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안에 계시면 안 돼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보이는 구조대원은 갑자기 내 팔목을 붙잡고 사람들 쪽으로 거세게 밀어붙였다. 휘청거리며 몇 걸음 물러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위험하니까 나가세요!”
하지만 이 사람과 실랑이 할 시간이 없었다!
“아라야!”
[10층, 건물 한 가운데에 사람 보여? 난간 밖으로 허리 내밀고 있는 사람!]
“보여!”
[한 번에 갈 수 있겠어?]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얼른 눈을 감았다가 떴다-
“쿨럭, 쿨럭!”
눈을 뜨자마자 아까보다 훨씬 더 심한 연기가 얼굴을 덮쳤다! 나는 발을 난간에 건 채로 얼른 두 팔로 난간을 끌어안았다.
“저기요!”
난간 위로 허리를 숙이고 있는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는 꼭 빨랫줄에 걸린 옷처럼 상체는 난간 밖으로, 다리는 베란다 쪽으로 내린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까는 생 난리를 치더니.......’
그래도 구출하기에는 이게 더 낫다. 나는 한 팔로 난간을 안은 채로 한 손으로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 끌었다. 정신을 잃은 그는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다.
‘좋아!’
나는 곧바로 한 눈에 보이는 바닥으로 순간이동했다.
“그 사람이다, 또 사람을 구했다!”
기침을 계속 하면서도 나는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내게 잡힌 채 드러누운 남자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한 채 꼼짝 못하고 있었다.
“아저씨!!”
아까 내 팔목을 잡고 밀쳤던 구조대원이 다행히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다짜고짜 그 사람의 팔을 잡고 옆에 앉혔다. 다행히 그는 곧바로 남자의 호흡과 심박을 체크하면서 동료를 불렀고, 금세 다른 구조대원들이 달라붙었다.
“사다리차는 언제 와요?”
“오고 있는데 길이 너무 좁아서 못 들어오고 있어요!”
슬쩍 건물을 살폈다. 건물 곳곳에서 뿜어져나오는 연기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고, 언뜻 보기만 해도 창문에 달라붙은 사람은 아직도 열 댓명은 넘어보였다. 나는 앉아서 겨우 기침을 멈춘 다음에 곧바로 말했다.
“일단 밖에서 보이는 사람은 제가 꺼내올테니까, 그 다음엔 알아서 해주세요!”
곧바로 두 구조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
“안 돼요!”
어디선가 갑자기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나를 사람들에게로 밀쳐냈던 구조대원이었다. 그는 또 다시 내 어깨를 잡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일반인은 나가 계세요, 구조작업에 방해됩니다.”
그는 내가 일어나자마자 어깨를 한 손으로 세게 밀쳤다. 워낙 거구의 남자였던 터라, 나는 이번에는 거의 넘어지기 직전까지 휘청거리며 뒤로 몇 걸음을 물러나야했다.
“뭐하는 거야!!”
“아니 잘 하고 있었는데 왜!”
분노는 등 뒤에서 터져나왔다. 이미 몇 번의 순간이동으로도 사람들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눈치 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뒤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 대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람들을 뒤로 밀쳐냈다.
“뒤로 가세요! 다 뒤로 가시라고요!”
“사람이나 구해!”
“구하고 있습니다, 뒤로 가세요!”
“아니 저 사람이 구하고 있는데 왜......!”
“굳이 막을 건 없잖아요!”
현장을 통제하는 인원은 이미 꽤 늘어나있었다. 대부분의 소방대원은 건물에 들어가거나 도망쳐나온 사람들을 체크하고 있었고, 벌써 열 댓명 넘게 출동한 경찰병력은 날 밀쳐냈던 구조대원과 함께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사람들을 뒤로 보내고 있었다.
“지금 가까이 계신 분들은 구조작업을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뒤로 가세요!”
“아니 이 사람이 잘 하고 있었는데 왜 그러는데요!”
아까는 웅성거리기만 했던 소리가 점점 커졌다. 갑자기 도심 한복판에서 터진 재해의 구경꾼들이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각자 소리를 지르며 대원들이 형성한 줄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이미 충분히 혼란스러운 상황에 굳이 더 어지러워질 필요는 없다. 나는 소리지르는 군중들 앞으로 나섰다.
“저기, 아저씨. 제가 보이는 사람 정도는 데리고 나올 수 있거든요?”
“위험하니까 그만 하세요. 저희 구조작업에 방해가 됩니다.”
“아니 방해가 아니라 지금 사다리차 못 들어온다면서요?”
“원칙상 구조대원이 아닌 분은 현장에 오시면 안 됩니다. 뒤로 물러나세요.”
