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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평가표 탈취 작전(2)

by 봄단풍

[아저씨, 잘 들어갔어요?]


다연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나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직원은 한참이 지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류를 뽑아내는 소리 뒤에, 종이 뭉치 위에 종이 뭉치를 던지는 소리. 그 다음 무릎이 딱딱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읏차,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발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나는 슬쩍 고개를 내밀고 입구로 향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훑었다. 두 손으로 안고 있는 종이 뭉치는 에이포 용지 반 팩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혼자서 들기에 그리 무거운 분량이 아니긴 하다. 다행히 내가 가져온 가방에도 쑤셔 넣으면 들어갈만한 분량이기도 하고.


[아저씨?]


지금 눈 앞에 닥친 문제는 저 서류를 들키지 않고 쫓아가는 것. 남자는 두 손으로 평가표들을 들고 이미 문을 열고 있었다. 철문이 안 쪽으로 열리고, 남자가 빠져나가는 사이 나는 재빨리 문이 보이는 각도의 선반 쪽으로 순간이동했다.


그리고 이제 문 밖을 보기만 하면 되는데 -


철컹.

불이 꺼지고, 문이 닫혔다.


“헉......”

[왜, 왜 그래요?]


문이 닫히자 문서고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보안을 위해서인지 방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지하니까 그렇다 쳐도, 복도와 통하는 창문도 일체 없었다. 그러니까 여기는 이제 완전히 밀폐됐고, 빛과 소리도 전부 차단이 됐다는 얘기인데......


어차피 남자가 나가기 직전 문 앞으로 순간이동을 했으니 문을 열고 나가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문에 귀를 대고 남자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쯤 잠긴 철문을 열고 나가서 쫓아가면 될 일인데 -


윙 – 윙 -

곧바로, 문 밖에서 수상한 경보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설마 문서고 안에 있는 거 아니죠?]

“왜?”

[경보요! 안에 잠긴 채로 누가 있으면 곧바로 경보가 울린다고 했잖아요!]


철컥, 철컥.

바로 앞의 문 손잡이가 저절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다음 들릴 소리가 뭔지는 뻔했다!


삐빅 – 철컹!

곧바로 문이 열렸다.


본능적으로 그 자리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열리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복도 끝을 쳐다봤다. 눈 앞으로 손잡이를 여는 사람의 팔목이 보이고, 문 옆에서 직원의 한 쪽 다리가 등장할 때쯤, 나는 곧바로 먼 복도 끝 모퉁이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


눈을 떴을 때 나는 이미 복도 끝에 와 있었다. 소리나지 않게 재빨리 모퉁이를 돈 뒤, 귀를 기울여서 문서고 쪽에서 나는 소리를 확인했다.


“하, 씨. 짜증나게. 여보세요?”


다행스럽게도, 직원의 목소리에 놀란 낌새는 없었다.


“예, 김주헌입니다. 지금 문서고에서 서류 확인하고 세팅했는데 경보가 울려서요. 예.”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 다행히 문서고 안에 불이 꺼져있었던 터라, 밖에 서 있었던 직원은 나를 못 본 것 같았다. 이제 경보만 잘 해제가 되면 되는데.....


“예? 누가 있었다고요?”


숨을 삼켰다.

현대 보안 기술을 너무 얕본 게 죄다, 안일했던 내가 잘못이다. 보안에 대해서는 아라도 얘기 했었는데......!


“그럴리가 없는데. 저 혼자 내려왔었어요. 예. 방금 세팅했고요. 예. 예?...... 그 쪽에서 한 번 보세요, 그럼.”


그냥 문서고 안의 CCTV 몇 초 전을 돌려보기만 해도 나는 끝난 목숨이다. 마스크를 믿고 그대로 도망가는 수밖에 답이 없다......!


“예? 아뇨, 저라니까요. 아무도 없었어요. 예. 다시 세팅해볼게요.”


잠시 남자의 말이 멈추고 삐빅, 철컥거리면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예. 지금은 이상 없죠? 네. 네, 감사합니다.”


곧 남자의 전화가 끊어지고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남자의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쯤, 반대편 복도 모퉁이로 순간이동하고 몸을 벽 뒤에 숨겼다. 곧 뚜벅이는 발소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췄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가 느릿하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흐흐으으으으으.......”


기괴한 한숨을 내뱉으며 벽에 기댄 채로 그대로 주저앉았다. 등에 흥건한 땀 때문에 셔츠가 달라붙는 게 느껴졌고, 마스크 안쪽에도 이미 땀인지 내가 내뱉은 숨인지 알 수 없는 습기가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셔츠를 떼고 싶다는 생각도, 마스크를 벗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해야겠다고 맘 먹은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느껴질 따름이었다.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아라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울렸다. 진작 말을 좀 들을걸 -


하지만 그랬다면 무슨 일을 했을 건데?

이 능력을 굳이 썩힐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가장 위험한 건 길을 가다 애매하게 멈추는 거다. 그 옛날 운전면허 학원의 선생님은 그런 말을 했더랬다. ‘갈 거면 가고, 기다릴 거면 기다려라. 확실하게 정하지 않으면 사고난다.’ 일단 도와주기로 정했다면, 최대한 집중해서 빠르게, 빈틈없이 마무리하는 게 맞다.


