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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김주임의 시선(2)

당신의 포기를 삽니다

by 봄단풍


입사한 지 이미 반 년 째.

김 주임은 회사가 썩 쉽지 않았다.


지금도 전화 한 통을 잘못 받아 벌어진 소소한 실수로 장 대리에게 한 소리를 들었던 그였다. 간신히 일을 수습한 뒤에는 다들 담배를 피우러 떠났지만, 가봤자 면목도 없었던 터라 그는 홀로 휴게실로 와버린 것이다. 물론 실수를 저지른 직후라 그렇기도 했지만, 한창 밖에서 내리는 비를 보고 있자니 빌딩 입구 처마 밑에서 애처롭게 담배를 물고 싶지는 않아서이기도 했다.


“여기 있었네?”

“아, 네. 장 대리님.”


휴게실 커피기계에 종이컵을 올려놓은 장 대리는, 커피가 갈리는 동안 김 주임에게 다가왔다.


“정신없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부서 분위기도 안 좋아지고…….”


장 대리는 험악한 얼굴로 김 주임에게 다가와섰다.


“알면, 임마.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녀. 이번이야 내가 어떻게든 커버 쳐주겠는데, 다음부터는 부장님 성격상 진짜 얄짤없다. 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장 대리는 한숨을 푹 쉬고, 김 주임의 어깨를 한 번 툭 치며 말을 이었다.


“내가 깬다고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깨야 그 위 사람들이 널 안 깨, 뭔 말인지 알지? 군대 다녀왔잖아.”

“네. 알고 있습니다.”

“말투만 자꾸 군대 말투 쓰지 좀 말고. 회사지 군대가 아니잖아.”


장 대리는 그 말을 끝으로, 넥타이를 편하게 늘이면서 창문으로 다가섰다. 김 주임은 군대가 아니라는 사람이 왜 군대 분위기를 잡느냐 반문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사회생활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참는 것이 미덕이었으니까. 하지만 김 주임은 이런 순간들이 가장 당황스럽기도 했다. 대화의 공백. 커피 잔이 무거우니 들어드린다고 해야 하나, 말이라도 걸어드려야 하나, 저 때문에 고생이 많다며 사과라도 건네야 하나…….


다행히 김 주임이 몇 초 더 고민하다가 헛소리를 내뱉기 직전, 휴게실 문이 열렸다. 육중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온 건 안 과장과 진 주임이었다.


“……그래서, 제가 진작부터 이건 이렇게 진행하면 어렵다 말씀을 드렸던 건데, 부장님한테 그 말씀은 안하셨더라고요…….”

“아유, 짜증났겠네.”

“짜증도 짜증인데…….”


휴게실에 들어오면서도 높은 목소리로 말을 하던 진 주임은 곧 김 주임을 발견하고는 말을 멈췄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커피기계로 발을 돌렸고, 안 과장은 평소와 같은 기분 나쁜 미소를 띤 채 김 주임에게 다가왔다.


“여기 있었네. 정신없었지?”

“아닙니다. 저 때문에 다른 분들이 고생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안 과장은 살찐 손을 저었다. 봄이 되고 옷이 가벼워지면서, 안 과장의 불룩 나온 배도 셔츠 너머로 점점 도드라졌지만, 오늘 같은 순간에 김 주임에게는 그런 모습조차 인덕으로 느껴졌다.


“입사하고 다 그런 실수는 몇 번씩 하고 그러지 뭘. 나는 삼년차까지도 사수한테 욕 먹고 쪼인트 까이고 그랬지.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아……. 네.”


김 주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홀짝였다. 안 과장은 커피가 차있는 머그잔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그는 뒤 쪽 창가에서 진 주임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 대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장 대리도 일부러 더 가혹하게 하는 거야, 알지? 자기 선에서 야무지게 끊어야 자기보다 위 사람들이 김 주임한테 뭐라 안하니까 그러는 거야.”

“예, 알고 있습니다.”


안 과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김 주임이 방금까지 그랬듯,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넣은 채 멍하니 비 오는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만 그가 바라보는 것이 유리창인지, 혹은 그 유리창 앞에서 장 대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진 주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 거기 있으니까 되게 영화 한 장면 같네.”

