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포기를 삽니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타이밍 좋게 박차장님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자기가 담배를 피우러 가거나, 같이 담배를 피우러 가면 아무런 말이 없으면서도 누구는 전화만 잠깐 받고 와도 헛기침을 큼큼하는 사람이었던 터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로 슥 들어가 앉았다. 나는 옆 자리 남 대리님의 파티션 너머로 슬쩍 고개를 밀어 넣었다.
“형, 박 차장님 어디 갔어?”
“몰라, 담배 피우러 갔겠지.
“아닐걸, 나 방금 흡연구역에 있다가 왔는데.”
“너 담배 피우냐?”
“아니, 그냥 바람 쐬러.”
“담배도 안 피우는 놈이 무슨 흡연구역에서 바람을 쐬어?”
“아니, 뭐. 오늘은 그럴 만 했어.”
팔짱을 낀 채 의자에 앉아서 증권거래 어플을 켜둔 핸드폰을 뚫어져라 보던 남 대리님은, 떨던 다리마저 멈추고 내게 고개를 돌렸다.
“뭔데. 뭔 일 있구먼?”
“아, 그. 주리 씨 만났거든.”
“새끼…….”
남 대리님은 슥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들어, 박차장님 자리를 살폈다. 재무팀으로 들어오는 문까지 한 번 살핀 그는 바퀴달린 의자를 조용히 몇 번 끌어 내 쪽으로 당겨 안더니 물었다.
“그래, 무슨 얘기 했는데.”
“별 얘기는 안 했어.”
나는 흡연구역에서 있었던 얘기를 간단히 요약했다. 쉬다가, 사진을 찍다가, 우연히 주리 씨를 만나서 할머니 얘기도 하고 사진 얘기도 하다가 헤어졌다. 어차피 내가 왜 그 곳에 갔는지, 왜 마음이 무거웠는지는 이미 알고 있던 남 대리님이라 설명은 금세 끝났다.
“야, 그 상황에서 하는 말이 고작 그런 얘기냐?”
“그럼 뭐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건 너한테 달렸지, 인마.”
“아니 어려운 걸 어떡해! 여자랑 제대로 말해본적도 없는데, 그냥 주리 씨 머리카락만 봐도 막 혀가 굳고 그런다고.”
“으이그, 새끼……. 야, 쉽지. 공감 모르냐? 공감. 어? 잘 모르겠어도 그냥 끝 말 반복해주고, 공감해주고. 원래 대화에서 컨텐츠는 중요하지 않아. 알아? 톤, 억양, 그런 걸로 내가 당신의 감정에 이만큼이나 맞춰주고 있다를 보여주는 게 포인트라고.”
슬쩍 고개를 들어 한 번 더 문과 박 차장님 자리를 살핀 남 대리님은, 의자를 당겨 안고는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야, 보통 진 주임 만나면 무슨 얘기하는데?”
“어……. 사진 얘기? 어떤 사진 찍었다, 뭐 그런 얘기 했었지.”
“그럼 서로 사진 찍은 것도 보여주고 그래?”
“응.”
“핸드폰 줘 봐.”
남 대리님은 내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옆으로 길게 눕혀 들고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리고 입은 크게 벌리고 광대뼈를 올리고서는…….
“허어어얼?! 진짜 예뻐. 와, 대박. 어떻게 찍었어요? 어디서 찍었어요? 나도, 나도 갈래. 와, 다음에 같이 가요!”
내가 황당해하는 사이, 남 대리님은 금방 찌든 모습으로 돌아왔다.
“알았냐? 이렇게. 뭐 어렵냐, 그냥 오버해주면 되는 거야. 또, 또 무슨 얘기하는데?”
“그냥 일이 이래저래 힘들었다…….”
“에에에에에~? 그랬어요?”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파티션 위로 잠깐 머리 한 두 개가 솟아 올라왔지만, 어차피 차장님도 없겠다, 또 말한 사람이 남 대리님이라 그런지 올라왔던 머리들도 금방 가라앉았다.
