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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바람 쐬러 가자(2)

by 봄단풍

“야, 김아라.”

“왜?”

“넌 어떻게 생각해?”


뒤로 눕혔던 몸을 일으키며 앉았다. 옆에 앉은 아라가 나를 쳐다볼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는 다시 물었다.


“그 아이돌 말야. 다연이 말대로 조작된 걸 알리는 게 맞을까?”

“‘다연이’?”

“어. 그래. 이다연. 어?”


아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니, 뭐 친하고 그런 게 아니라 나이도 우리보다 한참 어려보이는데 뭐 이다연씨 이러기도 좀 그렇잖아.”

“애초에 이름을 왜 굳이 기억하고 있냐고, 어?”

“그게 화 낼 일이야?”


그야 며칠 지나지도 않은 일이니까 기억이 잘 나는 거지. 하지만 굳이 이런 말을 덧붙이지 말라는 것인지, 이미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것인지, 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입을 막았다.


“아, 몰라. 아이돌이고 뭐고 뭔 상관인데. 그걸 나한테 왜 물어봐?”

“그냥 네 생각은 어떤가 궁금해서 물어봤지.”


다시 머리 뒤로 두 손을 올려 팔베개를 만들고 뒤로 누웠다. 하늘은 이제 완전히 남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이미 서울 곳곳에는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고, 물이 찬 것처럼 푸르게 물들은 도시 곳곳에는 노란 불빛들이 눈을 뜨고 있었다.


“나야 뭐...... 걔네 음악도 잘 만들고 팬들도 많고 그러던데.”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나는 걔네 팬도 아니고 그만큼 관심도 없어. 그냥 그렇다더라, 잘하는 애들 오디션으로 뽑아서 만들어놨으니 퀄리티도 괜찮은가보다, 그게 다지.”

“근데 조작한 거잖아? 미리 데뷔할 애들도 정해놓고, 점수도 조작하고.”


그런데 이 말을 듣고도, 아라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뭐, 그거야 밝혀지지 않겠어? ‘다연이’가 알아서 어떻게 하겠지. 아직 정말 조작이 있었는지 어땠는지도 모르잖아. 걔가 오디션을 못봐서 떨어진 걸 수도 있고.”

“순위가 5위에서 한 주만에 20위권 밖으로 떨어지는 게 말이 돼?”

“야, 왜 걔를 그렇게 감싸? 그럴 수도 있지.”


아라는 앉은 채로 누워있는 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 오디션 프로그램 찾아보니까, 매 주마다 다른 미션으로 평가하더라. 누적점수제가 아니라고. 미리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해서 유리한 것도 아니고, 그만큼 어느 주에는 갑자기 순위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거야.”

“흐음.”

“나도 안타깝지. 우리보다 훨씬 어린 앤데 한강에 빠질 생각도 하고. 얼른 진실이 밝혀지면 좋겠다, 나도. 근데 제대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별 생각없어, 나는. 지금 데뷔한 애들이 자격이 없다하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잖아? 다들 잘한다고 인정받고 실제로도 성과를 거두고 있는 애들인데 미워할 필요까지 있나?”

“하지만 애초에 뽑히는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거잖아?”


나는 결국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앉았다. 갑자기 아라의 얼굴이 가까워졌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봐봐, 그 아이돌 오디션에 참가한 애들 중에 자격이 부족한 애들이 누가 있었겠어? 애초에 다 비슷비슷한 수준이었을텐데, 모두가 데뷔할 수는 없으니 공정한 경쟁으로 뽑자는 게 오디션 프로그램인 거잖아?”

“그래 네 말이 맞는데......”


아라는 그렇게 내 말을 끊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늘 그랬다. 답이 머릿 속에 정해져 있더라도, 가장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고 고른 뒤에야 차분하게 말을 정리해서 대답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참 생각한 뒤에도 결국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어깨를 늘어뜨릴 뿐이었다.


“난 모르겠어. 만약에 방송국에서 차후에라도 법을 어긴 것이 발견된다면 뭐, 처벌을 받아야겠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지금 벌써 잘못했다고 손가락질할 필요는 없지 않아? 팬들이 의문을 가질 정도로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애들 인성이 나쁜 것도 아니고.”