“네?”


장 대리는 대번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렸고, 진 주임은 픽 웃으며 손을 저었다.


“무슨 소리에요, 과장님.”

“그냥, 멋지잖아, 배경이. 비도 내리고, 나뭇잎에 물방울 떨어지는 것도 보이고. 커피향도 좋고.”


장 대리와 진 주임은 각자 손에 종이컵 하나씩을 들고 안 과장에게로 다가왔다.


“가만 보면, 과장님이 진짜 감성적인 것 같습니다.”

“나이들면 그렇게 돼.”

“아니, 나이도 나이인데. 원래 남자들은 그런 거 잘 모르잖아요, 비가 오면 비 오는 가보다, 하고 말지. 평소에 일을 잘 하시니까 되게 기계 같을 것 같은데 되게 감성적인 면도 있으시네요.”

“야, 하나만 해, 하나만.”


안 과장은 쑥스럽다는 듯 껄껄 웃었다. 김 주임은 그리고 장 대리의 언변에도 감탄했다. 은근슬쩍 하나를 끼워 넣고 두 가지를 칭찬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김 주임에게는 아직 터득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는 머리 속에 다시 한 번 필기판을 꺼내들고 장 대리의 말을 받아 적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안 과장님이랑 만나는 여자 분은 되게 좋을 것 같아. 일도 잘하고, 로맨틱하고.”

“그러게요.”


장 대리의 계속되는 칭찬에, 진 주임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안 과장의 얼굴에는 어느새 예의 흐뭇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 날도 이런데, 퇴근하고 밥이나 같이 먹으러 갈래?”

“좋죠. 아 근데 과장님 너무 많이 사주셔서……. 오늘은 엔빵하시죠.”

“에이, 야. 노총각 선배가 해줄 수 있는 게 더 있냐?”


안 과장의 말에 작게 환호소리를 내며 호응한 장 대리는, 바로 김 주임을 불렀다.


“김 주임도 가지?”

“예, 가겠습니다.”

“진 주임도?”

“네?”


진 주임은 갑자기 퍼뜩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아까까지 듣고 있었잖아. 안 과장님이 저녁 사주신다는데 같이 가자고.”

“아, 저는 괜찮아요. 남자분들끼리 좋은 시간 가지셔야죠. 저 그렇게 눈치 없진 않아요.”


진 주임은 그렇게 말하며 호호, 하고 웃어 보였다.


“에이, 어차피 같은 홍보팀인데 뭐 어때. 요새 남녀가 어딨어?”

“장 대리님 또 술 드시면 우리 회사 사람들 얼굴 평가할 거잖아요. 저 있으면 그런 거 못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언제 얼평을 했다고……!”

“뭐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있으면 편하게 얘기 못하실 테니까.”


진 주임은 그렇게 말하며, 특유의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김 주임은 마음 속 사회생활의 스승을 진 주임님으로 바꿀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둘 사이의 차이는 기술의 영역이 아니라 각자 타고난 무언가의 영역에서 기인한 것일지 모른다는 걱정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진 주임님처럼 한다고 해서, 같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을 거야…….


“야, 주리야. 한 번 같이 가자.”


욱, 김 주임은 또 다시 어울리지 않는 호칭에서 기인한 구역질을 속으로 참아냈다. 장 대리가 황망히 창문으로 눈을 돌린 사이, 안 과장이 진 주임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과장 이하 실무진 회식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끼리 모인 지 한참 됐잖아.”


안 과장은 특유의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진 주임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 주임은 얼굴에 여전히 눈웃음을 띠운 채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과장님, 눈치도 눈치인데 사실 오늘 좀 피곤해서요. 진짜로 저 빼고 다녀오셔도 돼요.”

“아, 매번 너만 빠지잖아. 언제 먹을 거야?”

“그러면 진아 대리님도 같이 데려가요.”

“아 그……. 그래, 그럼.”

“이거 봐. 진아 대리님은 싫어하면서.”


안 과장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지만, 이미 진 주임의 얼굴에는 다 들켰다는 자신감 있는 표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오늘은 힘들어요. 다음에 꼭 갈게. 대신 대리님도 껴서.”


