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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면접(4)

by 봄단풍

“놀래라 인마. 그래, 편안히 생각해. 난 오늘 저녁때까지도 기다릴 수 있어.”

“세일그룹은 오늘 자정까지도 가능합니다.”

“유치하게구네. 아저씨, 난 여기서 밤 샐 수도 있어.”

“정부 소속이면서 유치한 건 그 쪽이 더......”

“아, 아뇨.”

나는 처음으로 두 사람 앞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제가 개인적으로 마무리할 일이 있어서요. 딱 한 달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공기가 변했다. 내가 첫 질문을 꺼냈을 때와는 또 다르게 이번에는 주위가 전부 얼어붙는 느낌.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하면, 최무혁씨와 한서아씨가 다 눈을 내게서 조금도 떼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서로를 노려보지도 않았다. 그 둘은 내가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한 것처럼, 쏘아보는 눈으로 나를 동시에 노려보고 있었다.


“야, 야. 지금 상황이 그렇게......”

“네, 상황은 이제 대충 알겠어요. 처음엔 좀 헤매긴 했는데, 사실 이 능력을 갖게 되면서부터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도 했었고요.”

“그래?”

“네, 좋은 친구가 있어서요. 그런데......”


한서아씨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그 사이 최무혁씨가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수하씨. 지금 저희가 드리는 입사 제안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공개채용하고는 완전히 격이 달라요. 당연히 특별히 신경을 써드리는 것이고, 또 그만큼 세상에 절대 드러나서도 안 되는 겁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는 수하씨도 충분히 이해를 하고 계신 것 같았는데요.”

“아, 그게 아니라......”


하필이며 그 타이밍에 갑자기 코트 안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나는 황급히 코트 위로 버튼을 눌러 진동을 끈 뒤 말을 이었다.


“상황도 이해가고, 얼마나 심각한지도 알고는 있습니다. 다만 그만큼 중요한 결정이니만큼 신중하고 싶습니다. 더군다나, 말씀하신대로면...... 제가 아마 어느 쪽을 선택하든 뼈를 묻을 때까지 일을 하게 될 것 같아서요. 저도 어딜 가든 쉽게 포기하는 성격은 아니고, 사명감을 갖고 배워간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일을 하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어디로 갈지 결정하기 전에, 꼭 정리해야하는 개인적인 일이 있어요.”

“......”

“......”


생각나는대로 말하다보니 면접 연습 때 준비했던 멘트들이 이리저리 섞여나왔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핸드폰이 또 진동을 하진 않을까 걱정하다가,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 이 상황도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요. 한 달이 힘드시면 조금이라도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실 수는 없을까요?”


말을 뱉어놓고보니 혹시나 무례하게 여길까 싶어서, 마지막은 더욱 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다행히 두 사람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바로 대답하는 대신 몸을 의자에 기대앉았다. 최무혁씨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장을 올려다봤고, 한서아씨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좋아, 하지만 한 달은 너무 길어.”

“그럼 얼마나.....”

“말했잖아, 우리는 오늘 당장 너를 데려갈 생각으로 왔다니까.”


한서아씨는 답을 내지못한 듯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그 사이 먼저 답을 내놓은 건 최무혁씨였다.


“이 주 정도면 충분할까요?”


한숨이 나왔다. 이 주라.

충분할까?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방송사 어딘가에 숨겨진 문서를 찾아서, 범죄의 흔적 없이 한 여자에게 가져다주는 일이.


아니, 한 달이었다고 해도 충분했을까?

애초에 가능여부를 따질 상황이 아니다. 나를 앞에 두고 눈을 부라리고 있는 두 사람의 소속만 봐도 어느 쪽의 일이 중한지는 따져볼 필요도 없다. 한 쪽은 경찰이고, 한 쪽은 국내 최고 규모이자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글로벌 기업의 연구소장.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니, 잠깐만. 좀 수상한데. 안 되겠어.”

“네?”

“이러다가 갑자기 사고치고 그럴 것 같은데. 안 돼, 이 주도 너무 길어.”

“그럼 이렇게 하죠.”


한서아씨가 제동을 걸자마자, 최무혁씨는 기다렸다는 듯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그는 유리로 된 탁자 위에 핸드폰 메모장을 켜서 놓더니, 기계같이 기복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간단한 계약서를 쓰도록 하죠. 첫째, 기한은 이 주. 둘째, 이 주 동안 세일그룹과 SIU는 우수하씨에게 어떤 루트로든 추가적인 제안을 하지 않는다. 셋째, 이 주 내에 우수하씨의 대외적인 활동은 제한하는 것으로.”


절대 계약서에 함부로 서명하지 말라고 했던 아라의 잔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다행히, 내가 직접 대답하기 전에 먼저 한서아씨가 나섰다.


“까고 있네. 계약서는 무슨.”

“우수하씨는 시간이 필요하고, 우리는 그 시간 내에 돌발 상황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고. 종이 한 장으로 그 모든 조건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데 굳이 안 할 이유가 있나?”

“법으로 보호받자는 구실로 계약서에 이상한 문구들 슬쩍 집어넣는 게 그 쪽 관습이잖아?”

“서류가 없다고 멀쩡한 사람 범죄자 만드는 건 그 쪽 전문이지.”


꼭 호랑이와 사자 같았다, 두 사람은. 틈만 나면 서로를 한 대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달려들었으니. 결국 한서아씨는 결국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더니, 큰 결단을 내리듯이 한숨을 내쉬면서 테이블을 한 손으로 쾅 내리쳤다.


