독특하네요. 담배도 안 피우면서 흡연 구역에 와서는.”

“엄밀히 말하면 흡연 구역은 아니에요. 아무도 뭐라 안 하니까 사람들이 여기 와서 피우는 거지.”


이번에는 내 차례다 싶은 마음에 나도 핸드폰을 하늘로 올렸다. 하필이면 그 타이밍이 햇살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손을 뻗었던 터라, 나는 금방 손을 내려야 했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면 핸드폰 화면은 급격히 어두워지곤 했다.


“그래요? 우리 부서 사람들은 매일 여기로 오더라고요.”

“홍보팀 분들은 담배를 많이 피우시나 봐요.”

“그렇죠. 안 과장님 빼고.”


나는 다시 핸드폰 카메라를 하늘 위로 올렸다. 곧 해가 구름에 가리면서 액정이 반대로 밝아졌다. 하얀 구름과 새파란 하늘이 선명하게 구분이 되기 시작할 때쯤, 나는 다시 셔터를 가볍게 눌렀다. 찰칵.


“안 과장님은 담배 안 피우세요?”

“네. 그 분은 건강관리 나름대로 철저하게 해요.”


나는 안 과장의 뚱뚱한 몸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왜 웃었어요?”

“푸핫, 아니, 저, 죄송해요.”

“나랑 똑같은 생각 하는 것 같은데.”


눈을 돌려보니 주리 씨도 왜인지 묘한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안 과장님 몸매 때문에 그렇죠?”

“…….”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애써 참고, 그게 얼굴에 티 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며 대답을 생각했다. 틀렸다. 이미 그렇게 몇 초가 지났고, 주리 씨는 그런 내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착한 척 안 해도 돼요.”

“……아, 죄송해요. 그……. 철저하다는 말이…….”


나는 어떻게든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목 바로 아래에 뭉친 웃음소리는 새치기당한 손님처럼 이번에는 기어코 터지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먼저 웃음을 터뜨린 건 주리 씨였다.


“푸하핫!”


자기가 말해놓고 왜 웃나 싶었지만,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웃는 그녀를 쳐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같이 웃기 시작했다.


“아니, 수하 씨. 다른 사람 욕 해본 적 없어요?”

“저요? 아니, 많이 하는데…….”

“그냥 철저한 사람 몸이 왜 그 모양이냐고 물어볼 수도 있잖아요.”

“아 사실 그 말을 하려고 했던 건 맞는데…….”

“푸하하핫…….”


주리 씨는 그 상태로 서서 몇 번을 더 웃다가, 카메라를 내리고 나를 쳐다봤다. 앞머리 없이 훤히 드러난 하얀 이마, 커다란 눈, 그 밑에 쏙 들어간 반쪽짜리 보조개. 팔만 뻗으며 닿을 거리에서, 얼굴에 아직도 미소를 머금고 있는 주리 씨는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나는 멍하니 서서, 그 커다란 눈동자가 조금씩 움직이는 걸 지켜봤다.


“머리 잘랐네요?”

“네? 아, 네.”


이제 여름도 오니까 시원하게 다니려고요. 어영부영 말을 덧붙이자, 주리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응, 하고 대답 아닌 대답을 건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내 이마 위 쪽 언저리를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팔을 조금만 뻗으면 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던 터라, 주리 씨의 커다란 눈동자가 요리조리 움직이는 것이 뻔히 보였다. 그게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 쯤, 주리 씨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수하 씨 혹시 무슨 걱정 있어요?”

“네?”


갑자기 이게 또 무슨 소리람.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무슨 소리냐는 듯, 잠시 좌우를 살피다가 다시 주리 씨의 큰 눈을 마주봤다.


“어…….”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어…….”

“어……. 어어어없다고?”

“아뇨, 어……. 어어떻게 알았어요?”


주리 씨는 씩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냥, 그런 것 같아서요. 수하 씨는…….”


