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다연(2)

by 봄단풍

“흐어, 으어....”


나는 벌벌 떨면서 여자를 안은 채 어느 아파트 옥상 난간으로 기어올라갔다. 여자는 정신을 잃은 것인지 눈을 감고 있어서 데리고 순간이동을 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만 중력이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무서웠을 뿐이지.


“저기요, 저기요!!”


옥상에 올라오자마자 나는 여자를 눕히고 상체를 일으켜 안았다. 여자는 눈을 감고 숨을 겨우 몰아쉴 뿐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숨을 쉬는 걸 보면 큰일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온통 젖어서, 지금처럼 추운 날씨에 바깥에 오래 있으면 좋을 게 없었다.


사실 물에 빠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가 뒤로 떨어지기만 했었어도! 내 순간이동 능력의 특징 중 하나는 이동 직전의 운동에너지가 무시된다는 거다. 이를테면, 엄청나게 빠르게 뛰다가 순간이동을 하더라도 새로 이동한 곳에서는 멈춰있게 된다. 떨어지다가도 벽 난간이든 어디든 순간이동을 하면 정지된 상태로 새로운 곳에서 나타나는 거다. 내가 지금까지 건물 사이에서 돌아다닐 때 스릴을 즐길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덕분이었다. 떨어질 때 가속도가 붙더라도 순간이동만 한다면 잠깐동안 정지상태가 되니 부딪히거나 다칠 염려도 없었다. 물론 가속도가 너무 많이 붙어서 어딜 보든 초점을 맞추기가 어려워지면 끝이지만.


다만 지금은 하필 위에서 아래로 쳐다보고 순간이동을 하다보니 바로 앞에 강이 보였을 따름이다. 공중에서 잠시 멈춰있더라도 다시 뒤를 돌 정도로 시간이 많이 생기지는 않으니 결말이 입수였을 뿐.


“저기요, 계세요? 아니, 저기 뭐야. 정신차려보세요! 저기요?”


아무래도 그 자리에서 떨어질 작정이었다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겠지. 나는 황급히 자켓을 벗어서 여자에게 둘러줬다. 온통 젖은 여자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하......”


그냥 아무 병원 응급실에나 내려놓고 올까, 파출소 앞에 내려줘야하나, 온갖 고민을 하다가 문득 생각이 집에 다다랐다. 어차피 할머니도 계시고 하니 그게 나을수도 있겠다.


[일반인들이 너에 대해 알면 네가 안전 하겠냐?]


아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래, 정작 급하게 해결방안을 찾다보면 가장 중요한 걸 놓치는 법이다.


“왜 그랬어요......”


그 때였다. 눈을 감고 있던 여자가 말을 꺼낸 건. 그녀는 추워서 벌벌 떨리는 입술로 그렇게 말을 한 뒤에 천천히 눈을 떴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는 구한 다음 곧바로 도망만 쳐와서 정작 구조된 사람과 대화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왜 구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나를 원망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아니, 저......”


일단 다짜고짜 입은 열었는데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내가, 내가 얼마나......”


여자는 한참동안 목에서 막히는 듯한 소리를 내며 숨을 참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용기를 낸 건데!”


그리고 여자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마치 막혀있던 수도관이 터지듯이, 그녀는 있는 힘껏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 저.......”

“흐, 흐아아앙... 허어어어엉!!”


한참을 망설였다. 하다 못해 어깨라도 두드려줘야 하나, 아니면 멈추라고 윽박질러야 하나, 기껏 목숨을 살려줬더니 왜 역정이냐고 따져볼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여자를 앉혀놓은 뒤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머쓱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여자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행동을 하나 더 취했다.


“그냥 죽을 거야!!”


내가 채 말리기도 전에, 곧장 옥상 난간으로 달려간 것이다.


“그냥 죽을래요, 죽을래! 죽을 거야!”

“아니, 미쳤어요? 저기요, 저기요!”