“좋아, 딱 이 주다. 계약서는 없어. 날짜, 시간, 장소만 정해.”

“수하씨는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저야 감사하죠.”


어떻게든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연신 고개를 숙여보이며 밝게 인사했다. 하지만 그 둘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한서아씨는 분한 표정으로, 최무혁씨는 여전히 감정이 조금도 담기지 않은 마네킹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부터 2주 뒤, 세일그룹 본사와 SIU의 사무실의 한 가운데에 있는 한강 근처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수하씨.”

“어우, 네, 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마주친 최무혁씨는 감정없는 눈으로 나를 차분히 내려다봤다. 지금보니 상당히 키가 컸는데,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데도 똑바른 자세로 서 있었다. 흐트러진 분위기 속에서도 자세나 정돈된 옷차림을 보면 깔끔한 신사의 느낌이 강했다.


“다시 봤습니다.”

“예?”


한참 내려다보던 그가 뱉은 말은 그게 다였다.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는 사이, 그는 가운 안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내게 건넸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거나 궁금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최무혁씨는 내가 명함을 받자마자 휙 돌아서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기계같은 사람. 그게 최무혁씨가 남긴 인상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AI를 사람으로 만들면 저런 모습일까 싶었다. 친절한 말을 할 때든 한서아씨와 날을 세울 때든, 표정이 격하게 바뀐 적이 없고 말투나 어조에도 변함이 없다. 눈꺼풀은 반쯤 감겨서 늘 피로가 가득한 얼굴임에도, 그 안에는 꼭 전신을 꿰뚫는 것 같은 눈빛이 숨어있었다.


로비로 나오니 이미 험악한 인상의 보안요원들은 모두 사라지고 처음 왔을 때처럼 데스크의 직원과 두 명의 보안 요원만이 남아있었다. 인사를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어색하게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한 두 번 까딱이면서 회전문을 통과한 나는, 그제야 맡아지는 바깥 공기에 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게 무슨 일이람.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쓸어올리면서 나는 상황을 정리해보려고 했다.


그러니까, 세일그룹이 급하게 면접을 잡고 나를 부른 건 연구원으로 채용하기 위해서였고, 목적은 내 능력을 토대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보자는 것. 그리고 경찰청 내부의 특수수사팀에서도 나를 섭외하려고 온 건데, 아마 내가 하게 될 일은 범죄자들을 잡는 일일테고......


“한 쪽은 연봉이 빠방하고, 한 쪽은 연금이 나오고.”


푸핫, 웃음이 튀어나왔다. 이 상황에도 이런 것들을 정리하고 있는 것도 역시 아라 때문이었다. 계약서 쓰기 전에 제대로 확인하라고, 회사에서 뭐라고 떠들든 받을 수 있는 걸 확실하게 체크해야 손해보지 않는다면서.


“수하야!”

“으아씨ㅂ....!!”

“뭐야 인마?”

“아, 아뇨! 진짜 너무 깜짝 놀라서!”


또 기척도 없이 나타난 한서아씨는 친근하게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무리 워커를 신었다지만, 그녀의 키는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큰 모양이었다.


“앞으로 나 볼 때마다 놀라겠다, 어?”

“넵.”

“네?”

“아, 아뇨. 아뇨, 이제 놀라진 않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어깨동무를 걸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힘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최무혁이가 뭐라대?”

“네?”

“모르는 척 하지 말고. 어차피 그 아저씨가 그냥 보내지 않을 거 뻔히 안다.”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뭐, 명함 정도야...... 얘기해도 괜찮겠지.


“별 말씀은 없으셨고 그냥 명함만 주고 가셨어요.”

“씁.”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한서아씨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얼른 손을 내밀면서 말을 이었다.


“아, 혹시 명함......”

“됐어, 인마. 명함은 무슨 명함.”


한서아씨는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주머니에서 뭔가를 휙 꺼내서 던졌다. 코앞에서 떨어뜨릴까봐 나는 두 손으로 황급히 그걸 받아들었다.


“더 좋은 걸 줄게.”


그건 엄지손가락 절반만한 작은 크기의 USB였다. 나름 끝에는 단단한 재질의 플라스틱 뚜껑도 달려있었다.


“열어 봐.”


아무 생각없이 뚜껑을 열었다. 자세히보니, 그건 USB가 아니었다. 뚜껑 아래에 단자가 있어야 할 곳에는 비슷한 크기의 버튼이 달려있었다. 꼭 식당에서 누르는 호출벨처럼 생긴, 자그마한 버튼.


“급할 때는 눌러. 누르면 삼십 초 안에 네가 있는 곳으로 내가 갈테니까.”

“삼십 초요?”

“응. 서울 안이면.”


한서아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내 등을 세게 밀었다. 그리고는, 쿨하게 뒤돌아서 반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간다. 이 주야, 약속 잊지 말고.”

“아, 네, 넵! 들어가세요!”

“사고 치지 말고!”


토요일 점심시간을 넘어가는 오후. 나는 그렇게 거리 한복판에서 머리를 긁적이면서 멀어지는 한서아씨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그녀가 인파들 사이에 섞여 사라졌을 때쯤, 나는 건네받은 버튼을 코트 안 주머니에 넣고 발을 돌렸다.


“아차......”


그러고보니 아까 최무혁씨와 한서아씨와 얘기중일 때 핸드폰이 울렸었다. 어차피 확인해 볼 필요도 없겠지만.


‘아라겠지, 뭐.’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한 통의 부재중 전화와, 딱 두 줄의 메시지를 남겨놨다.


[면접 끝나면 바로 전화해]

[사고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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