그렇게 말을 해놓고 잠깐 뜸을 들인 그녀는, 곧 말을 이었다.


“……그냥 얼굴에 다 티가 나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나는 다시 하늘을 쳐다봤다. 그래, 주리 씨는 분명 예리했다. 지난 밤, 아니 지지난 밤부터 계속 내 마음을 무겁게 물들이던 물감같은 죄책감이 있었다. 너는 지금 이걸 누려서는 안 돼, 이 사람과 즐거워서는 안 돼, 라고 말하는 메아리도 울리는 것 같고. 다만 이걸 주리 씨한테 털어놓는 것이 현명한 판단인지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주리 씨는 만약에…….”


나는 눈을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주리 씨는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커다랗고 깊은 눈을 그렇게 마주보고 있자니 괜히 말이 서투르게 나올 것 같아서, 나는 눈을 다시 앞의 허공으로 돌렸다. 사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걱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감도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말을 꺼낸 건 주리 씨라면 나랑 같은 상황에서 훨씬 더 나은 판단을 하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혹시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가요?”

“없어요. 외조부모님들은 돌아가셨고, 친가 쪽은 연락을 안 한지 한참 됐어요.”

“그럼……. 아,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요. 할머니에 대한 걱정이에요?”


듣기만 해도 마음 불편해지는 대답 뒤에도, 주리 씨는 씩 웃고 있었다. 그 미소에 용기를 얻어 대답했다.


“네. 아뇨, 그러니까, 할머니가 편찮으신 건 맞는데, 그…….”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눈을 보고 있었다. 듣고 있어요, 천천히 말해 봐요 같은 흔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지금처럼 횡설수설하는 입장에서는 훨씬 마음이 편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차분히 말을 정리했다.


“만약에 할머니가 계신데 많이 아프다고 해봐요. 그런데 주리 씨가 사랑하는 연인을 포기해야 할머니를 살릴 수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에요?”


주리 씨는 눈을 내 옆의 허공으로 돌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잠깐 생각하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해서……. 할머니랑 연인이랑 같이 물에 빠지면 누구를 살릴 거냐, 같은 질문인 거죠?”


주리 씨가 던진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사실 그 남자의 얘기에 따르면, 내가 주리 씨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할머니가 무조건 돌아가시는 건 아니니까 상황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그것까지 설명하면 너무 구차해보일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상황이면 됐지, 뭐.


“이거 원래 상견례 질문 아니에요? 부모님이랑 아내가 빠지면 누굴 구할 것이냐, 아니면 부모님이랑 남편이 빠지면 누굴 구할 것이냐…….”

“어……. 듣고 보니 그러네요.”

“수하 씨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네?”


반사적으로 손이 올라갔다.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나는 손과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주리 씨의 의문에 그렇게 저항하고 있었다.


“아니, 왜……. 아니 그래서 제가 물어보는 건 아니고…….”


주리 씨의 깊은 눈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커다란 눈동자 안에 하늘과 구름, 그리고 어두컴컴한 낯익은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그 때에서야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대답할 말을 급하게 찾느라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서 그런 걸 거다, 아마도!


“흐음. 없는 걸로 쳐요, 그럼.”

“아니, 치는 게 아니라…….”

“정말 없어요?”

“아니, 제가 뭐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물어보는 건 아니고요…….”

“아하. 오케이. 그럼 그렇게 넘어갈게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봤더니, 그 사람 때문에 한 질문은 아니다, 라고 대답한 거죠?”

“그……. 그게 그렇게 되네.”

“푸하핫.”


주리 씨는 또 그렇게 웃음을 터뜨렸다. 눈동자는 사라지고, 만화 캐릭터마냥 반달처럼 휜 눈썹과 눈꺼풀만이 남았다. 그 아래 깊이 파인 보조개에 한참 동안 정신을 뺏겼다가, 화끈 거리는 얼굴을 식히려 다시 파란 하늘로 눈을 돌렸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바람도 시원했고, 구름은 여전히 크림처럼 두텁게 뭉쳐서는 두둥실 가볍게 떠가고.


