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며칠은 평온했다. 사람을 구해야 할 큰 사고도 없었고, 대단한 뉴스거리도 없었고. 마침 나도 능력을 쓰지 않고 조용히 있어야 했고. 별 일없이 마지막 학기의 수업에 참석할 뿐이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아라에게 자소서 첨삭을 받는 일이 없어졌다는 거다. 이미 세일그룹 방위사업 연구소와 경찰청 특수 수사팀. 둘 중에 하나는 가는 것이 확실해졌으니까. 물론 그것 때문에 정신력은 하루하루 쇠하는 기분이긴 했다. 아직 어느 쪽으로 가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면, 다른 쪽은 나를 엄청 욕하겠지.’
최서아씨와 최무혁씨가 서로에게 보인 모습을 보면 분명했다. 아니, 욕으로 끝나면 다행이지. 아직도 보안요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모습이나, 카페에 앉아있던 손님들이 전부 내 쪽을 쳐다보는 것이나, 그 와중에도 목과 손에서 뚜둑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한서아씨의 모습은 아직도 선명하게 내 머릿 속에 남아 있었다.
“아휴......”
그렇다고 이걸 누구한테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령 순간이동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빼더라도 욕만 바가지로 먹을 고민이다. 두 회사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고? 이 취업난에? 그게 고민이야?
마음 한 구석에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밤에도 뭔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처럼 찝찝한 마음을 억지로 재운 뒤에야 잠에 들곤 했다. 나눌 수 없는 고민, 혹시 괜한 짓을 한 것 같은 걱정,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우려, 무엇 하나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들 뿐.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서 좋을 건 없지.
[검색어: 세일그룹 연구소]
컴퓨터를 켜고 집단 지성의 힘을 빌려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이자 시작인 셈이다.
[검색 결과: 1976년도에 세일그룹에서 설립한 연구소. 최근에 세일DT(Defence Tech.)로 이름을 바꾸면서 연구 인력을 대폭 증원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요 연구분야는 방위산업. 자주포와 탱크를 납품하던 방위산업체를 인수하여 ......]
그러니까 방위산업이라하면, 전쟁에 쓰이는 무기들을 개발하는 건가?
생각해보면 내 능력을 연구하게 되면 가장 효과적으로 쓰일 분야같긴 했다. 첩보, 침투에도 용이할 것이고 구출에도 용이할 것이고, 정보수집은 말할 것도 없고 주요 요인 암살에도 잘 쓰일테니.
‘되게 위험한 능력이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편하게 생각했구나, 하고. 처음에 능력을 얻게 된 후에도 뭘 하고 살지만 걱정했었지. 유튜버를 해볼까, 구직활동에 써볼까, 그러다가 아라의 제안으로 사람들을 구하는 데에 쓰고 나서야 보람을 찾았고. 물론 그것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었지만, 먼 미래나 진로를 결정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만약에 적합한 환경에서 적절한 연구를 거친다면, 내 개인적인 진로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도 굉장한 도약을 이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내 능력은 그만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지도 몰랐다.
“에이, 설마.”
괜한 김칫국을 들이키는 느낌에 고개를 휘휘 젓고 다시 키보드에 손을 가져갔다.
[검색어: 경찰청 특수수사팀]
[비슷한 검색 결과: 경찰청 특수수사과]
응? 특수수사팀이라는 건 없는 건가?
[검색 결과: 경찰청 중대범죄수사과 - 특수수사과에서 넘어옴]
[각 부서별 특수범죄의 수사를 담당하는 경찰 최강의 수사 부서, 주로 대규모 경제 및 공직범죄나 국익에 치명적 손상을 입힌 사건에 대한 기획수사를 담당한다. '대한민국의 FBI'나 '경찰의 중수부' 같은 별명이 있다, .....]
아하. 그러니까 한서아씨 말한 경찰청 특수수사팀이 여기인 건가?
‘그런데 이름을 틀릴 수가 있나?’
말하는 투나 행동거지를 보면 사소한 걸 신경쓰는 타입은 아니긴 했다, 한서아씨는.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쳐도 본인이 속한 부서의 이름 정도는 헷갈리면 안 되는 것 같은데? 심지어 경찰 중에서도 나름 경력이 어느정도 있는 사람일텐데 이름을 아예 틀리게 말할 수가 있는 건가?