단 두마디로 충분했다. 하지만 굳이 말 싸움을 더 이어가기 전, 이어폰에서 아라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야! 우수하!]
“어, 어 왜?”
[어떡할 거야, 빨리 정해. 너 가만히 있으면 사람들한테 들켜.]
“뭐? 무슨 소리야?”
[거기 그렇게 가만히 서 있으면 들키니까 일단은 빠지라고!]
“도망치자고?”
[어차피 이 쯤되면 네가 아니더라도 다 구출할 거야. 너 지금 잠깐동안만 해도 충분히 많이 구했거든?]
“......”
[뭐하고 있어, 빨리 움직여! 뒤로 오든지 다른 건물로 가든지!]
“그......”
그 순간이었다.
연기를 뿜던 호텔 안에서, 갑자기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으아악!!”
“깜짝이야......!”
“터, 터졌는데!”
“뭐야, 뭐가 터졌는데!?”
그 순간에는 군중과 구조대원의 구분이 없었다. 전부다 뒤를 돌아서 호텔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폭발음이 들린지 1초나 지났을까, 순식간에 건물의 틈마다 시뻘건 불길이 혀를 낼름거리기 시작했다.
“가, 가스야?”
“뒤로 가, 뒤로가요!!”
“위험해!!”
“다 뒤로 가세요!”
처음으로 구조대원과 군중의 마음이 맞았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은 뒤로 우르르 물러나기 바빴고, 방호복을 입지 않은 통제요원과 구조대원들도 얼굴을 가린 채 건물로부터 후다닥 물러났다. 창문마다 훨씬 더 짙어진 연기가 훨씬 더 큰 규모로 뿜어져나왔고,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우수하!]
물러나야지, 지금이다. 지금이 기회다. 사람들 앞에서 이미 몇 번 순간이동을 했지만, 지금 다들 시선이 건물에 쏠리고 도망가는데에 정신이 팔린 사이라면 내가 사라져도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굳이 구조대원들과 시비를 붙지 않아도 되고, 불길을 왔다갔다 하면서 사람들에게 잡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으아아아아악!!”
“불이 너무 커! 위험해!”
“대피하라고 해, 진입조 전부 대피하라고 해!”
하지만.
그러면 이 능력을 갖게 된 보람이 하나도 없잖아?
“아라야.”
[말하지 말고 빨리 나와!]
“위험하면 알려줘.”
[지금! 지금 위험하니까 나오라고!]
그리고 나는 곧바로, 연기 사이로 보이는 창문으로 순간이동했다.
[야 미쳤냐!]
첫번째는 노인이었다. 콜록거리면서 눈도 못 뜨는 두 노부부의 손을 잡고, 나는 곧장 1층 바닥으로 순간이동했다. 놓자마자 건물에서 탈출하기 시작한 소방요원이 옆을 스쳐지나갔고, 곧 그 뒤를 따라 나온 대원들이 두 노부부를 들쳐 업었다.
두번째는 노부부가 있던 창문의 바로 윗 층에 있는 엄마와 두 아들이었다. 초등학생이 되어보이는 아들은 목에 안고, 더 큰 아이는 엄마와 손을 잡게 한 뒤, 한 손으로 엄마의 손을 잡고 곧바로 바닥으로 순간이동했다. 다행히 세 사람은 구급대원의 지시에 따라 걸어서 구급차로 이동했고, 나는 곧바로 다시 뒤돌아서 건물 난간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렇게 몇 번을 더 하고도 구해야 할 사람은 더 있었다. 텅 비어있던 창문에도 어느틈엔가 사람들이 손을 뻗으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그 때마다 나는 그 쪽으로 이동해서 아래쪽으로 순간이동을 하길 반복했다. 문제는 갈수록 연기가 짙어졌고, 숨 쉬기도 어려워서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다는 것.
[야! 우수하!!]
“미안하다, 지금 좀 바쁘다......!”
[개소리하지말고, 잘 보이게 해뒀으니까 그 쪽으로 이동해!]
무슨 소린가 싶어서 난간에서 또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은 채 뒤를 돌았다. 아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시민들을 통제했던 경찰 서너 명이 일제히 경광봉을 흔들며 서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구조작업이 훨씬 빨라졌다. 아라가 지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 정해진 포인트는 연기 틈새로도 잘 보이는 곳이었고, 또 갈 곳이 정해져있으니 어디로 갈지 이동 지점을 찾을 수고도 덜었던 덕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밖에서 보이는 모든 갇힌 사람들과 더불어, 안에서 마지막까지 호스로 물을 쏘면서 화재를 늦추려던 소방요원까지 모두 경광봉이 있는 지역으로 구출해냈다.