안 과장은 뭔가 더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가벼운 헛기침만 내뱉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 잘하던 장 대리도 옆에서 입만 다실 뿐 별다른 말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 주임은 안 과장이 왜 이진아 대리를 꺼리는지 이유를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장 대리님과 안 과장님 둘이 힘을 합쳐도 진 주임님 앞에서는 쩔쩔매게 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공기가 싸늘해지기 직전인 애매한 타이밍에, 휴게실 문이 열렸다.


“…….”

“…….”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어……. 김 주임님. 안녕하세요.”


재무팀의 우수하 주임은, 쭈뼛거리며 휴게실 안으로 발을 들여놨다. 아무래도 홍보팀 직원이 넷이나 모여서 분위기를 잡고 있으니, 편하게 들어오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김 주임은 얼마 전 야유회에서 사진 찍던 그를 기억하고 얼른 인사를 건넸으나, 그를 따라 인사를 한 건 진 주임님 뿐이었다.


“…….”


두 사람과 인사를 마친 우 주임은 커피 뽑는 기계를 작동시키고 멀뚱멀뚱 창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동안 장 대리님과 안 과장님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가만히 우 주임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안 과장님의 차가운 표정을 본 김 주임은, 평소와 다른 구경거리가 생길 것을 직감했다.


“우 주임.”

“네?”


안 과장은 인사 대신 우 주임에게 말을 걸었다. 김 주임은 한 걸음 떨어진 뒤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다음 말을 기대했다.


“야유회 때 사진 찍느라 고생했어.”

“아…….”


우 주임은 잠시 눈동자만 굴려 진 주임님을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뒤에,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를 걸어 보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진 주임님이 많이 알려주셔서요.”

“휴일에 나오기 힘들었을 텐데.”

“네, 뭐……. 아닙니다. 아하하.”


우 주임의 멋쩍은 웃음과 함께 대화는 마무리됐다. 안 과장은 픽 웃으며 장 대리와 묘한 시선을 교환했고, 진 주임은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만 홀짝였다.


“재무팀은 근데 벌써 노타이를 하나보지?”

“네?”


우 주임은 황급히 자신의 셔츠를 내려다봤다. 넥타이 없이, 맨 위쪽 단추가 풀린 하얀 셔츠차림의 자신의 상의를 내려다보던 우 주임은 아까처럼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아, 점심 먹고 양치하느라 잠깐 풀었다가 깜빡한 것 같습니다. 사무실에 있어요.”

“그치? 하긴, 박차장님이 공문도 안 나왔는데 그런 걸 허락하실 분은 아닌데.”

“아, 네……. 그렇죠. 아하하.”

“으흠.”


안 과장은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김 주임은 그것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의 말을 꺼내기 위한 준비운동임을 알고 있었다.


“우 주임, 그러면 안 돼.”

“예?”

“박 차장님이 불편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고. 사회생활 혼자 하는 거 아니잖아. 그렇게 은연중에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하는 것도 되게 안 좋은 버릇이야. 조심해야해.”

“…….”


우 주임은 잠시 벙찐 얼굴로 안 과장을 쳐다보다가, 눈을 돌려 장 대리와 진 주임을 한 번씩 쳐다봤다. 별 다른 반응이 없는 두 사람을 한 번씩 슥 쳐다본 그는, 아까보다 확실히 위축된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아……. 예, 죄송합니다.”

“그래. 그리고 아직 복장 공문 안 내려왔으니까 넥타이는 하고 다니고.”

“예. 명심하겠습니다.”


김 주임은 그 몇 번의 대화로, 우 주임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대강 알 수 있었다. 대답이 어려운 말에는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다그침에는 죄송합니다가 입에 벤 사람. 충만한 욕심과 탄탄한 성취욕으로 무장하기보다, 있는 듯 없는 듯, 보이지 않는 보호색으로 무장하고 무리에 자연스레 섞이길 원하는 사람.