계속 검색해봤다. 그녀가 말한 특수수사팀으로 검색해보고, 비슷한 결과라는 특수수사과도 다시 검색해보고. 하지만 대부분 어디 드라마나 작품의 발췌본 일부가 검색될 뿐, 제대로 된 조직이나 홈페이지는 하나도 나오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검색어: SIU]
[대한민국의 만화가. ]
이게 아닌데?
[그 외 검색 결과: 서던 일리노이 대학교 / 삿포로 국제 대학 / ...]
눈을 씻고 찾아봐도 SIU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국내 경찰, 혹은 수사팀과의 연관성도 조금도 없었다. 잠시만, 특수 수사팀이라고 했으니까.... Special Investigation...
“팀, 이면 SIT인데......?”
두 손으로 뒤통수를 잡고 등받이에 기대 누웠다. 특수수사팀이 대체 뭐야? 무슨 특수수사팀인 건데? 유력한 건 중대범죄수사과이긴 한데, 하지만 하는 일의 중요성이나 위치를 보면, 절대 이름을 헷갈릴만한 곳은 아니다. 그렇다고 중대범죄수사과가 아니라고 하자니 딱히 들어맞는 이름의 조직도 없다.
‘그 안에 팀이 또 있는 건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노트북을 덮자니 지금까지 찾아본 정보들이 아까워서 나는 화면을 켜놓은 채 거실 소파에 누웠다. 어렸을 때부터 써와서 가운데가 움푹 패인 소파. 할머니랑 둘이 살다보니 험하게 쓰진 않아서 흠집은 없었지만, 이렇게 누워서 잠이라도 들면 가운데가 쑥 들어가다 보니 항상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곤 했다.
할머니도 안 계신 집은 조용했다. 이제 막 저녁으로 접어드는 시간임에도 이웃집에서도 별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아라는 자신의 새 아파트보다 내가 사는 이 오래된 아파트가 층간소음이 더 적다고 했었지. 얼마나 조용했는지 창문 너머로 새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미 해도 많이 기울어서 노오랗게 진해진 햇빛이 흘러들어왔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긴 그림자가 여기저기 드리우고, 선선한 바람도 나무를 간지럽히는 시간.
그러고보니 그 때도 그랬다. 아빠와 놀러 가기로 했던 날. 그 토요일 아침에도 지금처럼 참 평온하고 고요했었지. 적어도 아빠가 일어나서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그랬다. 무슨 이야기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받고 난 후에도 아빠의 표정이나 분위기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으니까 별 일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거다.
“수하야, 아빠가 미안한데.”
미안하지만 다음에 놀러 가야겠다고 말을 한 건 놀이터에 도착을 하고 나서였다. 한껏 기대에 차있던 내게 아빠의 갑작스런 통보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굳이 아빠와 인사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회사에 가야하는 상황도 미웠고, 그걸 옷 다 입고 나온 다음에야 말해주는 아빠가 밉기도 했지만, 적어도 잘 다녀오시라는 말은 하고 싶었다.
다만 그 고무공 풀장에서 아빠가 출발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던 건 내가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내가 울면 아빠가 회사에 나가서도 마음이 불편할텐데, 괜히 서운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눈물이 다 마르면 나와서 인사라도 하려고 했었는데.
겨우 눈물을 꾹 삼켜내고 숨었던 풀장에서 일어났을 때, 이미 아빠는 회사로 출발해있었다. 하다못해 풀장에서 억지로 꺼내서 인사라도 해주지. 도대체 얼마나 급했길래 할머니에게 연락만 남겨놓으시고 달려가신 건지, 내 얼굴도 못보고 가신 건지.
짹 짹 -
그 때도 그 놀이터에서는 그런 소리가 들렸다. 이름도 모르는 새가 멀리서 울고, 고무공 사이로 옅은 노란빛의 아침 햇살에 새어들어왔었지. 그리고 그 고무공들에 파묻혀서 보이지는 않았어도, 그 위에서 아빠가 날 내려다보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었다.
“수하야.”
“......”
“수하야, 아빠 가야 돼. 응?”
“......”
“수하야, 야!”
“......”
눈이 저절로 떠졌다. 멍한 눈을 겨우 초점을 맞춰서 깜빡이니 거꾸로 보이는 아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많이 피곤해? 낮잠도 자고?”