“이제 더 없죠?”
“없습니다!”
온통 새까맣게 그을린 소방요원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한숨을 돌렸다. 여전히 온갖 소음으로 가득한 화재현장이었지만, 이제 인명피해는 없겠지!
“아저씨.”
나는 곧장 아까 나를 밀쳐냈던 구조대원을 찾았다. 그는 한 손에 무전기를 든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뒤로 가세요, 위험합니다. 건물이 무너질 수도 있어요.”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 일이라는 게 그런 거다. 급박하면 급박하게 상황이 흘러갈수록 원칙을 무너뜨리기는 무서워지는 법. 나는 대충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그를 지나쳐서 걸어갔다.
나는 곧장 구경꾼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까까지 화재현장을 찍던 스마트폰들이 전부 내 쪽으로 쏠려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당장은 그리 신경쓰이지가 않았다.
“이제 다 끝난 거지?”
[수고했어. 일단 얼른 다른 곳으로 -]
“잠깐만요! 한 명 더 있대요!”
소리를 지른 건 누구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이 사람들 사이를 헤쳐나오고 있었다.
“우리 애가...... 애가......”
“뭐라고요?”
“애가 있대요!”
시간이 없다. 구조대원들까지 전부 대피한 건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다!
“아줌마, 대답해요. 애가 안에 있어요?”
“애가...... 아직 안 나왔어...... 흐흑......!”
“몇 층이에요?”
“흑...... 애가......”
답답해 미치겠네, 진짜! 그렇다고 서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는 사람을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몇 층이냐고!”
그래도 지금은 다그쳐야지!
“애가 있어요...... 흑......”
“아줌마, 이 사람이 구해준다잖아요, 어디냐고! 몇 층이냐고!”
답답해하는 건 주위의 구경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줌마, 키, 키! 방 키 있어요?”
아주머니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뒤졌다. 그런데 그렇게 주머니를 뒤지는 행동도 너무 느려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아니, 자기 애가 불나서 무너지기 직전인 건물 안에 있는데 이렇게 동작이 느리다고?
“빨리 줘요, 빨리!!”
“어흐흑.....”
몇 초를 뒤적뒤적거리다가 마침내 그녀가 꺼낸 건 심지어 호텔 카드키도 아니었다. 지갑이었다. 나는 재빨리 지갑을 낚아채서 안을 뒤졌다. 카드키로 보이는 아무것도 없는 카드가 있긴 했지만 정작 몇 호실인지 써있지는 않았다!
“아줌마, 몇 호냐고요?”
“어, 어머니?”
갑자기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온 건 호텔직원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는 울고 있는 아줌마의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나를 쳐다봤다.
“저 이 분 기억해요. 손님인데 아이 좀 맡겨달라고 했었어요.”
“애는 어딨어요?”
“11층에요. 저희가 카운터에서 맡을 수는 없고, 11층에 키즈카페가 있다고 그 쪽으로 안내해드렸어요.”
“키즈카페 위치 좀 알려줘요. 아라야, 11층! 들어갈만한데 있어?”
[창문은 다 열려있어. 근데 연기가 너무 심해.]
“일단 가볼게.”
[야, 야! 개소리하지마, 들어가서 어떻게 찾을 건데?]
하지만 아라가 그 말을 마칠 때 쯤, 나는 이미 11층 객실 창문에 매달려 있었다.
“콜록, 콜록!”
베란다 난간을 넘어간 뒤, 이제 까맣게 보이는 짙어진 연기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눈물, 목이 콱 막히는 듯한 냄새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나는 황급히 코트 깃으로 눈 아래를 가렸다.
“후우, 하아....”
어째 순식간에 숨 쉬는 게 편해지는 기분. 옷이 젖어있었던 것도 아닌데, 코트에서는 옷장의 퀴퀴한 냄새가 조금 나고 바깥 공기보다 조금 텁텁하기만 할 뿐, 기침은 저절로 사그라들었다. 영문은 몰라도 일단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곧장 객실 안으로 들어가서 열려있는 문 밖 복도로 순간이동했다.
“헉!”
이미 호텔의 모든 복도와 객실에는 커더란 불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복도에 깔린 카페트와 벽지, 천장에도 불길이 꼭 장식처럼 활활 타올랐고, 연기는 그 불보다 더 많이 뿜어져나와서 시야를 가렸다. 일단 들어오긴 했는데, 구하더라도 나갈 수나 있을지......
