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헌이. 넌 별로 위기감이 없냐? 어?”
“예? 무슨......”
“일단 들어가서 잘 있나 보자.”
덜컹 -
몇 번의 뚜벅소리 이후 방문은 금세 세게 열렸다. 곧 지체없이 발소리는 책상 앞까지 왔고, 곧 서류더미를 이리저리 치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머리 위에서.
“아니, 어디다가 놨는데, 어?”
“예, 여기있습니다.”
내가 책상 밑, 다리가 들어가는 공간에 엎드린 사이 그들은 그 위에서 평가표를 확인하고 있었다. 만약에 팀장이 책상 안 쪽으로 돌아와서 굳이 자리에 앉는다면 나는 꼼짝없이 들킬 판이었다......!
“김주헌이.”
“예.”
“내가 점심시간에 일 시켰다고 짜증나나?”
“아뇨. 아닙니다.”
종이 몇 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동안 팔락거리며 몇 장의 종이가 더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 이후에야 팀장은 말을 이었다.
“내가 괜한 일 시킨 것 같아?”
“아뇨.”
“그러면, 별로 안 급한 일인 것 같아?”
“아닙니다.”
또 다시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 아마 평가표를 확인하고 있겠지. 나는 숨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그들이 빨리 방을 나가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러면?”
“......예?”
“그러면. 왜 그렇게 짜증내냐고.”
“아뇨, 저는......”
“왜 그렇게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냐고. 어?”
콰앙-!
“어엉?!”
누군가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비명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두 손으로 간신히 틀어막고, 나는 숨을 꾹 참은 채 귀를 쫑긋 열었다.
“내가 왜 이거 챙기라는지는 알지?”
“예! 그 아까 정문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래. 그러면.”
“예?”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냐고, 묻잖아, 인마.”
“예, 그, 빨리 수습해야죠.”
“내가 왜 굳이 밥먹다가 다시 들어왔는지 알아?”
모르겠는데요. 대신 대답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다. 그냥 천천히 식사 하고 들어오시지 그랬어요, 대체 왜 밥 먹다가 굳이 다시 들어온 건데요?
“김주헌이 니 태도 때문이야. 뭐? 이미 대조를 하고 있다고? 스캔본이랑? 그럼 끝나?”
“아, 그게..... 처음에 있는지만 확인하라고 하셔서......”
“그래. 그건 헷갈릴 수 있어. 그런데 내가 다시 전화를 받아서 얘기했잖아. 내 자리에 가져다 놓으라고.”
“예.”
“그럼 그냥 가져다 놓음 되잖아, 왜 꼬치꼬치 딴지를 걸고 있느냐고. 어? 굳이 필요할까요, 양이 많네요, 누가 확인을 하고 있네마네, 뭐 이게 몇 박스 돼? 이게? 어?”
여러장의 종이가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충 머릿속에 그림은 그려졌다. 평가표 뭉치를 들고 직원 얼굴 앞에 흔들어보이고 있는 팀장의 모습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가 아니라, 일하는 태도를 말하는 거야. 어? 요새 한 두 번도 아니고. 왜 그러는데, 도대체? 일하기 싫어? 김주헌이. 대학도 좋은 데 나왔다며?”
와, 진짜 듣기 싫다. 회사 들어가면 다 저러나...... 들키면 어쩌나 긴장감보다, 서있는 직원에게 측은함이 먼저 들게 되는 건 팀장으로 보이는 남자의 몇 마디로 충분했다. 사과를 해도 저러면 뭐 어쩌라는 건데? 애초에 지시를 중간에 바꿨다면서?
“잠깐 있어봐.”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책상 옆을 돌아 자리로 돌아오는 발소리.
“!!”
가만히 있으면 들킨다, 어디로, 어디로 가야하지? 하지만 바닥에 엎드려서는 도무지 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이거 봐, 이거 몇 장이나 되는데? 세보긴 했어?”
발소리는 책상의 옆에서 멈췄다. 안좋은 예감이 뒤늦게 소름이 되어 전신으로 타고 흘렀다. 지금 빨리 숨거나 피할 곳을 찾지 않으면 끝이다. 옆에 멈춘 사람은 곧 의자 쪽으로 돌아올 거고, 그러면 난 끝이다!
엎드린 상태로 필사적으로 눈을 사방으로 돌렸다. 하지만 책상 밑에서는 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숨긴 했지만 자승자박인 셈. 다 가려져있으니 순간이동을 할 곳도 없었다.
“세 보기는 하고 얘기한 거냐고. 양 많은 거. 어? 그냥 몇 장 훑어보고 대충, 좀 종이 좀 많아보이니까 대충. 어? 그냥 그렇게 얘기한 거 아니냐고. 아니 이게 많아? 이게 몇 장인데, 이게 많아? 들고 올라오기 힘들 정도야?”