김 주임의 판단이 맞다면, 우 주임은 이제 커피를 받고 황급히 자리를 뜰 것이다. 풍경, 사람, 그가 휴게실에 온 이유가 뭐가 됐든, 안 과장과 장 대리는 그에게 휴식을 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 하나, 둘, 셋, 이제 기계가 쪼르르 소리를 내면서 음료를 다 털어내고, 우 주임은 종이컵을 들고…….


그 자리에 서서, 창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특이한 사람 많네.’


김 주임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하긴, 그가 우 주임을 본 건 기껏해야 두세 번 뿐이고, 제대로 밥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으니 모든 걸 맞힐 수는 없지. 하지만, 친하지도 않은 타부서 선배에게 야단을 맞고도 그 자리를 바로 뜨지 않는 건 독특한 행보이긴 했다. 김 주임은 다시 한 번 속으로 경우의 수를 나눴다. 첫째, 휴게실에서만 찾을 수 있는 휴식을 원했을 수도 있지. 우 주임이야말로 아까 장대리가 말했던 감성이란 영역에 정말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 둘째, 혹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찾아왔거나.


우 주임의 눈이 옆으로 움직였다. 흘끗. 그는 모여서 서 있는 장 대리와 안 과장, 진 주임이 있는 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어, 그리고 지금 또!


‘목적이 있었구만.’


김 주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다시금 홀짝였다. 휴게실에 있는 다섯 명의 사람이 아무 말도 안 하는 사이, 김 주임은 혼자 어깨와 가슴을 들썩이며 심호흡을 하는 우 주임을 가만히 쳐다봤다. 옳거니, 뭔가를 준비하고 있구만. 아직 우 주임의 그런 모습을, 다른 세 명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김 주임이 팝콘 뜯는 심정으로 그를 쳐다보기 몇 초. 우 주임은 한 번 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몸을 홱 돌리고 빠르게 걸어왔다.


“저, 주리씨.”


진 주임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려 우 주임을 쳐다봤다. 김 주임은 그 짧은 찰나, 얼굴이 굳어진 장 대리와 안 과장의 얼굴을 발견했다. 아삭아삭, 머리속의 팝콘이 신나게 튀어오를 때 쯤, 우 주임은 마침내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에 뭐하세요?”

“왜요?”


분위기가 싸해질 틈도 없었다. 마치 우 주임이 무슨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진 주임은 기계같은 목소리로 저렇게 간단히 대답을 해버렸다.


“아, 저……. 시간 괜찮으시면 저녁이라도 살까 해서요. 지난 번에 말씀하신 사진도 보여드릴 겸…….”


우 주임의 목소리에는 이미 힘이 없었다. 그는 페이드아웃으로 끝나는 노래마냥, 점점 사라져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마쳤고, 진 주임은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가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대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네?”


우 주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 주임을 쳐다봤다. 진 주임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리고 제가 저녁에는 보통 약속이 많아서요.”

“아, 네…….”


우 주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 대리는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돌렸고, 안 과장은 흐뭇한 미소를 띠우며 우 주임과 진 주임을 번갈아 쳐다봤다. 우 주임은 한 손으로는 종이컵을 든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긁다가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가, 종이컵을 받쳐 들었다가 허공에서 주먹을 줬다 폈다를 반복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여보였다.


“죄송합니…….”

“과장님, 전 들어갈게요. 빨리 퇴근해야해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긴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날렸다. 진 주리 주임은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휴게실을 떠났다. 말을 잃은 우 주임과, 얼굴을 어떻게든 가리려는 장 대리, 흐뭇한 미소를 굳이 우 주임에게 잘 보이도록 띄워놓은 안 과장. 그 셋을 번갈아쳐다보던 김 주임은 손에 있던 커피를 한 번 더 홀짝이며 분위기를 살폈다.


“우 주임.”

“예? 아, 예.”

“오늘 저녁에 시간 있나보지?”

“네?”


우 주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 과장을 바라봤다.


“퇴근하고 밥이나 같이 하지? 오늘 끝나고 일도 별로 없나본데.”

“네?”

“사줄게. 원래 다른 부서는 잘 안 챙겨주는데, 특별히 챙겨주는 거야. 일 없지, 오늘?”


우 주임은 계속 눈을 깜빡일 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누군가 구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여기저기로 눈을 돌리던 그는, 결국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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