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 나왔습니다.”
“제가......”
“아니, 넌 앉아 있어.”
한서아씨는 의자를 벌컥 뒤로 밀어내면서 커피를 가져왔다. 그리고 다시 드르륵 소리를 내면서 의자를 끌고와서 앉고는, 다리를 꼬고 뒤로 눕듯이 앉았다.
“......”
“......”
“......”
한서아씨는 차가운 커피를 입으로 반 컵이 넘게 들이켰고, 최무혁씨는 뒤로 가지런히 묶은 머리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며 커피를 눈으로만 보고 있었다. 그 사이 나는 빨대로 한 모금 축이면서 슬쩍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여기저기 흠집이 난 스키니진과 몸에 딱 붙는 하얀 니트, 검은새 가죽 자켓에 뒤로 풀어헤친 생머리까지. 한서아씨의 첫 인상은 ‘기품있다’라는 말이 어울렸다. 동양풍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배우처럼 화장기 없이도 보드랍고 하얀 피부와 쌍커풀없는 눈, 빨갛고 작은 입술까지. 물론 그녀의 외모와 그녀가 보이는 태도는 현저히 달랐다. 입으로는 얼음을 아그작아그작 씹으면서 가만히 최무혁씨를 노려보는 건, 그래, 굳이 따지자면 영화에서 몇 번이고 재탕되는 ‘감으로 일하는 형사’ 캐릭터의 느낌.
세일그룹 소속의 연구소장이라는 최무혁씨야 말로 오히려 공무원 같았다. 반복되는 업무로 지친듯한 표정과 다크서클, 그러나 그 아래에 테없는 안경과 깔끔하게 다듬은 수염. 의사같은 하얀 가운 아래에 셔츠와 넥타이 사이에는 넥타이 핀까지 정갈하게 꽂혀 있었고, 군인처럼 셔츠 선과 벨트 버클의 선, 바지의 지퍼 선까지 일자로 딱 맞게 입고 있었다. 그나마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색다르다면 색다른 부분이었지만, 그마저도 새어나오는 머리카락 없이 깔끔하게 뒤로 모아서 묶고 있었다. 그래, 굳이 따지자면 ‘밤에는 재즈 락 카페에서 통기타 라이브를 하는 15년차 과장’의 이미지.
‘그런데 요새 회사에서는 남자가 머리 저렇게 길러도 되나......?’
아무튼 정작 공무원같은 사람은 사기업 연구소 소속이고, 내키는 대로 살아온 것 같은 깡패같은 사람이 공무원이라는 묘한 상황.
“아, 커피 진짜. 쓰기만 하고 맛대가리 없네. 원두 좀 좋은 것 좀 써라.”
“커피는 원래 써.”
“아 예. 그래서, 그럼 누구부터 할래?”
그 사이 커피를 한숨에 들이킨 한서아씨는 곧바로 말문을 열었다. 최무혁씨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그 말을 받았다.
“일단 우수하씨에게 설명부터 하지.”
“아, 그렇지.”
한서아씨는 자리에 앉은 이후, 처음으로 최무혁씨를 노려보던 눈을 거두고 나를 쳐다봤다. 생긋 웃는 모습이 어째 방금 전까지 보이던 호전적인 태도와 너무 달라서 나는 몸을 움찔했다.
“일단 미안하다 수하야. 내가 갑자기 쫓고 그래서 놀랐을텐데.”
“아, 아닙니다. 괜찮아요.”
일단 그렇게 대답했다. 아까 보안요원 수십 명이랑 맞서려고 팔 걷어붙일 때부터 한서아씨가 어떤 성격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너, 특별한 능력이 있지?”
“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절대 들키지 말라는 아라의 잔소리가 머릿속에 울려퍼졌지만 금세 메아리처럼 멀리 사라졌다. 이미 두 사람의 표정만으로도 숨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것이다.
“수하씨가 공간이동 능력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능력 때문에 저희가 수하씨에게 접촉을 한 것이기도 하고요.”