“아닙니다.”
이미 김주헌씨의 목소리는 한참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 처음 보는데도 측은함이 드는 안타까운 사람. 그 사람이 어떤 자세로 서 있는지는, 책상 밑 틈새로 들어오는 그림자로 충분히 보였......
‘책상 밑!’
책상 밑에는 바닥과 떨어져 틈이 나 있었다. 딱 손가락들이 비집고 들어갈만큼! 그렇다면 그 틈새로 몸은 못 끼워넣어도 시야 정도는 확보할 수 있다! 책상의 맞은 편에 있는 건 열린 방문이니까, 눈만 한 번 깜빡이면 되는데......
그러려면, 그렇게 얼굴을 바닥에 붙이려면 몸을 움직여야 했다.
“......”
숨을 꾹 참았다. 한 번만. 한 번이면 된다. 문은 열려있을테니, 방문 너머의 복도로 순간이동 한 다음, 사무실 내에 아무 책상 밑에 숨기만 하면 된다!
“아휴, 대학 나오면 뭐해, 좋은 대학 나오면 뭐하냐고. 어?”
툭. 묵직한 종이 뭉치가 책상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바닥에 붙이려던 나는 곧바로 움직이던 걸 멈췄다.
“에휴...... 나가.”
“예?”
“나가자고. 밥 안 먹을 거야?”
“아, 예......”
“나도 밥 못 먹었어. 다른 팀원들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후딱 가서 먹고 오자고.”
“예, 알겠습니다.”
“대신 돌아와서 각오해. 방송 자막이랑 점검하는 것도 네가 직접해. 알았어?”
“예.”
“하 씨. 표정 안 푸냐, 어? 뭐라 한 소리 했다고 얼굴 구기고 말야. 표정 관리 좀 해라. 요새 애들이 이래서...... ”
바로 옆에서 나던 발소리는 어느새 다시 문가로 움직였다. 묵직한 구둣발소리, 질질 끄는 듯한 발소리가 함께 방문 앞으로 움직였고, 곧이어 쾅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
닫힌 방문 너머에서도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다음 유리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숨을 참고 있다가, 그 다음에야 겨우 숨을 내뱉었다.
내가 어쩌자고 이걸 도와주겠다고 한 거지?
생각해보면 오지랖이다. 아니, 만용이다. 상대가 불편할 정도로 끼어드는 게 아니라, 애초에 능력이 안 되는 데 도와주겠다고 나선 거니까!
“하아.”
인기척은 없었는데도 책상 밑에서 바로 나올 수가 없었다. 손발이 후들거리고,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이 쿵쾅거렸다.
[아저씨, 괜찮아요?]
“어, 어.”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시간을 확인한 다음이었다. 열두시 사십 오분. 언제 다른 직원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시간이다. 나는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뒤 책상에서 평가표를 통째로 챙겨서 가방에 쑤셔넣었다. 한 쪽 어깨에 메고 걷기에는 묵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두 손으로 들면 더 의심스러울 것 같았다.
“확보했어. 지금 바로 나갈게.”
[네! 저는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을게요.]
복도로 나가자 이미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많은 직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복도에서 통화를 하는 사람, 선 채로 마주보고 수다를 떠는 사람들, 입에 칫솔을 물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점심을 빠르게 먹고 복귀한 사람들도 꽤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후다닥 화장실로 향했다.
다행히 화장실은 조용했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으로 가서 나는 곧바로 근처 건물을 확인했다. 아쉽게도 옥상이 보이는 낮은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창문이 난 쪽은 차들이 지나다니는 대로 근처.
슬쩍 발뒷꿈치를 들어 바로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사람들이 다니지만 비교적 시선이 쏠리지 않는 화단이 눈에 들어왔다. 옳거니, 저기다. 지금 바로 -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 다 있다니까.”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서 보는 척을 했다. 곁눈질로 쳐다본 쪽에는, 또 다른 직원이 입에 칫솔을 물고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 프로 끝난지가 일년이 지났는데 이제와서 왜 그러는 건데? 카악 - ”
곧이어 치약 거품을 뱉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나는 뉴스를 보는 척, 화장실 창틀에 걸터앉아 칫솔을 손에 들고 있는 남자를 흘끗 쳐다봤다.
“아 몰라, 짜증나. 일단 끊어봐. 다시 전화할게.”
남자는 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양치를 시작했다. 세수까지 하고 휴지로 얼굴을 닦은 그는, 슬쩍 내 쪽을 쳐다보고는 화장실 문을 닫고 나갔다. 매너는 좋구먼.
“후우......”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한숨을 시원하게 내뱉고, 나는 다시 가방을 단단히 끌어안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연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보였다. 한 번 고개를 들 때마다 점점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내 다섯 번을 넘겼을 때는 어느새 굵직한 눈물을 몇 방울씩 흘리고 있었다. 나는 아라가 준 검은색 안면 보호대가 잘 씌워졌는지 확인하면서 말했다.