“그런 상황을 가정하는 게 진짜 어려운 것 같아요.”


그렇게 얼마간 웃던 그녀는, 잠시 후 그렇게 말을 꺼냈다.


“진짜 그런 상황이 오면 너무 맘 아플 것 같아요. 어떻게 결정해요, 그걸? 어느 쪽으로든 답이 없잖아요. 할머니를 선택하는 사람은, 연인이야 얼마든지 다른 사람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얘기할 테고,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은, 할머니는 그 연인을 선택하는 걸 이해해 줄 것이라 얘기할 테고.”

“아니면 할머니는 어차피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럴 지도 모르죠.”

“헐.”


주리 씨는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수하 씨 의외로 되게 냉정한 면이 있네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하 씨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아니, 그…….”

“아하, 그래서 할머니로 물어본 거죠? 엄마나 아빠보다는 할머니가 시간이 얼마 없어서…….”

“……죄, 죄송합니다.”

“아니 왜 자꾸 그런 쓸데없는 거에 죄송해하는 거예요! 정말. 수하 씨는 죄송하다는 말 좀 그만 해야겠어.”


나는 서둘러 변명거리를 찾았다. 뭔가 주리 씨가 실망할 법한 말을 한 것 같아서, 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만회할 말들을 꾸며내기 시작했다.


“아, 아니 사실 그 할머니 얘기도 친구가 물어봐서 생각 중이었던 거예요. 아는 친구가 밥 먹다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졌는데, 계속 생각하고 해봐도 답이 안 나와서…….”

“그렇구나. 어, 잠깐만.”


주리 씨는 갑자기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니 그러면, 그냥 친구랑 토론하던 걸 그렇게 생각해보느라 표정이 안 좋았던 거예요?”

“어……. 네.”


주리 씨는 황당하다는 듯 허허, 하고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뭔가 신기한 걸 쳐다보듯 내 눈, 얼굴 언저리 구석구석을 훑어봤다.


“어떻게 수하 씨 같은 사람이 이 회사를 들어왔지?”

“네?”


정말 놀랍다는 그 말투 때문에, 나는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뭐지,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친구라고 둘러댄 것이 실수였나, 그걸 고민이라고 얘기한 것이 잘못된 건가?


“아니, 진짜. 황당하기도 한데, 진짜 순수하네요, 수하 씨는.”


다행히, 주리 씨는 그 말을 뱉고는 웃고 있었다. 마침 불어온 바람 덕에 웃는 얼굴 옆으로 그녀의 긴 흑발이 흩날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는 그녀의 눈웃음은, 사람이라기보다 사랑스러운 동물 같았다. 아니, 내가 동물이 된 것 같기도 했다. 분명히 저 사람이 나를 가지고 놀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으니까…….


“아무튼, 정말로 할머니가 편찮아서 둘 중에 선택해야하는 상황은 아닌 거죠?”

“네. 아, 할머니가 입원하시긴 했어요.”

“네에?”


이 쪽을 돌아보는 주리 씨의 눈이 커졌다.


“아니, 어쩌다가요?”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진 그 얼굴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나는 그 후 오 분 동안 며칠 전 있었던 일을 설명해야 했다. 검사도 받으셨고, 결과는 곧 나온다, 지금 그래도 호전 됐고 병원에서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니 아마 금방 퇴원하실 거다……. 주리 씨의 놀란 얼굴에 어떻게든 아까의 미소를 되찾아 오기 위해, 나는 희망 섞인 허구를 얹어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괜찮을 거라는 내 말을 몇 번이나 더 들은 뒤에야 굳은 얼굴을 풀었다.


“물론 당연히 저는 할머니를 잘 모실 거지만…….”