“아, 예......”
이번에는 최무혁씨가 그렇게 말을 받았다. 이제 더 이상 숨길 것도, 재볼 것도 없다.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
“수하씨가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저희 세일그룹에서도 잘 지켜봤습니다. 주로 사고현장에서 사람을 구하는데에 쓰셨죠?”
“어, 예. 그렇긴 한데......”
“엄밀히 말하면 바로 그 점 때문입니다. 저희가 우수하씨를 저희 세일그룹의 연구원으로 모시려는 건 바로 그 성품과 태도 때문이죠. 다른 사람이었다면 일단 돈벌이부터 생각했을 귀한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생명을 구하는 일에 사용한다는 것. 수하씨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순간이동 능력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인성입니다.”
진짜로 엄밀히 말하면 사실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서 일단은 드러내지 않았던 거고, 이 능력으로 수익구조를 짜는 게 머리아파서 일단은 좋은 일에 쓰자, 였을 뿐이지만.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앉은 자세를 똑바로 했다.
“그래서 저희 세일그룹은, 수하씨에게 저희 방위 산업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드리려고 합니다.”
“예?”
잠깐 머리가 멍해졌다.
세일에서? 다른 회사도 아니고 세일그룹에서?
“저, 그런데......”
머리가 한 순간 멍해지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묘한 방어기제가 발동하기 마련이다. 내 입은 그렇게 불쑥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 오늘 그럼 면접은......”
그리고 그렇게 불쑥 내뱉은 말은 보통 바보같은 말이곤 하지. 최무혁씨는 조금의 표정변화도 없이 나를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처음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면접은 진행할 겁니다. 그냥 간단한 인성 검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수하씨를 면접이라는 구실로 모셨던 건 보안의 일환이었으니, 그 점은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아, 예.”
“그리고 그건 개소리니까 곧이 곧대로 들으면 안 되고.”
이제 한서아씨가 다시 끼어들 차례였다. 슬쩍 최무혁씨를 쳐다보니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한서아씨에게 계속하라는 손짓을 하고 안경을 벗어서 닦기 시작했다.
“세일만큼 뒤가 구린 회사도 없는 거 알지? 노조도 없어, 하청업체 후려쳐, 공장 노동자 질병에는 책임없다고 잡아떼, 얼마 전에 여기 부사장이 뇌물 건으로 잡혀들어갔지. 애초에 너를 지켜봤다는 것도 불법이잖아, 그치?”
“부사장은 아직 수사중이고, 재판 결과는 나오지도 않았어.”
“이제 부사장님이 아니라 그냥 부사장이야? 그새 뭔 일 있었나보지?”
“괜히 멀쩡한 회사 헐뜯지 말고 수하씨에게 할 말만 해.”
“남이사 헐뜯든 말든. 애초에 그 쪽이 깨끗하게 일했으면 되잖아?”
서로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몇 마디를 순식간에 나눈 둘은 동시에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최무혁씨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한서아씨는 아직도 단단해보이는 각 얼음 하나를 와그작 씹어먹고. 그녀는 입에 얼음이 다 부서지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말을 시작했다.
“나는 경찰청 특수수사팀, SIU 소속이야. ‘시우’라고 읽어.”
‘시우......?’
“아무튼, 우리도 얼마 전부터 네가 활동을 시작한 걸 확인했고.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찾아온 거야. 연락하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네가 지금까지 보여준 조심스러운 성격 때문에 잠적을 하거나 아니면 사고를 칠까봐 내가 직접 잡으러 온 거지.”
“잡으러요?”
“그래. 잡아야 뭐 얘기를 할 거 아냐. 도망도 잘 치더만.”
친절하게 설명하다가도 툭툭 튀어나오는 표현이 어째 친절함의 궤도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었다. 경찰청이라면...... 사실, 그 이름만 듣고도 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것인지, 내 능력을 어떻게 쓸지 감은 왔다. 다만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었다.
“혹시 저 체포되는 건가요?”