“저기, 그만. 됐어, 알았어, 알았어.”
“감사합니다, 진짜로.”
내가 두 손으로 어깨를 붙잡고 나서야 다연은 겨우 인사를 멈췄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지도 않고, 두 팔로는 서류가방을 꼭 껴안은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울기만 했다.
“좋은 일인데 왜 울어. 그만.”
“너무 감사해서요......”
그녀는 다짜고짜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왔다.
첫 느낌은 묵직함이었다. 다연의 머리 무게가 아니라, 몸을 통째로 기대오는 것 같은 무게감에 뒤로 밀려날 뻔했다. 그 다음에는 머리카락. 볼과 살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이 코트 속에 셔츠를 타고 흘러내렸고, 마지막으로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과일향이 코를 찔렀다.
“야, 옷 젖는다. 그만 울어.”
갑작스런 스킨십에 당황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밀쳐내자니 울고 있는 사람에게 가혹한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나 이거 새 옷이라니까? 그만. 뚝.”
어색하게 손을 뻗어서 다연의 머리를 토닥였다. 생각보다도 훨씬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을 끌어당겼고, 과일향은 더 진하게 코끝을 찔러왔다. 마치 그게 작동 버튼이라도 된 것처럼 내 왼손은 그 다음 저절로 다연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위 아래로 쓸었다가, 심장 박동에 맞춰서 차분하게 두드렸다가......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다연은 우는 것을 멈췄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들춰봐야죠. 정말로 자막으로 나간 거하고 실제 평가본이 다른지.”
“볼 게 많겠는데.”
“빨리 해야 해요. 평가표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면 그 쪽에서 다시보기 영상 수정할 수도 있으니까.”
다연의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흥건했지만,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초롱초롱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부릅 뜬 눈과 꽉 쥔 두 주먹, 그 두가지로 충분했다. 이다연이 삶에 대한 의욕을 다시 찾았다는 걸 확인하기에는.
“그래. 잘 해봐.”
“저, 혹시......”
다연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코트자락을 붙잡았다. 또 다시, 아까 머리카락을 쓸어줬을 때처럼 생각이 잠시 멈췄다.
“제가 뭐 어떻게 해야할까요? 뭐라도 갚고 싶은데, 감사해서......”
눈이 정말 컸다. 다연은, 가까이에서 얼굴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눈이 정말 컸다. 물론 아직 솜털도 확연하게 보이는 하얀 피부라든지, 작지만 도톰한 입술이라든지, 눈이 향할 곳은 그 외에도 정말 많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얼굴의 반의 반 정도는 차지하는 것 같았다. 만화 캐릭터가 튀어나온 것 같은 기분.
그럼에도 오히려 정신이 명료해졌다. 그래. 내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방송국에까지 들어가고, 문서를 빼내기까지 하는 건 고작 이런 사소한 감정의 휩쓸림 때문에 한 게 아니다.
“됐어.”
다연의 어깨를 붙잡고 슥 밀어냈다. 최대한 기분 나쁘지 않도록, 정중하게 느껴지도록.
이 능력이 의미를 가진 건 사람의 생명을 구하면서부터다. 처음 시작은 사이렌 소리를 듣고 대충 뛰어나간 거였고, 그 다음 사고 때마다도 ‘일단 살리고 보자’라는 일차원적인 생각이긴 했지만, 내가 그렇게 거리낌없이 달려갈 수 있었던 건 사람의 생명보다 우선하는 가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니까.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살아야 빛을 보고 살아야 댓가를 치를 테니까.
다연을 구한 것도 그랬다. 끊임없이 자살 시도를 하려는 연습생을 구했던 거지. 자신이 밝힐 수도, 갚아줄 수도 없는 거대악 앞에서 절망하는 사람을 구했던 거다.
“앞으로 뭘 하든 죽지만 마. 그게 네가 할 일이야.”
사는 것. 인생 아무리 억울하고 짜증나도 일단 사는 것.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을 하고 뒤돌아섰다. 코트 안으로 땀과 다연의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셔츠 때문에 갑자기 추워진 것 같았다.
그래, 살아야 같이 폭포를 보러 가든, 돈 없다고 투정을 부리든 할 테니까.
“아참, 그래서. 만약에 그 사람들이 조작했다는 게 확실해지면 어떻게 할 거야?”
“그야......”
다연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위를 쳐다봤다가, 내 두 눈을 번갈아서 쳐다보다가, 바닥에 내리깔았다가. 한참동안 그렇게 눈을 굴리던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나를 쳐다봤다.
“하나는 확실해요.”
“뭔데?”
“모두가 알게 할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