아무리 자살을 마음 먹었다 쳐도, 기적처럼 살아난 이후에 다시 자살을 시도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순간이동으로 겨우 난간 앞에서 붙잡았지만, 여자는 계속 내 팔을 뿌리치고 난간 너머로 몸을 던지려했다.


“잠깐만!”

“흐아아아아앙!”




여자가 진정된 건 그로부터 한참이 더 지나서였다.

며칠을 굶기라도 했는지 워낙 힘이 없어서, 여자와 나와의 실랑이는 사실 몇 번의 공방 만으로 마무리가 됐다. 하지만 울음을 터뜨릴 체력은 남아있던 것인지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목청껏 울어버린 것이다. 부디 아무도 듣지 않기를 빌며, 나는 그 여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 대화를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그로부터 한참 뒤. 마침내 울기도 지쳤는지 여자는 몇 번이고 자신의 소매자락으로 얼굴을 비벼 눈물을 닦았다. 그러고 나를 곁눈질로 쳐다보다가, 잔뜩 빨개진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요.”


마침 쪼그리고 앉아서 무릎도 아팠던 터라, 나는 옥상 바닥에 다리를 펴고 주저앉았다.


“그, 제가 그 쪽 사연은 잘 모르지만 기왕 살아났으니 기회라고 생각하고 한 번 버텨봐요.”

“......”

“아니, 미안해요. 그...... 그치, 사연을 모르니까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아무튼, 저. 혹시 다시 시도를 하더라도, 일단 저 없을 때까지는 생각을 좀 해보시고......”

“고맙습니다.”


내가 어영부영하는 사이 그녀는 앉은 채로 내게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알 수 없는 한 마디.


“이렇게 울어본 것도 진짜 오랜만이에요.”

“......”


정말로, 순수하게 다음 말을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대화를 멈춰버렸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어깨를 한 번 으쓱해보인 나는, 마스크가 얼굴에 잘 붙어있는지 확인하면서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려고 했다.


“울고 나니까 좀 개운하네요.”

“그래요, 그...... 어찌됐든 나아졌다니 다행이네요.”

“아저씨, 아저씨가 그 사람이죠? 사고 때마다 나타난다는 사람.”


일어나려던 무릎이 멈췄다. 뭐라고 대답할까 잠시 고민한 나는, 공백이 길지 않게 느껴지길 바라며 얼른 입을 열었다.


“누구...... 그런 사람이 있어요?”

“맞잖아요. 며칠 전에도 뉴스에도 나왔던 그 사람.”


여자는 어느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괜히 마스크를 손으로 한 번 만지작거렸다.


“몰라요. TV에서 그런 얘기를 해요?”

“네. 유튜브도 몇 개 뜨던데.”


방금 전까지 그렇게 죽겠다고 성화를 부리고, 거의 몸에 있는 수분을 내 빼낼 것처럼 울어제끼던 사람이 갑자기 생글한 표정으로 나에 대해 따지고 들자 기분이 이상했다. 진짜 울고 나서 속 시원해져서 원래 성격이 나오는 건가?


아무튼 휘둘리면 안 된다. 모처럼 아라가 마스크도 줬는데, 고작 이런 일에 발목을 잡혀서 구조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면 아라를 볼 면목이 없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보니까 괜찮아진 것 같네요. 저는 그럼......”

“제 얘기 잠깐만 들어주실래요?”

“예?”


여자는 여전히 난간에 등을 대고 앉은 채, 자신의 두 무릎을 양 팔로 껴안고 나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붓고 눈물자국이 아직도 흥건했지만, 눈에는 어느새 초롱한 빛이 돌아와 있었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되긴 했을까 싶은 앳된 얼굴의 여인.


“울고 나니까 시원한데, 생각을 정리해야할 것 같아서요. 누가 옆에서 얘기라도 들어주면 좀 좋을 것 같아서.”


여자는 그렇게 얘기하고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그러면서도, 두 눈만은 빼꼼 꺼내서 나를 계속 올려다봤다.