대답 대신 눈을 비비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팅이 덜 된 컴퓨터처럼 머리를 몇 번 흔들어도 도무지 잠이 깨지 않았다. 풀로 붙여놓은 것처럼 눈을 뜨기도 힘들어서, 나는 띵한 머리를 손으로 짚은 채 한참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왜 왔어?”
촉촉해진 눈가를 대충 얼른 닦아내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겨우 입을 뗐다. 곧 이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들어보니, 아라는 뭔가 가득 들어있는 비닐봉지 하나를 들어보이고 있었다.
“바람이나 쐬러가자.”
“바람?”
문득 켜져있는 노트북이 눈에 들어왔다. 불과 몇 분 전 검색했던 수많은 단어들과 그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고민들이 떠오르자마자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지.”
“야, 야! 마스크 챙겨라, 어?”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과 몇 분 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침범할 일 없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건물의 옥상 난간에 다리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아라가 사온 맥주를 따고 건배를 한 뒤, 나는 팔을 뒤로 짚으면서 눕듯이 앉았다. 해질녘 한강을 가운데에 둔 서울의 풍경은 또 봐도 예뻤다.
“에휴......”
“왜 한숨이야? 일도 잘 해결했고, 진로는 정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걱정이다.”
“어디로 갈 지 모르겠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오후 다섯시, 벌써 해가 많이 기운 시각. 하늘 저편이 금빛으로 물드는 동안, 반대편은 벌써부터 보랏빛으로 이불을 덮고 있었다. 먹다 남은 송편처럼 보잘 것 없이 작은 구름 몇 개만이 그림자를 만들어 내며 동동 흘러가고, 작게 보이는 도시 여기저기에서도 하나 둘씩 노란 눈을 빛내기 시작하는 시간.
“아직 시간 있잖아?”
“딱 일주일 남았지.”
“흐음.”
호록, 하고 아라가 맥주를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고민되는 게 뭔데? 하나씩 말해봐봐. 끌리는 이유랑 싫은 이유.”
“뭐...... 세일이야 대기업이고. 말할 것도 없이 조건은 제일 좋겠지. 연봉도 복지수준도 국내 최고라고 자부를 했단 말야.”
“흠. 일단 그건 가 봐야 알 수 있는 거고.”
“그치. 대신 날 가지고 실험을 한다고 했었거든.”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당연한 거지. 적법하게 절차에 맞춰서, 네 건강을 안 해치는 선이라면 당연히 해야하지 않을까? 네 능력때문에 채용하는 건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세일그룹 정도의 대기업이라면 절대로 법이나 규칙에서 어긋나는 무리한 실험을 하지는 않겠지.
“그럼 그 특수수사팀은 뭐가 끌려?”
“솔직히 모르겠어, 거긴.”
아라의 말을 듣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려봤다. 경찰이라기보다 깡패에 가까웠던 한서아씨. 세일그룹 본사까지 쳐들어와서 행패를 부리고, 수십 명의 보안요원의 제지에도 망설임없이 돌진하던 모습. 말투도 욕설도 도저히 경찰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최무혁씨가 좋은 연봉과 복지수준이라는 조건을 말했을 때에도, 그저 연금을 준다는 조건 하나로만 퉁치던 그녀였다.
“그래도 고민하는 이유는?”
아라에게 생각을 정리해서 말을 하려고 애썼지만 힘들었다. 마음의 끌림, 머릿속의 계산, 아무리 가지런하게 정돈해서 차근차근 말로 풀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던 나는 결국 하나씩 풀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우(SIU)가 무슨 팀인지는 모르지만, 대충 경찰 소속이니까 내가 들어가게 되면 무슨 일을 할지 감이 온다?”
“무슨 일을 할 것 같은데?”
“능력으로 범죄자를 잡거나 하겠지. 아니면 위험한 사람들을 구출할 수도 있을테고, 뭐...... 아무튼 옳은 일을 할 거란 말이지. 법을 지키고, 사람을 구하고, 뭐 그런 거.”
“그런데?”
“세일그룹에 가서는 그냥...... 실험체가 될 뿐이잖아?”
“네 능력을 써서 네 스스로 보람이 생기는 일을 하고 싶은 거지?”
