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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작전 회의

by 봄단풍


“와주셔서 감사해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다연의 모습은 첫 만남과 똑같았다. 긴 하얀색 치마와 니트, 발등이 다 드러나는 살구색 단화. 심지어 며칠 밤은 운 것처럼 팅팅 부은 눈과 화장기는 조금도 없는 얼굴도 그대로였다. 다만 머리카락만 깔끔하게 한 가닥으로 묶어서 등 뒤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저, 그러면...... 여기서 얘기하실 건가요?”

“아니.”


짤막하게 대답하고 손을 내밀었다. 다연이 어정쩡하게 손을 내밀자, 나는 악수하듯이 그 손을 붙잡았다.


“눈 감고 있어. 뜨라고 할 때까지 뜨지 말고.”


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잡은 손은 보기보다도 훨씬 가냘펐고, 연약했다. 심지어 그 작고 가느다란 손이 미세하게 덜덜 떨리고 있어서 나는 일부러 더 손을 세게 잡았다. 그리고 몇 번의 순간이동. 다리를 따라 이동한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건물 옥상으로 향했고, 처음 다연을 구한 뒤 이동했던 이태원의 어느 상가 옥상으로 올라간 뒤에야 다연의 손을 놨다.


“눈 떠도 돼.”


다연은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마침 찬 바람이 불고 지나가서 그녀는 자신의 몸을 두 팔로 꼭 껴안았다.


“겉옷 없어?”

“네. 낮에는 아직 이 정도로도 따뜻해서......”

[코트 벗지마, 벗지 말라고 했다?]

“안 벗어.”

“네?”

“아냐, 아냐.”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에서 들리는 아라의 목소리를 무시하면서 나는 다시 다연을 쳐다봤다. 하지만 막상 입을 떼기도 쉽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단어 하나, 숨소리 하나까지 아라가 듣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생각은 좀 정리 됐어?”

“네. 사실 진짜로 와주실 줄은 몰랐어요.”

[하 씨, 얼굴을 봐야하는데.]


다연의 얼굴은 여전히 팅팅 부어 있었다. 불과 방금 전까지도 울었던 것처럼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눈물자국도 흥건했다. 긴 니트 소매에는 군데군데 축축한 얼룩이,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굳이 더 볼 것도 없이, 다연은 아직도 지금의 삶에 대한 의지를 붙잡으려 애쓰고 있는 나약한 소녀였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다연은 잠시 눈을 부릅뜨고 땅을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덜덜 떨리는 두 주먹을 꽉 쥐고는 나를 올려다봤다.


“아저씨가 간 다음에도 몇 번 더 죽으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그 때마다 아저씨가 해준 말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너 뭐라고 했냐?]

“아 쫌......”

“네?”

“아냐, 계속해.”

“......네. 제가 나쁜 마음을 먹을 때마다, 아저씨가 그 평가표를 구해다주면 어떻게 할 거냐고, 그래서 제가 죽지는 않을 거라고 했었던 말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 까짓거 죽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죠. 무섭지도 않아요. 앞으로 계속 잘 나갈 걔네 모습을 보는 게 더 무섭고, 하루 하루 연습실에서 시간만 썩혀가는 인생이 더 무서우니까요.”


그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어찌됐든 살다보면 기회가 올 거라고 말해주려다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마다 다른 거다. 다연한테는 그 오디션이 인생의 전부였을 수 있지.


“그래도...... 그래도, 아저씨가 그 말을 해준 덕분에 희망이 느껴지더라고요. 혹시라도 그 모든 비리를 밝혀낼 수 있으면? 만에 하나라도 짜여진 각본을 들춰낼 수만 있다면?”

[차암나.]

“그런다고 제가 다시 성공할 수는 없겠죠. 그래도, 적어도 걔네 모습을 보면서 속 끓을 필요는 없어질 거잖아요? 그것만으로도 그나마 살만 해질 거잖아요. 그래서.”


다연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작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마무리했다.


“그래서. 아저씨 덕분에, 오늘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어요.”

[어휴......]


나는 귀에서 들리는 아라의 한숨소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대답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아저씨가 도와주시면 가능해요.”


다연의 눈에는 어느새 힘이 돌아와있었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아저씨는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거죠? 아무데나 갈 수 있는 거잖아요?”

“아니, 그건 아냐. 아무데나는 못 가.”

“그러면 어떻게 하시는 거에요?”