“잠깐만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머릿속에서 아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닥치고 얼른 나오라고, 그냥 먼 곳 보고 눈 한 번 깜빡이면 되는데 왜 그걸 못하냐고.


‘하지만......’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눈만 깜빡이면 보이는 곳으로 순간이동하는 능력, 이 능력에 진정한 의미가 생긴 건 남을 돕겠다는 아이디어가 합쳐지면서부터다. 물론 아무나, 정확히는 아무도 할 수 없는 능력이니 거창한 일을 해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사람을 살리는 건, 그런 거창한 능력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스톱워치를 켜서 시간을 설정하고, 코트 앞섬을 여미면서 여자의 옆 바닥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엉덩이를 붙였다.


“십 분이에요. 딱 십 분.”

“고마워요.”


슬쩍 곁눈질로 쳐다본 곳에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띄운 여자가 있었다. 오늘 처음 보는 여자, 겉으로 보기엔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외모의, 뽀얀 피부와 갈색 머리카락의 여인.


‘아니, 아니. 그것 때문이 아니야.’


집중하자, 최대한 정성껏 귀담아 들어주자. 대신 절대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그냥 제 삼자의 시선으로 들어만 주는 거다. 그것만으로도 저 사람이 다시 살겠다는 의지를 찾을 수 있다면 내가 지금까지 능력으로 인명을 구조한 것만큼 위대한 일이 될테니까!


“그거 완전 개자식들이네!”


하지만 여자의 말을 전부 듣고 난 다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화가 나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이름이 이다연이라고 소개한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면서 코를 한 번 훌쩍였다.


“아니 그러니까, 아니, 잠깐. 그러니까 요약을 해보면......”


아직도 얼굴에 남아있는 눈물을 닦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나는 단어 하나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러니까 그 쪽이 작년 말에 그...... 뭐,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했다가 탈락을 했다는 거죠?”

“네.”

“그래서 마지막에 뽑힌 일곱 명이 요새 TV틀면 나오는 그 팀인 거고.”


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채점결과가 조작됐고 실제로는 그 쪽이 데뷔했어야했다, 그거죠?”

“맞아요.”

“그런데 왜 가만히 있어요? 어디 올리거나 따지기라도 하지!”


다연은 우울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증거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네, 붙은 애들 중에 미션곡을 먼저 알고 있었던 애들도 있었고, 촬영할 때 코빼기도 안 비췄는데 방송에는 매 주 십분 이상 나온 애들도 있었고요. 뻔하잖아요.”

“그 쪽이 원래는 데뷔했어야 한다는 건 어떻게 알고?”

“최종 생방송 투표 가기 전까지는 제가 종합평가 5위안에 들었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라뇨? 매 주 평가에서도 10위 권 밖으로 떨어진 적이 없어요! 종합평가도 5등이었고. 생방송 투표에 몇 명이 가는 줄 아세요? 스무 명이에요. 계속 한자리 등수 유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방 전 마지막 평가에서 딱 21등으로 탈락하는게 말이 돼요?”


다연은 다시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분명 처음 듣는 곡인데 벌써 안무를 짜온 애가 있어도 가만히 있었어요. 화장실에서 어차피 자기네들은 붙을 거라면서 호호거리던 말을 훔쳐 들었어도 못 들은 척 했었어요. 몇 주만에 핸드폰을 쓰게 해줘서 가족이랑 통화하다가, 방송에 많이 안나와서 아쉽다는 얘기를 들었어도 그러려니 했어요.”


어느새 그녀는 겨우 참았던 눈물을 다시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제 뒤통수를 때릴 줄은 몰랐죠! 그렇다고 이걸 따질 데도 없고, 따져봤자 승부에 승복 못하는 어린 애가 되어있을 뿐이고, 하......”