“아니, 인마. 같이 일을 하자고. 체포가 아니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한 번 위 아래로 훑어본 뒤 말을 이었다.
“사실 그럴 수도 있긴 했지. 니가 사고 쳤으면. 근데 워낙 네가 사고도 안 치고, 도망도 잘 치고 조심스럽기도 해서 일단 체포 말고 잡아서 얘기부터 하기로 됐다.”
아라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다. 확실히, 내가 하고싶은대로 다 했었으면 이미 수갑차고 철창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구나.
‘응?’
근데 잡고 얘기를 하는 거랑 체포가 많이 다른 건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은데?”
“남이사 무슨 말을 하든. 그 쪽처럼 거짓말은 안 해.”
“혼란스러운 상황에 있는 사람을 섭외하는 것치고는 너무 배려가 없어보여서. 그래서 한 번 짚어준 것 뿐이야.”
“당신이나 신경쓰는 척 좀 하지마. 그리고 그새 감을 잃었나본데.”
한서아씨는 갑자기 의자를 앞으로 당겨앉으며 최무혁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반말이야?”
“한서아씨야 말로 현장에서 너무 오래 굴러서 감을 잃으셨나본데.”
최무혁씨도 한서아씨를 똑바로 마주봤다. 한서아씨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표정을 지은 것에 반해,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여기가 어딘지 몰라?”
그 말과 함께, 카페에 앉아있던 손님들이 전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 군데군데 정장 차림의 보안요원들이 서 있긴 했지만, 이제보니 손님처럼 앉아있던 사람들도 전부 세일그룹의 직원이었던 거다!
“워......”
소름돋는 풍경에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었다. 문제는 한서아씨였다. 그 모든 분위기를 읽었으면서도, 그녀는 최무혁씨를 노려보는 눈에서 조금도 힘을 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목을 좌우로 돌리면서 뚜둑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 그래, 여기서 뒤지고싶다고?”
“그, 그......!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아무 말이나 던졌다. 그럴 능력도 계획도 없으면서, 일단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쇄신하고자 나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을 걸었다.
“두 분은 사이가 원래 안 좋으신가요?”
“......예?”
“......뭐?”
기계같던 최무혁씨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서렸다. 그와 비슷하게, 한서아씨의 얼굴도 황당하다는 듯 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니, 그...... 아니면 그 세일그룹하고 시우라는 팀은 원래 사이가 안 좋은 건가요?”
최무혁씨와 한서아씨는 슬쩍 서로를 쳐다봤다. 마치 서로에게서 답을 찾으려는 것처럼. 그리고 둘은 동시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최무혁씨는 어딘가에 대답을 숨겨놓기라도 한 듯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봤고, 한서아씨는 허공에 할 말이 떠오르기라도 한 듯 계속 입을 달싹거리면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니, 그게 왜 궁금한데?”
결국 먼저 말문이 트인 건 한서아씨였다.
“아 그, 혹시......”
입을 떼자마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꽂혔다. 뭔가 바보같은 질문을 해서 양 쪽 모두에게 점수가 깎인 건가, 이러다가 둘 다 채용을 취소하겠다 이런 대답이 나오는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느 한 쪽으로 가면 제가 반드시 다른 쪽의 미움을 사게 되는 상황인가 걱정이 돼서요. 그..... 저야 취준생이고 뭐 이런 경험이 많이 없어서 잘 모릅니다. 아니, 뭐야, 그...... 그게 어찌됐든 이런 분위기에서 제가 무조건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거면 그 다른 한 분께 너무 죄송스러울 것 같아서요.”
“아하, 그건 걱정하지마.”
한서아씨는 팔짱을 끼면서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시우(SIU)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세일은 너한테 손가락 하나도 못 건드릴테니까. 아무리 뒤에서 구린 짓을 많이 해도 비빌 언덕도 가리고 똥오줌도 가리거든.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버티고 있지.”