하긴.

그것도 그렇다.


“평가표 원본을 가져다 줬으니 걔가 알아서 하겠지.”

“그래, 너도 거긴 이제 그만 신경 꺼.”


호록. 아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어째 평소보다 마시는 속도가 좀 빠르다. 그러고보니, 아까 먼저 산책을 가자고 한 것도, 맥주를 사온 것도 아라였는데.


“너 무슨 일 있냐?”


어쩐 일인지 아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

“......”


고작 맥주긴 하지만 술이 그렇게 센 편도 아닌데 무슨 일이람. 아라는 내 말을 듣고도 한참이 말이 없었다.

그 사이 서울은 완전히 밤으로 물들어있었다. 하늘에는 별 하나 보이지 않은 남색 이불이, 그 아래 땅에는 노랗고 빨갛고 하얀 색색깔의 별들이. 멀리 보이는 다리 위에는 빨간 눈들이 반짝이며 열심히 기어가고, 높이 솟은 빌딩들은 노란 불빛들을 빛내면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광성이랑 헤어질까봐.”


아라가 그 말을 꺼낸 건 그로부터도 한참 뒤였다. 그건 아라의 남자친구 이름이었다. 변광성. 그녀가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사귀었고, 지금까지 육년 가까이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


“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맥주 캔을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려놨고, 뒷머리를 살짝 긁적이다가 고개를 돌려 야경을 내려다봤다.


“왜?”


아라는 대답하는 대신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무릎을 들고 양 팔로 껴안은 채 한참을 야경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몸을 뒤척일 때 쯤 그녀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은 순간이 있는데, 꼭 그 순간을 마주해야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걔 아직 군대 안 갔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나름 버럭 소리를 지른 아라였지만 평소 목소리의 반도 미치지 못했다. 남은 맥주를 전부 마셔버린 그녀는 또 다시 발 밑에 펼쳐진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나는 대신해서 그 마음을 대충 요약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둘 사이 관계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거야?”

“응.”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일어날지는 어떻게 알아?”

“감으로?”


연애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각종 매체를 통해 여자의 감은 예리하며 위험하다는 것을 배워뒀던 터라, 또 아라가 감이라고 할 때의 대부분은 확실한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말하는 것임을 알고 있던 터라 나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특히나 늘 밝고 자신있는 모습만 보였던 아라가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대.”

“응.”

“최대한 피해 보면 어때? 그게 안 되려나…….”


그리고 중얼중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 때쯤 되니 이미 아라는 기지개를 켜며 괜찮은 척을 하고 있었다.


“아유, 알아서 하면 되겠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잖아. 응?”

“마치 나의 망쳐버린 자소서들처럼 말이지.”


아라는 푸핫 웃더니 손을 들어 내 어깨를 때렸다. 나는 그 웃음을 조금 더 오래보고 싶은 마음에, 굳이 몇 마디를 덧붙여보기로 했다.


“야, 그건 피할 수 있을 때까지는 피하라는 말 아냐? 모든 일을 혼자 맞서고 싸우면서 살 수는 없다고. 피하자. 피할 일도 있는 거지 뭐. 할 수 있을 때까지 도망도 치고.”


여전히 무심한 아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할 일 미루고, 덮어놓고 잠시 즐기고 그런 건 내 전문이니까. 잘 모르겠으면 나한테 물어보고. 어?”


잠시 멍하니, 그 커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라는 아까처럼 맥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네, 그 말도 맞네.”

“그치? 아, 면접 때 이런 말빨이 나와야 했는데.”

“면접 때 그랬으면 바로 쫓겨났을 걸. 우수하씨는 문제를 만나면 피하시나보죠? 이러면서.”


아라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밝아졌다. 그래, 연애는 몰라도 김아라는 내가 제일 잘 알지.


“그럼 나도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냐?”

“뭔데?”

“걔는 나를 왜 싫어한대?”


평소 같으면 굳이 물어볼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괜히 평소에 못했던 말이 하고 싶었다.