“에에~? 진짜요, 정마알?”
“제발, 형. 제발. 적당히 해.”
“야, 임마. 내가 재밌으라고 이러겠냐, 어? 너 좋으라고 보여주는 거 아니겠냐고, 어?”
“알았으니까 그만하라고, 좀.”
나는 황급히 남 대리님을 무시하고 책상 앞으로 의자를 굴렸다. 파티션 너머로 그의 낄낄대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는, 남 대리님은 애초에 내 그런 반응을 예상하고 놀린 듯 했다.
“그리고 보니까 진 주임이 되게 적극적이네. 너도 좀 액션을 취해봐.”
“무슨 액션?”
“별 게 있냐, 그냥 얼굴도 자주 비추고 말도 먼저 걸어보고 그러라는 거지.”
그 지적에는 사실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 전부 꿈에서 도와준 영역이라, 주리씨가 먼저 말을 걸어 왔던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감정이 있는 건 난데, 오히려 주리 씨가 혼자 고생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럼 꿈에서 소원을 빈 것 말고 무슨 노력을 했더라? 자주 마주치기 위해 동선을 짜 본 적이 있었나, 하다못해 만나면 해줄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준비해 본 적이 있었나…….
“그건 그렇고. 할머니는 괜찮으시냐?”
“검사 결과가 나와야 알 것 같아. 갑자기 그런 거라서…….”
“고생한다. 어머님 잘 챙겨 드리고.”
나는 파티션 너머 다시 핸드폰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남 대리님을 다시 한 번 훑었다. 자동 기능을 켜놓은 핸드폰 게임을 한참 들여다보는 그의 모니터 아래에는 이제 막 백일이 지났다는 남 대리님의 아들과 형수님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한참 보다가, 방금 전 주리 씨에게 던졌던 질문이 떠올라 남 대리님을 불렀다.
“형.”
“만약에 형수님이랑 현우가 동시에 물에 빠지면 어떡할 거야?”
“실없는 새끼. 같이 빠져 죽을란다, 나는.”
“아니, 한 쪽만 골라봐.”
“아 안 골라. 인터넷 그만 보고 일이나 좀 해라.”
“형이 할 말이야?”
“……. 됐고, 그거 또 무슨 모범답안 같은 거 있는 거 아니냐?”
“그런 건 없…….”
모범답안?
나는 방금 전 주리 씨가 건넸던 위로를 떠올렸다.
“답은 없대. 누굴 고르든 현우한테는 멋지고 든든한 아빠일 거고, 형수님한테는 사랑스러운 남편일 거래.”
“오올. 새끼. 좀 멋있었다.”
미소가 지어졌다. 남 대리님의 칭찬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다른 사람의 기분까지 행복하게 하는 말을 건넨 사람이 자꾸 생각나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야.”
“응?”
“그럼 넌 이제 진 주임이랑 어떻게 할 건데?”
남 대리님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해봤다. 그러고보니, 꿈에서 다음에는 어떤 소원을 빌 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봤어도 내가 뭘 할지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더군다나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는 소원’은 계속 진행중에 있다고 했으니,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자연스럽게 기회들이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 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그러게?”
“뭐, 아무 계획이 없어? 저녁을 같이 먹는다든지, 주말에 데이트를 할 거라든지 뭐 그런 생계획 없냐고?”
그 대답이 몹시도 심각하게 느껴졌던 것인지, 남 대리님은 갑자기 핸드폰 게임을 켜둔 채로 내게 몸을 돌렸다. 혹시나 파티션 너머로 목소리가 넘어갈 까봐, 남 대리님은 의자를 파티션 가까이로 끌고 오면서 덧붙였다.
“야, 임마. 아니, 그 정도 했으면 너도 뭔가를 해봐야하는 거 아니냐, 주체적으로다가?”
“하, 할 거야! 내가 언제 가만히 있는다고 했나.”
남 대리님은 그런 나를 한참 노려봤다. 누가 봐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표정은 아니었으나, 남 대리님은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래, 너도 이제 서른인데 그 정도는 알아서 하겠지.”