감정이 북받쳐 말이 막히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나는 다음 이어갈 말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막상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막상 그 프로그램을 챙겨본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해서 저 아이돌 그룹이 나왔구나, 정도만 알고 있던 입장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하긴, 취업할 때도 내정자 정해놓고 공개채용이라고 하면 진짜 역겹긴 하죠.”


다연은 그것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을 참을 여력밖에 없는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한 손으로 가슴 언저리를 움켜쥔 채 숨을 골랐다.


“최종 면접이라서 갔더니 나한테는 무슨 수익구조 다변화 방안에 대해 얘기하라고 하고, 다른 사람한테는 살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나 물어보고. 난 처음에는 내가 잘 해서 그런 줄 알았었거든요.”


푸핫, 하고 다연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어서, 나는 몇 마디 덧붙이기로 마음 먹었다.


“이해 되네요. 따지기도 애매하고 따질 데도 없고, 확실하게 이상하다고 보기도 애매해서 괜히 내 탓밖에 할 게 없고.”

“확실하게 이상하다니까요!”

“아, 맞아요. 그래그래. 그건 경우가 다르네, 나랑.”


잘 듣던 다연은 버럭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진정이 된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숨을 몇 번 고르더니 곧 똑바로 눈을 떴다.


“증거만 있으면 되는데.”

“있으면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당연히!”


그녀는 그 큰 눈을 껌뻑이며 나를 쳐다봤다. 아이돌을 준비했기 때문일까, 눈물이 흥건하고 팅팅 부은 얼굴인데도, 분명 다연은 평소에 쉽게 마주치기 어려운 미모였다. 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 진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는 쌍커풀에 잘 정돈된 눈썹까지. 타고난 것보다도 스스로 관리를 오랜기간 잘 해온 느낌.


“당연히......”


그 큰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 위로 스멀스멀 물이 차오르더니, 이내 김 서린 차창 위로 빗방울 떨어지듯이 또르르, 한 방울이 굴러떨어졌다.


“모르겠어요......”

“......”

“그냥 다 망했으면 좋겠어요. 아니, 그래도 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걔네들도 다 열심히 한 애들인데......”


훌쩍거리면서 몇 번이고 근데, 그런데를 몇 번이고 반복하던 그녀는 겨우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걔네는 어떻게 되든 상관 없어요. 그냥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네. 그냥 그 팀이 떳떳하지 않다는 것만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 때, 문득 떠오른 의문을 참지 못하고 나는 툭 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사람들이 좋아하면?”


그건 충동이었다. 마치 내 안에 뭔가가, 그게 오히려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냐며 혼자 덥석 말을 해버린 기분. 말을 그치고 나서야 나는 그 질문이 다연을 다시 울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침착했다. 눈물도 닦고 한숨을 푹 내쉰 다연은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겠죠. 상관 없어요, 그냥...... 알리고만 싶어요.”

“방송사가 미리 뽑아놓고 오디션을 통과한 것처럼 포장한 그룹도 있지만......”

“......거기에 들지 못했어도, 열심히 제 몫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거. 네, 그거요.”


말이 통했다는 듯, 다연은 부은 눈으로 희미하게 웃으며 날 쳐다봤다.

이 타이밍에 할 생각은 아니지만 솔직히 예뻤다. 아니 마음이 동한 건 아니고 그냥 객관적으로. 왜, 배우나 아이돌은 이미 할만한 사람의 관상이 다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누가 보더라도 참 예쁘게 잘 자랐다 싶은 사람, 저 사람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살아야겠다싶은 사람.


“후우......”


다연은 다시 한 번 얼굴을 비비듯이 닦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이제 안 죽을게요. 아저씨 가셔도 돼요.”

“정말로?”

“네...... 아니요.”


다연은 또 다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짜 다 죽여버리고 싶다.”

“......”

“......아니 그냥 죽고 싶어요......”