그리고 그것보다 먼저 걱정해야할 게 있었다. 일단 여기서 타죽지 않아야 하는데!
그래서 나는 계속 눈을 깜박거리면서 순간이동했다. 적어도 눈 깜짝할 사이, 아주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그 시간이 계속되니 불의 영향을 그나마 덜 받는 기분이었다. 그래, 가스불을 계속 켜놓는 것보다는 껐다 켰다 하는게 열을 덜 받긴 할테니까!
키즈 카페는 다행히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깨져서 내려앉은 유리문을 지나서 들어간 그 곳은 복도보다 넓었고, 그만큼 불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한 걸음이라도 들어갔다가는 온 몸이 타버릴 것 같은 열기.
“누구 없어요?”
대답은 없었다. 여기저기서 불이 타오르는 소리는 왜 그리도 큰지, 바그락거리면서 부서지는 소리는 건물 전체에서 나는 것인지!
“누구 없니!”
누가 있다한들 들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뜨거워진 얼굴과 머리를 감싸기 위해, 재빨리 코트를 벗어서 머리 위로 뒤집어 쓰면서 코트의 소매로 코와 입을 덮었다. 그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몸이 덜 뜨거워졌다. 문제는 발과 다리가 뜨거워진 건데, 그것보다도 코트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누구!! 없니!! 없어요?!”
쿠르르르릉-
“......!”
대답은 건물이 대신했다. 발 밑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싶더니 꼭 건물이 울부짖는 것처럼 사방에서 쿠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못 찾았으면 그냥 나와!!]
“기다려봐!”
코트를 뒤집어 쓴 채로 나는 황급히 달려갔다. 놀랍게도 안쪽 방에는 아직 불길이 완전히 번지지 않고 있었다! 다만 바닥에 전부 매트가 깔려있었고, 그물이나 미끄럼틀, 풀장같은 놀이기구들과 책들이 많이 쌓여있어서 화재가 번지는 건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누구 없냐고!”
여전히 화끈거리는 두 발로 펄쩍 뛰면서 나는 여기저기를 뒤졌다. 하지만 아이가 숨어있을만한 곳은 없었고,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으며, 조금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수하. 너 진짜 지금 들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죽을 수도 있어. 얼른 나와!]
“금방 갈게! 누구 없어요!?”
이만하면 된 거다 싶기도 했다. 코트가 없었으면 이미 전신 화상을 입었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데다가 건물도 무너지려한다. 이만큼 목숨을 걸었으면 된 거다, 이렇게 하고만 나가도 상황을 아는 사람이면 고생했다고 어깨를 두드려줄 거다...... 눈 앞에 우느라 제대로 카드키도 꺼내지 못했던 아줌마의 모습이 아른거렸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없지!?”
그렇다면 이제 밖으로 나가야하는데......
“......!”
하필 그 타이밍에 고무공으로 만들어논 풀장이 내 눈에 들어왔다. 누르면 구겨졌다가 서서히 펴지는, 속이 비어있는 고무공이 물 대신 가득 들어 차 있는 풀장. 그게 왜 굳이 눈에 들어왔냐하면 -
‘아빠 간다?’
그건 아마 다섯 살이었나, 여섯 살이었나.
같이 놀기로 했던 아빠가 회사 일 때문에 나를 그 놀이터에 맡겨놓고 갔던 날. 아마 그 날 때문이었나보다. 나는 삐진 티를 내려고 아빠와 인사도 하지 않으려고, 그 풀장 밑에 깊숙히 숨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와보니 아빠는 이미 출근했고, 그게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라는 옛 기억은 제쳐두고, 일단 중요한 건 저 안에도 사람이 충분히 숨어 있을 공간이 된다는 거다!
나는 곧바로 코트를 제대로 입은 뒤 풀장으로 뛰어들었다. 아이들이 많이 올 것을 대비해서인지 풀장은 꽤 커서 내 허리까지 공으로 가득 찼다. 나는 수영하듯이 팔을 휘휘 저으면서 고무공을 사방으로 걷어냈고 -
그리고 금세, 여자 아이 한 명을 찾아냈다.
이제 막 유치원에 들어가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작은 그 아이는 이미 정신을 잃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축 늘어진 팔이나 표정이 절대 평온히 잠에 빠진 얼굴은 아니었다!
[우수하!!]
“찾았어!”
[빨리 나와, 무너진다고!!]
“알았....”
하지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능력을 쓰는 것처럼 허공에 붕 뜬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때에서야, 나는 내가 디디고 있던 발 밑이 아득하게 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아찔한 기분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귀를 찢는 듯한 폭발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눈 앞은 금세 캄캄해졌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