다연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한걸음 더 다가왔다.


“갈 수 있는 곳이 정해져 있는 거에요?”

“아니.”


다연은 여전히 눈을 빛내면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그 표정에 부응하고픈 생각이나 설명을 이어가고 싶은 욕망보다도 뚜렷한 감각, 직감이 내 입을 막았다.


“그, 아저씨 능력을 정확히 알아야 작전을 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다연은 그 사이 한걸음 더 다가섰다. 동그랗게 뜬 눈과 붉어진 볼이 더 선명하게 눈 앞에 다가왔다. 누가 봐도 화장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타고난 그녀의 뽀얀 피부는 더 도드라졌다. 그 와중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똘망한 그녀의 눈이 한 번 크게 깜빡이고, 다음 말이 이어졌다.


“간단하게라도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어.”

“네?”

“안 돼.”


마음이 약해질 뻔 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방금 전까지도 자살을 생각했던 사람이었으니까, 혹시라도 상처를 받으면 어떡할까 걱정이 돼서 고민을 했을 뿐이고.


“일단 네가 원하는 거, 네 계획을 자세하게 먼저 말해봐. 그러면 내가 작전을 생각해볼테니까.”

“아, 네. 죄송해요. 불편하실 수도 있는 건데. 일단 제가 준비한 걸 먼저 말씀드릴게요.”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다연은 오히려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름 준비한 자료가 있는 것인지 핸드폰을 꺼내고는 몇 번 두드리기 시작했다.


[흐음.]


웬일로 조용히 있던 아라가 소리를 냈다. 생각해보니, 아라의 성격대로였다면 다연이 능력에 대해 알려달라고 조를 때 절대 하지 말라고 윽박질러야 맞는 건데.


[야, 쟤가 상황 설명을 뭐라고 하는지 좀 듣고 싶은데.]

“갑자기?”

[아예 처음부터. 한 번 잘 말해봐.]

“후우......”


잠시 한숨을 내쉬고는 다연을 쳐다봤다. 그 사이 핸드폰에 있는 자료를 찾은 것인지, 다연은 몸을 다시 내 쪽으로 돌리고 서있었다.


“그, 있잖아.”

“네?”

“그 때는 내가 여러모로 경황이 없어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혹시 다시 설명해줄 수 있어?”

“뭐를요?”

“지금 이 상황 말야. 그 데뷔한 애들이랑, 오디션부터 해서 뭐가 문제인지.”


다연은 핸드폰을 들었던 손을 허공에 내린 채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디션 결과는 조작됐다고요. 처음부터 띄워줄 애를 정해놓고 방송도 편집했고, 생방송 투표로 가기 직전에는 평가 결과를 바꿨어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다고 했더라?”

“제가 직접 들었어요. 화장실에서 연습생들끼리 얘기하는 것도 들었고, 제가 아는 언니가 직원한테도 들었다고요. 어차피 붙을 애들은 정해져있다고.”


이만하면 아라도 됐겠지. 나는 무슨 일이냐는 듯 동그랗게 치켜 뜬 다연의 눈을 최대한 무덤덤하게 받아내며 다시 물었다.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데?”


다연은 나를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핸드폰 위로 눈을 내리깔았다.


“목표는 평가표 원본이에요. 정확히는 방송 8주차, 생방송 투표 시작 전 마지막 심사 평가표 원본. 방송으로는 평가표가 공개된 적은 없고 자막으로 수정된 이후의 점수만 나갔기 때문에 어떻게 생겼는지는 저도 몰라요.”

“그럼 어떻게 구해?”

“대신 그게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죠.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그 방송국에서 일하던 언니가 있어요. 제가 참가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작가로 일했던 언니에요. 그 언니가 친한 방송사 직원하고 얘기를 했는데, 모든 문서는 전자문서로 방송사 내부 전산망에 저장을 하는데, 종이로 된 원본을 보관하는 문서고가 따로 있대요. 지하 1층에.”

“지하 1층...... 잠깐, 어디 지하 1층?”

“그야 당연히 방송국 본사 지하 1층이죠.”


다연은 나를 흘끗 보고는 다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문서들은 전부 연도별로 정리가 되어있대요. 그 외에 자료 형식이나 생산 부서에 따른 구분은 어떻게 되어있는지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그 문서고 안에 원본을 보관하고 있다는 거.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스캔도 떠놨다고는 들었어요.”