드라마틱한 감정 기복이었다. 사실 서류합격에 몇 번이나 탈락한 입장으로는 이게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만큼 힘든 일인지는 완벽하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어느정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인생을 바쳐서 준비한 일일텐데 부당한 결과를 받았고, 그리고 일년 동안 그 합격자들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모습을 지켜봤을테니까. 따지고 싶지만 따질 곳도, 따질 만한 근거도 없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으니, 억울하다고 매달려봤자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 결과가 이상하다는 걸 증명할만한 건 없어요?”

“없어요. 그냥 심사위원 평가가 생방 직전에 좀 갈렸다 정도인데, 그것도 데뷔 성공한 애들 위주로 방송이 계속 흘러가니까 그만큼 애들이 성장했다는 식으로 넘어가고......”


다연은 다시 또 한숨을 내쉬었다.


“문자 투표도 조작했겠죠, 아니,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지. 애초에 나올 애들만 방송을 많이 탔으니 사람들도 그 애들 위주로 찍었을 수도 있고.”


어째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답이 없어보였다.


“하다못해 생방 전 마지막 평가표만이라도 봤으면 좋겠는데.”

“그게 있으면 달라져요?”

“아뇨. 그냥 죽을래요.”


다연은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 그렇게 웅얼거렸다.


“아니, 그러지 말고. 왜, 평가표가 있으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그냥 들은 게 있어서 그래요. 근데 있어도 소용 없어요.”


누가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가 아닐까봐 사람 안달나게 하네, 정말. 나는 참지 못하고 다연을 추궁했다.


“왜요. 왜, 뭔데 그래요.”

“어차피 그걸 볼 방법도 없고..... 후우.... 왜, 왜 막았어요, 아저씨. 그냥 아까 죽어버릴 걸.”

“아니, 잠깐만.”


나는 황급히 그녀의 옆에 주저앉아 어깨를 붙들었다. 다연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고,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니, 뭔데 그러냐고요. 생방 전 평가표가 있으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어차피 그 쪽 말대로면 평가 결과 자체가 공정하지 않았으니까 그걸 찾아도 증거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다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했다.


“원본이 따로 있다고 들었어요.”

“원본?”

“원본이요. 심사위원들이 제대로 평가했던 원본.”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대요? 아니, 그리고 그건 어떻게 알았는데요?”


다연은 다시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것인지, 그녀는 곧 눈만 빼꼼 내놓고 먼 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들었어요. 친한 언니한테서.”

“친한 언니? 방송사 직원이에요?”

“프로그램에 같이 참가했던 연습생이에요.”


다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내 쪽으로 눈을 돌렸다.


“전화통화를 들었대요. 원본은 들켜선 안 된다, 그렇다고 파기하면 절대 안 되니까, 밀봉해서 잘 보관하라고. 스캔도 떠 놓고, 하드에도 담아서 보관하라고, 그런 전화통화를 들었대요.”

“확실해요?”


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개가 되면 안 되지만, 나중에 누가 입닦을 수도 있으니 보험용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도 했어요.”

‘자세하게도 들었네.’


그녀는 무릎 위로 겨우 눈만 내놓은 채 나를 쳐다봤다. 그 와중에도 훌쩍이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나는 물건을 툭 던지듯이 말을 꺼냈다.


“내가 그걸 가져다주면. 어떻게 할 거에요?”

“당연히......네?”

“내가 그 평가표 원본을 가져다 주면 어떻게 할 거냐고요.”


다연은 처음으로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훌쩍이면서 코를 잔뜩 먹고, 눈을 몇 번이고 훔치던 그녀는,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아저씨가 가져다 줄 수 있어요?”

“아니......”


갑자기 울컥 이상한 감정이 솟았다. 짜증인지, 화인지, 아무튼 생각나는 대로 마구 지껄였다.


“죽으면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잖아요. 화를 낼 수도 없고, 사과를 받지도 못한다고. 그러니까 일단 그것부터 말해봐요. 가져다 주면 어떡할 거에요?”


다연의 눈에 처음으로 힘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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