“…….”
사실 전부터 늘 느끼던 것이긴 했다. 지금까지 주리 씨와 좋았던 소소한 기억들은, 꿈 속에서 빈 소원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는 해도 전부 주리 씨가 먼저 움직였던 것이다. 말도 주리 씨가 걸어, 밥도 주리 씨가 먼저 먹자고 해, 산책도 주리 씨가 갑자기 튀어나왔고……. 이전부터 갖고 있던 불안감이, 남 대리님의 지적으로 가습기 마냥 가슴 한 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뭐라도 하긴 해야겠는데?
“형.”
“시끄러, 일해.”
“형도 일 안하잖아.”
“…….”
“형.”
“왜.”
“형은 살면서, 제일 최근에 포기를 했던 게 뭐야?”
“뭐야, 이번엔 그 꿈 얘기냐?”
남 대리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내 꿈에 대한 얘기를 가장 먼저 털어놓은 사람이 남 대리님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나는 민망한 웃음을 흘리며 남 대리님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글쎄, 뭐……. 회식? 현우 때문에 회식을 포기했었지.”
“무슨 소리야, 그게.”
애초에 회식을 싫어해서, 갓 태어난 아들을 핑계로 옳다구나, 도망간 거면서.
“그건 포기를 안 한 거지. 포기를 했으면 현우를 포기하고 회식을 가야 했던 거잖아.”
“그게 그렇게 되냐?”
남 대리님은 심드렁한 얼굴로 눈을 다시 모니터로 돌렸다.
“어?”
그 와중에 나는 내가 뱉은 말이 어딘가 이상해서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뭔가 힌트를 잡은 기분, 불 꺼진 방 안에서 이리저리 휘두른 손에 나가는 문의 손잡이가 스쳐지나간 기분. 나는 남 대리님의 펑퍼짐한 뒤통수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한참을 생각했지만, 결국 손잡이를 움켜쥐지 못한 채 눈을 다시 내 모니터로 돌렸다.
다음 날 새벽, 할머니의 검사 결과가 나왔다.
대장암. 담당의는 초 중 말을 따지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진행됐다고 했다. 연락을 받고 새벽같이 가셨던 엄마도 담담히 받아들이시는 듯 했다. 그 날 밤이 되어서야 할머니의 병실에 다 같이 모인 우리 네 가족은, 한참동안 숨만 힘겹게 들이쉬고 내쉬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고생 많이 하신 거 알지?”
아빠의 물음에 형과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병실에서는 아무도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여전히 팔목이 침대 난간에 묶인 할머니는, 눈을 뜰 줄 모르고 계속 색색거리는 숨만 내뱉을 뿐이었다. 이제는 수액처럼 보이는 맑은 물 뿐만 아니라, 하얀 밀가루 반죽 같은 물도 할머니의 팔에 연결되어 있었다.
“식사 같은 거래.”
엄마는 그렇게 얘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할머니는 엄마의 엄마였다. 그토록 담담한 줄 알았던 엄마의 퉁퉁 부은 눈은 몇 년 만에 봤던 터라, 나도 더 뭔가를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당신 짐 좀 가지고 올게.”
아빠와 형은 그 말을 남기고 먼저 병실을 나섰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엄마의 옆에 서서 멍하니 할머니를 쳐다봤다. 사실 팔에 꽂힌 호스와 묶인 팔만 뺀다면, 또 입고 있는 푸르딩딩한 환자복만 아니었다면 할머니는 평소의 모습과 다를 바 없어보였다. 눈은 감고, 입은 딱 손가락 들어 갈만한 크기만큼 벌리고 주무시는 할머니.
할머니는 늘 그랬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올 때면, 아니면 어쩌다가 정시에 퇴근할 때면 늘 땀에 젖어있는 메리야스 차림으로 부채질을 하고 계셨다. 지친 기색 가득한 눈이면서도, 겨우 몸을 일으켜 나오셔서 식사를 만들어주시곤 했었다.