잠시 입을 멈췄다가,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려서 아라를 올려다봤다. 맥주 캔을 다시 입에 가져가면서,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맞네. 맞는 것 같네, 어.”
“근데 그건 모르는 거다?”
아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맥주를 다시 한 모금 들이켰다. 그녀는 캔을 옆자리에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서 먼 하늘을 쳐다봤다. 그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하늘은 더 어두워져 있었다. 금빛 하늘, 붉은 노을 같은 건 이미 파랗게 물들어버린지 오래. 아까 보랏빛이 깔려있던 곳은 이제 짙은 남색 파도가 서서히 물결치듯 올라오고 있었다.
“세일그룹에서 너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한테 도움을 줄 수 있는 걸 발명할 수도 있잖아?”
“흠.”
확실히, 세일그룹의 연구에 협조하는 것이 세계에 어떤 반향을 일으킬 지는 아직 모른다. 아무 소득도 없을 수도 있지만, 행여 이 능력을 복제하거나 다른 물체에 적용을 시킨다거나...... 아무튼, 그렇게 된다면 혁신적인 교통수단을 발명할 수도 있는 일이고, 위급한 사고 현장에서 인명피해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수트 같은 걸 개발할 수도 있고.
“그리고, 경찰이라고 꼭 정의로울 거란 생각은 하지 마.”
“아, 그건 그렇지.”
그건 요 근래 있었던 몇가지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동학대범을 몇 번이고 놓아줘서 아이가 사망에 이르게 했다든지,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혀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감옥 살이를 하게 했다든지, 자녀를 괴롭히는 성추행범을 잡아달랬더니 직접적인 피해가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결국 자녀가 죽은 다음에야 성추행범을 구속시켰다든지. 애초에 집단 폭행 전력이 있었던 사람이 경찰이 되고 진급도 하는 세상인데, 누가 경찰이 무조건 깨끗하고 정의롭다고 믿겠어.
물론 제도와 의식의 한계에도 부딪힐 일이 많을지도 몰랐다.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관할을 따지느라 구하지 못한다거나,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윗선에 공을 돌려야 하거나, 누가 봐도 맞는 일을 해야하는데 관행이라는 이유로 그러지 못하거나...... 이마저도 영화나 드라마로만 겪은 일이니 실제가 어떨지야 모르는 일이긴 하다만.
“그래도......”
반박하려던 찰나에 한서아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누가 봐도 그게 깡패지 경찰이냐고.
“아무튼, 잘 생각해봐. 세일그룹이 아무리 이미지가 안 좋다지만 국내 최고, 세계 10대 기업 안에 드는 기업이야.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한테 좋은 영향을 끼치면서 역사에 남을 가치를 창출하는 건 그 쪽이 될 수도 있어. 언제까지나 인명 구조만 할 수는 없잖아? 네가 볼 수 있는 데만 가서 구하고, 못 보면 또 사람들이 죽어가고. 그건 좀 능력이 아깝지 않아?”
어쩌면 내 욕심인지도 몰랐다. 당장 생명을 구해왔던 것이 뿌듯하고 보람차긴 했지만, 한 순간의 알량한 만족감을 위해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 내가 조금 더 고생하면, 조금 더 높은 차원을 생각한다면 훨씬 더 많은 일을 이뤄낼 수도 있는 건데.
“그래, 괜히 이번 일처럼 측은해보이는 사람한테는 다 가서 이야기 들어주고 할 수는 없잖아. 난 아직도 찝찝해, 그 여자.”
“누구? 이다연?”
“그래.”
며칠 전의 일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갔다. 한강에서 떨어지려던 다연, 조작됐다는 오디션, 그 증거가 숨겨진 방송국 본사와 그 안에 몰래 들어가서 평가표 원본을 가져다 준 일. 그걸 받고 나서야 다연은 이제 죽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 다음에는 진실을 알리겠다는 다짐을 하고 연락을 끊었었다.
생각해보면 아라의 말도 맞다. 자기 목숨을 담보로 뭘 좀 해달라, 억울한 사연 좀 풀어달라면 다 들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 다연이야 운 좋게도 죽겠다고 뛰어드는 순간에 내가 겨우 구한 거긴 하지만.
그러고보니 문득 아라에게 궁금한 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