“중학교 삼년 내내 사람을 두드려 팬 건 자기면서 내가 왜 싫대?”


그게 내가 변광성씨를 싫어하는 이유였다. 그 인간 때문에 나의 중학생 시절은 지옥이나 다름없었고, 그걸 곁에서 지켜본 아라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또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내가 아라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싫어했다.


아, 어쩌면 내가 아라랑 친하기 때문에 중학교 때부터 괴롭힌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그러면 아라랑 연애를 하게 됐으면 굳이 나를 더 미워하고 괴롭힐 필요는 없었잖아? 날 마주치면 본인의 부끄러운 모습과 죄책감으로 점철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자꾸 되돌려 읽는 기분이라 그런가 보지?


“야, 아냐. 너 안 싫어해.”


그러고 보면 아라의 속도 참 이해가 안 갔다. 나를 그렇게 챙겨주면서, 정작 나를 괴롭혔던 남자랑은 왜 만나는 거야? 아니 물론 변광성씨가 나랑 어떤 관계든 아라가 신경쓸 일은 아니긴 하지만. 나는 나고, 아라는 아라니까.


“그냥 친하게 지내는 게 좀 신경쓰일 수 있지. 넌 남자잖아.”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나는 다시 야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있잖아.”


한참이 지나고,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걔랑 왜 만나?”


당연히 아라의 표정은 굳었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보고 나서야 내가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나도 안다고. 지금 분위기에 할 말은 아닌 거. 한참을 멍하니 있던 그녀는 코트 깃에 그 작은 얼굴의 절반을 묻더니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내 질문을 확인했다.


“처음에 어떻게 만났냐고, 아니면 왜 계속 만나냐고?”

“둘 다.”


대답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아라는 옷 안에 묻어놨던 얼굴을 꺼냈다.


“사실 너한테는 얘기해줘야겠다 생각은 했었어. 너는 걔 때문에 많이 힘들었으니까. 근데 몇 번 얘기를 하려다가 타이밍도 놓치고, 너도 잊어버렸을 수도 있는 일을 자꾸 떠올리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걸 어떻게 잊어버려?”


최대한 화낸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이가 갈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학교 삼년 내내였다. 욕은 기본이고 돈을 뺏고, 자기 친구들까지 데려와서 몇 번이고 때렸던 역사가 삼년 내내 이어졌는데 그걸 잊어버린다고?


“그래, 그래서…….”


날 흘끗 쳐다본 아라의 얼굴에는 다시 그늘이 져 있었다. 다시 한참이 지나고, 아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는 처음에는 나도 걔랑 사귈 생각 없었어.”


내가 근데 왜 그랬냐는 물음을 덧붙이기 전에 아라는 계속 말했다.


“중학교 때부터 걔가 나를 쫓아다녔었거든. 고등학교 때도 그랬고. 걔가 집 앞까지 쫓아오고, 자기 친구들 시켜서 선물도 주고 그래서 너무 피곤해서……. 제발 더 건드리지 말라고, 수능 끝나고 생각해보겠다고 했었어.”


아아, 그래서 그 때쯤부터 날 괴롭히는 것도 멈췄던 거였구나. 아라에게 잘 보일 필요도 있었고, 아라를 괴롭히느라 날 괴롭힐 시간도 없었던 거다.


“근데 수능 끝나자마자 걔가 그 날부터 1일이라고 자기 친구들한테 공표를 한 거야.”

“뭐?”


이거 진짜 쓰레기 새끼 아냐?

그런데 정작 아라의 얼굴에는 어째서인지 미소가 걸려있었다.


“근데 그 쯤 되니까 그런 생각도 들었거든. 대체 내가 뭐가 좋다고 그렇게 긴 시간 쫓아다닌 걸까? 걔도 그 때 인기 많고 공부도 잘하고 친구도 많았었는데. 게다가 혈기왕성한 사춘기 남자앤데, 대체 내가 뭐가 좋다고 삼년 넘는 시간동안 꾸준히 좋아해주는 걸까, 싶어서. 그 나이 때에 그러기 쉽지 않잖아? 그렇게 오랫동안 한 사람만 좋아하는 거.”