『망했다.』
그리고 그 날,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면접을 망치고 온 날도 그랬었다. 중요한 일을 치르고 나오면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이었다. 망했다. 언제부터 이런 말이 입에 붙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귀신에게 잡혀갈까봐 아이의 이름을 개똥이나 못난이라 짓는 것과 비슷한 마음으로, 부디 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망했다라고 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가 발표됐을 때 충격을 줄이기 위해 미리 밑밥을 까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 때는 그런 의도와 상관없는 사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는 것이 문제였다. 정말로. 며칠간 밤새워 준비했던 예상 질문, 답변, 거울을 보며 한참 가다듬었던 목소리와 표정. 마음처럼 흘러나온 건 한 한글자도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 내 목소리가 떠오를 때마다 나는 화장실에 앉아있을 때처럼 몇 번이고 몸서리를 쳐야했다.
『잘 보고 왔어?』
열린 방문 너머, 나지막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럼요. 방문을 마저 천천히 열며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요리를 하시던 중이었는지 소매를 잔뜩 걷어붙인 할머니의 손가락 끝에서는 투명한 국물이 뚝뚝 떨어졌다.
『무김치를 좀 담갔다.』
그 때 할머니는 길거리에서 뜬금없이 무를 사오셨다. 백화점도 슈퍼도 아닌 길에서. 어쩌면 할머니보다도 어렸을 아주머니에게, 매연 자욱하게 배었을 무를 양 손에 한 봉지씩 사들고 오신 것이다. 차라리 마트를 다녀오시지 그랬어요, 할머니. 귀찮음과 핀잔이 섞인 그 말에 할머니는 멋쩍게 웃으며 이야기했었다.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 말씀에 차마 토를 달수가 없어서, 나는 냉장고 구석에 자리를 겨우 만들어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동안 냉장고에 있던 그 무는 그 때 겨우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문득 아직도 옷장 한 쪽 구석 가득하게, 또 가지런하게 걸려있는 할아버지의 옷들이 생각났다.
『뭐 집에 있는 게 없어서……. 그냥 담갔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표정은 참 밝았다. 얼마나 열심히 담그셨는지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고 메리야스는 땀으로 범벅인데도, 할머니의 얼굴에는 후련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잘 될 거예요.』
할머니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몇 년 전부터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어두워졌던 얼굴이었는데. 지금 땀범벅인 그 얼굴에 그늘은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다 잘 될 거다.』
조용한 집 안에 힘겹게 끌리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방 안에도 새콤한 김치향이 가득했다. 한 겨울 저녁 여섯시, 해는 이미 기울고 창문 너머 이웃집도 새파랗게 물드는 시간. 꺼져있는 방 형광등 스위치를 누르면서, 나는 이미 뒷모습만 보이는 할머니를 나지막이 불렀었다. 할머니, 김치 한 조각만 달라고…….
“수하야.”
“응?”
“엄마 커피 좀 사주라.”
회상은 엄마의 부름으로 금세 깨졌다. 나는 머릿속에 아직도 맴도는 땀에 젖은 할머니의 모습을 애써 지우고, 엄마를 따라 일어나 병원의 카페로 향했다. 한 손에 사천 원짜리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들고 나서야, 엄마는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너랑 형은 할머니가 다 키워준 거야.”
그 말로 시작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엄마가 태어났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선생님이었던 할머니는, 장녀인 우리 엄마와 둘째인 삼촌을 낳을 때까지, 일과 가정을 놓치지 않고 살아오셨다고 한다. 다만 셋째 이모를 낳은 뒤부터 퇴직하고 집안일에 전념하셨다고. 그러면서도, 당신의 자식들은 스스로 행복한 일을 하라고 가르쳤지, 빨리 취직하거나 가장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강요한 적은 없다고 한다.
“할머니는 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셨거든. 근데 그것도 이모 낳으면서 관두고, 갖고 있던 물감도 다 갖다 버리고 그러셨어.”
“그림 그리셨던 건 몰랐네.”