“그리고 좋아하는 그 분도 놓치지 않을 거고?”

“아니, 그게 아니고요…….”


어느새 쿡쿡 웃고 있는 주리 씨를 쳐다보다가, 나는 허허, 하고 웃음을 흘렸다. 뭐든, 그녀와 같이 하는 행동은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좋아서 웃고, 같이 웃어서 기분이 좋고, 웃음이 아닌 것들도 함께하면 괜찮을 것 같은 사람, 눈물도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은 사람.


“……그냥, 할머니가 그 정도로 편찮으시니까 온갖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친구랑 한 말이긴 한데 괜히 마음에도 남고, 진짜로 둘 중에 선택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죄책감 같은 것도 생기는 것 같고…….”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대강 마쳤다. 그러자 주리 씨는 내 옆에 슥 다가오더니, 한 팔을 내 어깨에 올리고, 다른 팔은 자기 허리를 짚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남이 하면 돈 뜯으러 온 건달이나 할 것 같은 그 자세도, 그녀가 하면 태가 나고 멋있었다. 왜, 캔 커피를 전화기처럼 들고는 ‘여보세요?’ 하는 그 옛 광고도 배우가 하면 드라마로 보이는 것처럼.


“수하 씨, 어디서 들은 말인데. 아까 제가 답이 없다고 했던 거 기억나요?”

“네.”

“그런데 어느 쪽이든 답이 없다는 건, 어느 쪽도 답이 될 수 있다는 거래요.”


주리 씨는 그 상태로 내 눈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수하 씨가 어떻게 살든, 무엇을 선택하든 할머니에게는 대견한 손자일 거고, 좋아하는 그 분께는 세상에서 제일 매력적인 사람일 거예요. 살면서 꼭 뭔가를 포기해야만 할 필요는 없어요. 수하 씨는 둘 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말없이 옆에 선 그녀를 내려다봤다. 괜히 포기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져서. 하지만 동그랗게 뜬 커다란 눈에는 여전히 맑은 하늘이 비치고, 얼굴 사이사이로 흘러가는 검은 머리카락에는 기분 좋은 바람이 실려 있었다. 주리 씨는 얼굴에 일렁이는 머리카락을 한 쪽으로 넘기며, 여전히 환한 미소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나는 작게 속삭이고, 카메라를 내려다봤다. 아까 주리 씨와 찍은 하늘 사진 여러 장이 앨범에 담겨 있었다. 마침 그 시선을 따라 눈을 내린 그녀는, 바로 내 핸드폰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참, 사진 보내줘요. 인스타 올려야지.”

“아, 네. 주리 씨 것도 보내주세요. 많이 배워야지.”

“푸힛. 배우긴 뭘 배워요, 더 잘 찍으면서.”


주리 씨가 건넨 동의할 수 없는 칭찬을 끝으로 우리는 다시 회사 안으로 발을 옮겼다. 엘리베이터에 단 둘이 타고도 아무 말 없이 올라가다가, 곧 그녀가 내려야 할 차례가 먼저 왔다.


“오늘 꼭 칼퇴하세요. 그리고……. 할머님께서 쾌차하시길 바랄게요.”

“아, 네. 고마워요.”


웃으며 손을 흔든 주리 씨는, 눈 사이를 한 번 찡긋하고 사랑스럽게 구겨보이고는 문이 닫히기 전 몸을 돌렸다. 그 찰나의 순간을 나는 다시 기억에 한 순간에 조심스레 새겨 넣었다. 장식 없는 검은 단화, 복숭아 뼈가 보이는 짧은 기장의 검은 바지, 하얀 블라우스, 손목이 보이는 정장 재킷,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자신감 가득한 걸음걸이……. 그 당당함이, 첫 만남에서 내 술잔이 올라가는 걸 막아 세운 손짓과 오버랩되면서, 나는 자꾸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심호흡을 했다. 잘했어, 잘했어 우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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