“그래서 사귀게 된 거야?”

“생각보다 별 거 없지?”

“어. 진짜 심하게 별 거 없네.”


아라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멍하니 앞만 쳐다봤다.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몇 번이고 그녀의 마지막 말이 종소리 마냥 머릿속을 울렸다. ‘쉽지 않잖아? 그렇게 오랫동안 한 사람만 좋아하는 거.’


그래, 힘들지.

나도 해봐서 안다고.


“그리고 지금은 왜 계속 사귀는 지는……. 이제 나도 잘 모르겠네. 걔도 처음하고 달라졌고, 나도 달라졌고.”


아라의 덧붙인 말에도 내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화가 났냐하면 그건 아니었다. 다만 의아했다. 늘 나보다는 성숙했고 어른스러웠던 아라가 그런 결정을 내리고, 여태까지도 그 밑천이 보이는 남자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아라가 계속 만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속 편했다. 그것도 아니면, 사랑이란 여러 책에 나오듯이 모름지기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물론 그가 아라의 사랑이라 인정하는 건 어려운 문제긴 하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자.


그러고 보면 나는 늘 피하고 도망치는 데에 익숙했다. 그래서 주어진 상황에 납득과 합리화도 빠르다. 그러니까 신경쓰지 말자, 참견하지 말자. 아라가 저렇게 얘기하는 건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기 때문인 거다. 그냥 계속 좋은 친구로 옆에서, 그녀가 날 챙겨줬듯 나도 자리를 지켜주면 되는 거다.


“춥다.”


아라는 앉은 채로 턱을 코트 속으로 집어넣었다. 콧잔등과 눈만 빼꼼 나온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속을 괴롭히지 않기로 마음먹고 얼굴에 애써 미소를 띄웠다.


“야.”

“어?”

“나 오늘 너네 집에서 자고 가도 돼?”


뭐?

나는 멍하니 아라를 마주봤다. 촉촉해진 그녀의 눈가 위로 이리저리 흘러내린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부스스하게 귀를 덮은 그 머리카락을 귀 뒤쪽으로 넘겨주고 싶었다. 덩달아 촉촉해진 그녀의 입술은, 왠지 평소보다 더 두껍게 느껴졌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오랜만에 할머니랑 같이 자고 싶어서.”

“아……. 놀래라.”

“놀라긴 뭘 놀라.”


아라의 조부모님은 모두 아라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그 때문인지 아라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에 자주 들락날락했고, 그러다보니 가끔은 나보다 우리 할머니와 더 친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내가 못하는 애교를 부리는 것도 그녀였고, 내가 깜빡한 어버이날이나 명절에 선물을 챙겨주는 것도 그녀였다.


“하긴, 할머니도 네가 자고 가는 건 오랜만이라 좋아하시겠다.”

“그치.”


아라는 무릎을 다시 감싸 안으며 서울의 야경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슬슬 추워졌던 터라 아라와 똑같이 무릎을 감싸 안고 그 위에 고개를 올렸다. 그리고 아라가 서울을 내려다보는 사이, 나는 곁눈질로 아라의 눈을 한참이고 쳐다봤다.


“좀 추운데 이제.”

“아 그래, 가자. 집 가야지.”

“그리고……. 집에 갈 때는 순간이동 하지 말고 그냥 평범하게 가자.”

“응? 한참 걸릴텐데?”


아라는 뭔가 생각하는 것처럼 잠시 이를 앙다물고 있다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그냥. 좀 걷고 싶어.”


그렇게 우리는 옥상에서 도로로 내려온 뒤,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버스가 오자마자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사람들에게 부딪혔을 때에도, 손잡이 대신 내 팔을 잠깐 붙잡고 있을 때에도, 다행히 자리가 생겨서 뒷 자리에 나란히 앉았을 때에도, 아라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수고하세요.”


앞자리의 누군가가 인사를 하고 내릴 때에도 나는 아라의 옆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멍하니 앞을 보거나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연예인들처럼 높지는 않지만 매끄러운 콧대, 그 뒤로 비치는 서울의 야경, 그 화려함을 몇 개의 점으로 담아내는 커다란 눈동자.