[근데 그게 더 찾기도 어렵고, 빼내기도 어려울 거야.]


귀에서 들린 아라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연은 그걸 자신의 말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한 것인지, 나를 보며 입술을 한 번 꽉 깨물고는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아, 이게 다야?”


황당함에 실소가 터져나왔다. 다연의 미안해하는 표정을 무시한 채, 나는 눈과 코를 덮은 보호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상암동에 있는 방송국 본사 지하 1층 문서고에 있는 심사평가표 원본을 빼내오면 되는 거네?”

“네.”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고?”

“......네.”

[하아......]


아라와 내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나왔다. 귀와 입에서 동시에 한숨소리가 흘러나오니 기분도 이상했다.


“그, 잠깐 생각 좀 해볼게.”


나는 다연을 옥상 한복판에 두고 난간으로 걸어왔다. 아직은 낮, 며칠 째 맑은 하늘 아래 서울의 풍경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낮이든 밤이든 꽉 막힌 도로, 느릿한 걸음으로 이태원의 골목을 걷는 사람들.


[이거 진짜 해야겠냐?]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고, 두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자리를 찾지 못한 두 손으로 겨우 팔짱을 끼고 난 뒤에야 나는 아라에게 들리도록 속삭였다.


“그 문서고에서 서류를 어떻게 찾지?”

[들어가는 걱정은 안하고?]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내 말은, 문서고 말이야. 보통 그런데에는 그냥 문을 잠그고 여는 잠금장치만 있는 게 아니라니까? 안에서 직원이 일보고 나가서 잠그면, 그 안에 열이든 움직임이든 감지하는 센서가 있어서 누구든 숨어있으면 곧바로 경보가 울린다고.]

“......”

[차라리 그 평가표를 밖으로 빼내면 모를까, 네가 들어가는 건 말도 안 돼. 위험해.]


그래, 그러면 얼마나 좋아. 차라리 그 서류를 밖으로 빼낼 수만 있다면. 하지만 당장은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나름 대기업 본사에 침입해서 어떤 문건을 빼내온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보는 곳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내 능력이 있기 때문에 논의라도 되는 건데. 들어갈 수가 없다면 애초에 능력의 유무가 중요치 않다. 어차피 안 되니까.


“그냥 내가 열리는 타이밍에......”

[언제 열리는데? 그냥 그 앞에서 죽치고 있게? 그것도 수상해보이지 않겠어?]

“그럼 서류가 나오든, 내가 들어가든 일단 문을 열 생각을 해야겠......”


그 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 여보세요? 너 말을 멈추니까 내가 좀 불안하다?]

“서류가 나오면 되네.”

[뭐?]

“그 평가표. 그게 밖으로 나오면 된다고. 내가 못 들어가면 서류가 나오면 되지.”

[어떻게?]

“왜, 그렇게 중요한 거면 그 서류는 나름 철저하게 보관할 거 아냐?”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다연에게 다가갔다. 우울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어깨를 툭 치고 나는 곧바로 물었다.


“너 친구 있냐?”

“친구요?”

“적당히 쇼를 좀 해줄만한 친구.”


다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혹시 위험한 일을......”

“아냐. 아주 조금? 그냥 적당히 연기를 조금 해줄만한 친구.”


다연은 미심쩍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자신의 핸드폰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몇 명이나 필요해요?”

“엉?”


다연은 손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봤다.


“두 명 정도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사람들 친구 맞지?”

“일단 부탁은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좋아. 그리고 너 잠깐 핸드폰 좀 줘 봐.”


다연은 황망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 나는 미리 준비한 케이블을 다연의 핸드폰에 연결한 뒤 파일 하나를 다연의 핸드폰에 옮겨담았다. 그게 아라가 반드시 하라고 했던 미션이었다. 자신이 파일을 하나 줄테니 다연의 핸드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설치하라고.


[야, 그걸 그렇게 대놓고 하면 어떻게 해?]

“앞으로 내가 연락할테니까, 핸드폰 설정 바꾸거나, 파일 함부로 지우거나 하지 마. 내가 일 해주는 조건이야. 알았어?”

“네, 그럴게요. 뭘 하셔도 다 괜찮아요.”

“일 다 마치면 알아서 지워줄게.”


다연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올. 우수하, 난 또 잔머리를 좀 굴릴 줄 알았더니.]

“조용히 좀 해라.”

“네?”

“아냐,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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