“저희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연히 직원으로서 채용하는 것이니 대우해드릴 수 있는 최선의 조건으로 대우해드리겠습니다만, 저 쪽에서 상식 밖의 방식을 시도한다면 저희로서도 방법이 없습니다.”
“지랄하네. 상식밖의 짓은 뒤에서 자기들이 더 하죠?”
이쯤되면 그냥 받아들여야한다. 이십대 후반, 많아야 서른 초반으로 보이는 한서아씨가 사오십대까지 보이는 중년의 최무혁씨에게 반말을 하는 건 그렇다치더라도, 애초에 둘 사이에 뭔가 엄청난 사연이 있는게 아니고서야 제 삼자 앞에서 이렇게까지 티격태격할 리가 없었다.
‘아니 그건 그렇고, 애초에 답변 내용이 질문의 취지랑 다르잖아.’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내가 어느 한 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 쪽에서 나에게 해코지를 할 것이 정상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어떻게 선택하라고?
“혹시 그럼 제가 세일그룹에 들어가면 무슨 일을 하는지...... 좀...... 알 수...... 있을까요?”
괜히 말 끝을 맺기가 힘들었다. 면접 준비를 하면서 아라에게 무조건 끝 말을 얼버무리지 말고 확실하게 대답하라고 배웠는데. 정작 두 기관의 담당자를 만나보니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꼭 예의에 어긋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대신 대답해줄게. 너 세일로 가면 실험이나 당하다가 버려질 거야.”
“실험이요?”
예의고 뭐고 고개가 최무혁씨 쪽으로 홱 돌아갔다. 오히려 바로 뒷말로 욕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내 태도의 변화에도, 최무혁씨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하죠. 수하씨의 능력을 통해 어떤 유의미한 가치를 창조해낼 수 있는지를 알아봐야하니까요. 물론 철저히 법의 테두리 안에서 진행할 겁니다. 저희 연구소 정직원으로 채용하는 것이니 현행 노동법을 토대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사회보험에도 가입하실 겁니다. 현대 연구 윤리에 어긋나는 실험은 진행하지 않을 거고요. 장기적이든 단기적이든 우수하씨의 건강과 안위에 위해가 생기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고, 연봉과 보너스를 포함해서, 누릴 수 있는 복지는 국내 어떤 기업에 비해도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한서아씨 쪽으로 돌아갔다. 연봉이란 말에 잠시 흔들리는 듯한 그녀였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씩 웃으면서 그녀는 내 눈을 받아냈다.
“우린 연금 나온다.”
뭐라 반박할 새도 없이 최무혁씨가 다시 말을 이어받았다.
“우선 세일그룹에 입사를 결정하시게 되면 곧바로 연수에 들어가실 겁니다. 당연히 공개 채용 신입사원분들이 받는 기초교육을 이수하시게 되고, 그 다음에는 연구소에서 저희와 함께 일하게 되죠.”
“아, 바로요?”
“네. 오늘 바로.”
“그럼 제가 시우(SIU)로 가게되면......”
“우리도 바로 훈련 들어가야지. 우리는 그래도 좀 나아. 내가 내일 아침에 직접 데리러 올테니까.”
갑작스러웠다. 면접도 서류발표 바로 다음날에 하더니, 이제는 당장 오늘이나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소리다. 세상에, 엊그제까지만 해도 면접만 불러줘도 감지덕지한 학부 예비졸업생 나부랭이였는데, 이제는 당장 오늘이나 내일부터 직장인이 되어야 한다니!
‘아저씨가 가져다 줄 수 있어요?’
하필 그 목소리가 떠오른 건 그 때였다.
‘가져다 주면 어떡할 거에요?’
하필 그 모습이, 눈물로 퉁퉁부은 눈을 빛내면서 나를 올려다보던 다연의 모습이 떠오른 건 그 때였다.
‘안 죽을 거에요. 절대로.’
“아, 아!”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을 겨우 붙잡은 나는, 최무혁씨와 한서아씨를 번갈아 쳐다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 그, 정말 죄송한데...... 혹시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