후다닥 일어나서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올라가고 있는 엘리베이터가 하나, 멈춰있는 엘리베이터가 하나. 직원이 향할 곳은 뻔했다. 나는 곧바로 멈춰있는 엘리베이터를 불러서 타고는 11층을 눌렀다.


다시 심호흡. 머리를 굴리면서 상황을 파악했다. 직원이 평가표를 가져간 건 팀장이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미 방송 자막으로 나간 점수와 평가표 스캔본의 점수가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시위를 보고 느낀 바가 있으니 그럴.......


잠깐만. 점수를 고친 게 맞다면, 왜 굳이 대조를 하지?


“.....어?”


어째 내가 생각했던 방송사의 반응이 아니었다. 자신이 저질렀던 비리에 대한, 철저하게 존재 자체를 숨겨온 증거를 누군가가 내놓으라고 한다면. 첫째로 그 증거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둘째로 그 증거를 최대한 깊숙히 숨기거나 아예 파기하는 게 맞지 않나?


‘지금의 실무 직원은 모르는 건가?’

그것도 이상한데.


‘이미 원본은 다른 곳에 보관해놓고, 지금의 실무진이 다루는 건 조작된 버전인가?’

그러면 평가표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데?


띵동 -

“십일층입니다.”


더 생각을 해볼 여유가 없었다. 나는 태연하게 꼿꼿이 선 채로 열린 문 사이로 내렸다. 그리고 내가 내리자마자 곧장 다른 직원 세 명이 우르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마스크 안으로 움찔한 표정을 숨기면서 나는 복도로 걸어나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한적한 복도를 지나, 나는 사무실 이곳 저곳 창문위로 흘끔거리며 아까 평가표를 챙겼던 직원을 찾아다녔다. 빨리 찾아야 한다. 만약에 평가표를 어디 두는지 찾지 못하면 그 직원을 찾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어차피 어떤 의구심이 들었다 할지라도, 일단 평가표를 찾지 않으면 그 마저도 의미 없는 의심이 될 뿐이니까!


대부분의 사무실은 텅 비어있었지만 개중에는 한 두명씩 직원이 남아있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 아까의 직원은 없었다.


[아저씨? 상황이 어때요?]

“평가표를 직원이 가져갔어. 지금 찾는 중이야.”


몇 번째의 방을 돈 뒤에 나는 곧 그 남자를 찾아냈다. 그가 들어간 사무실은 사무실의 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있었다. 가슴 아래로는 불투명 라벨이 발라져 있었고, 그 위로는 투명하게 비치는 통 유리. 그는 텅 빈 사무실 안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이내 핸드폰을 끊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사무실 안 쪽에 있는 다른 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아저씨, 이제 그 사람들 돌려보내도 될까요?]

“어. 보내도 돼.”


나는 유리문 안쪽을 살피고는, 다른 책상에 직원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유리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꺼져있었지만 창문이 워낙 컸던 터라, 한 낮의 햇살이 통으로 쏟아져서 사무실은 환했다. 나는 허리를 숙이고 어느 책상 파티션 아래로 몸을 낮춘 뒤 남자가 들어간 문 쪽으로 이동했다.


시계를 확인했다. 낮 열두시 이십 오분. 점심시간은 아마 한시간 정도겠지.

남자가 들어간 방은 아마 팀장이 사용하는 방인듯 했다. 벽으로 따로 공간을 구분해놓은 걸 보면 그 정도로 높은 직함이 아니면 사용하지 못하는 방으로 보였다. 그래서 안에 들어간 남자가 도대체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덜컹 -

“하 씨바, 이제 간다. 야. 이 새키 책상 존나 더럽더라.”


슬쩍 몸을 돌려 직원에게 보이지 않도록 숨었다. 파티션 뒤에 쭈그리고 앉아서도 직원의 통화내용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몰라, 지가 지 자리에 놓고 오라고 했으니까. 난 놨다, 분명히. 몰라, 못 찾으면 지 잘못이지.”


제발 잘 보이는 데에 놨다고 해주라, 제발......


덜컹 -

직원이 사무실의 유리문을 밀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또 보안장치가 되어있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열렸던 유리문이 크게 왔다갔다하면서 서서히 닫히는 소리 뿐. 유리벽 너머로 직원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 나는 서둘러 아까 직원이 나왔던 방 문 앞으로 순간이동했다.


“휴우!”


한숨을 푹 내쉬고 몸의 긴장을 풀었다. 이제 쉬운 일 뿐이다. 들어가서 평가표를 챙기고 빠져나가기만 하면 끝.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오메.”


직원의 말대로였다. 들어가자마자 꽉 차서 넘친 휴지통과 함께, 온갖 책과 잡동사니가 올려진 책상이 나를 맞이했다. 저 멀리까지 밀려있는 사무용 의자와 그 의자 위에까지 쌓여있는 책들로 봐서 아마 팀장이라는 사람은 직원 말대로 정리를 잘 하는 스타일은 아닌 듯 했다.


어질러져 있는 책상 위에서 찾아야할 건 평가표. 아까 그 직원이 들고 있던, 200장은 되어보이는 그 종이 뭉치를 찾으면 될 일이다. 찾는 거야 금방 -


덜컹 -

“그래서? 어디 놨다고?”

“아, 네. 팀장님 책상 위에 놨습니다.”


욕이 저절로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틀어막았다. 숨을 곳, 숨을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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