“티를 안 내셨지. 노래도 얼마나 좋아하셨는데.”
“찬송가는 잘 부르시더라.”
엄마와 나는 간간이 웃음을 터뜨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빠가 짐을 가지러 간지 삼십분 정도 지났을까, 병원의 에어컨 때문인지 차갑게 식은 커피를 들고 있는 엄마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문득 며칠 전 주리 씨와 남 대리님에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엄마. 엄마는 살면서 포기한 거 없어?”
“포기?”
“응. 형이랑 나를 낳으면서 포기를 한 거. 미련이 남는 일이라든지 뭐 그런 거.”
엄마는 부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놀랍게도 그 질문에 씩 웃어보였다.
“아니. 없는데.”
“진짜? 아니 뭐, 애를 낳기 전에 여행을 가고 싶었다든지, 그런 거라도.”
“응.”
엄마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두 아들이 이렇게 잘 커줬는데. 무슨 미련이 남겠어. 너희들을 선택한 거지, 너희들 때문에 다른 걸 포기한 적은 없다.”
“…….”
부은 눈에도 사랑스러움이 녹아들 수 있구나. 어렸을 때라면 낯간지럽다며 도망쳤을 그 눈빛에, 나는 씩 웃으며 답했다. 고마워요, 엄마.
“포기는 할머니가 많이 했지. 나중에 할머니 깨면 한 번 여쭤봐.”
“응, 그럴게.”
남은 커피를 텀블러에 담은 엄마와 나는 다시 할머니가 입원한 병실로 돌아왔다. 어두침침한 6인실에서 노오란 조명 하나에 의지한 채, 나는 아빠가 돌아오기 전까지 할머니를 한 번 더 살폈다. 축 처진 살들, 여기저기 물들은 울긋불긋한 멍, 코 밑에 연결한 호스로 새어나오는 색색거리는 소리.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를 것 같은 할머니의 귀에, 나는 보고싶다는 말을 속삭이고 대답을 기다렸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할머니. 보고 싶어요.
그리고, 며칠 만에 나는 다시 꿈에서 그 남자를 만났다.
“우수하씨, 요즘은 별로 원하는 것이 없는 모양입니다?”
“뭐…….”
남자는 지금까지 수염을 정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수염이 더 지저분해지거나 더 자라지도 않았다. 내 생각에, 처음 본 날부터 지금까지만 해도 손가락 한 마디 정도는 자랐어야 했는데. 그나마 혈색이 더 좋아지고 활기를 찾아가는 모습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사실 그럴 만 하죠.”
나는 왜 그러냐는 듯 대충 턱을 까닥였다. 남자는 책상에 두 발을 올리고 거의 의자에 눕다시피 한 채, 그 늘어진 자세로 나를 쳐다보다가 늘게 말을 이었다.
“수하 씨의 지난 소원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으니까요.”
“주리 씨랑 제일 가까운 사람이 되는 거?”
남자는 손가락을 딱 튕기더니, 검지로 나를 가리켰다. 그거 봐, 사람이 쾌활해졌다니까.
놀랍게도 꿈은 거기서 끝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남자를 만났던 꿈 중에, 나는 가장 악몽을 꾼 것 같은 느낌으로 잠에서 깼다. 새벽 세시, 평소라면 세 시간 더 잘 수 있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로 누웠겠지만, 나는 상체를 일으킨 채 연신 땀을 흘리며 숨을 골랐다. 입에서 나오는 헉헉대는 소리가 내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등 가운데로 물방울이 맺혀 흐르는 느낌이 전해졌다.
정말 나는 꿈에서 그 남자를 만난 걸까? 아니면 단지, 그 남자에게 소원을 하나 더 빌어뒀다는 사실로부터 남겨진 불안감이 만들어낸 꿈이었던 걸까? 그러니까, 어느 쪽이든 이 꿈은 경고였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경고. 나는 죽은 아들을 살려냈다는 원숭이 손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부디 그 포기를 사는 전당포에도 환불 제도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다시 몸을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