“감사합니다.”


몇 개의 정류장을 지나, 삑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여전히 아라는 말이 없었고, 나도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바닥을 내려다봐도, 창밖을 내다봐도 대화의 물꼬를 틀만한 소재는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라의 옆모습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작게 오므린 입술, 창밖에서 바뀌지 않는 두 눈의 초점.


그리고 그 때, 아라의 두 눈이 처음으로 초점을 바꿨다.

“......”

“......”

아라가 나를 쳐다보는 순간 나는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지난 십여년 간 몇 번이고 마주쳤던 갈색 눈동자 안에는, 바보처럼 멍한 표정의 내 얼굴이 자리잡고 있었다. 시력이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닌데도 참 선명하게 보였다. 아라의 눈동자 안에 비친 얼굴이 멍청하게만 느껴져서, 나는 어떻게든 밝은 표정으로 바꾸려고 눈썹을 들썩였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아라의 눈은 다시 창 밖으로 돌아갔다.

대신 그녀의 머리가 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내 어깨 위로 자리잡았다.


“어......”

“......미안. 잠깐만.”


아라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입을 닫았다. 이제는 그녀의 눈을 볼 수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도 보이는 건 그녀의 잘 빗어넘겨진 머리카락과 정수리 뿐이었다. 언뜻 창밖을 보다보니 그녀의 얼굴이 비쳐보이긴 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내 시선이 보일까봐 나는 얼른 눈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고생많으셔요.”

“......?”


오늘따라 유독 사람들의 인사가 잘 들렸다. 이상하리만치. 원래 사람들이 이렇게 친절했었나? 나도 모르게 인터넷에서 캠페인 같은 게 시작한 건가? 버스 기사님께 감사하자, 뭐 그런 캠페인.


그런데 그 때에서야, 그 동안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음이라고 생각했다. 버스 밖에서 들려오거나, 버스 안의 매너 없는 누군가가 조금 크게 떠드는 소리. 하지만 그 소리에 집중하고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나는 그게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꼬마 아이가 재잘거리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빠, 저긴 어디야?”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다. 지극히 평범한 질문이었고. 다만 그 아이는 보호자 없이 혼자 탄 승객으로 보였다. 1인석에 혼자 앉아있었으니까.


“그럼 저기는?”


그런데도 아이는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니, 대화를 하고 있었다. 꼭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누군가 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다시 몇 초 후에야, 나는 그 아이가 칸막이 너머 버스 기사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하야.”

“어?”

“이제 내려야돼.”

“아, 그치.”


주섬주섬 일어나서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다. 그 사이 버스는 점점 느려졌다. 앞서 내렸던 다른 사람들을 떠올리며 입술을 달싹였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상하게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곧 버스는 멈췄고, 문이 열렸고, 그리고 내가 하지 못한 말은 카드 단말기가 대신했다.


[하차합니다.] 두 발이 땅에 닿고 아라와 함께 걸을 때까지, 아주 묘한 죄책감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에 내 신경은 다시 말없는 아라에게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차가워진 밤거리를 나란히 걸을 때에도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에 도착해서 TV를 켠 뒤, 한숨을 쉬며 소파에 몸을 눕힌 이후에야 편안하게 입을 열었다.


“좋다. 너네집 소파가 우리집보다 훨씬 좋다.”

“야, 야. 씻고 누워라.”

“아 쫌만......”


옆으로 누워서 TV 채널을 돌리던 아라의 눈이 갑자기 동그랗게 떠졌다.


[작년 오디션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오디션 프로그램을 기억하십니까? 해당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일곱 명의 소녀들이 데뷔한지도 어느덧 일 년. 무려 일 년만에, 오디션 프로그램의 점수가 조작됐다는 정황이 드러나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자세한 소식, 김주현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오. 너의 다연이가 드디어 활동을 시작했나보네?”

“아, 무슨 너의 다연이야, 너의 다연이가.”


쿡쿡거리고 웃는 아라의 발치에 앉았다. 관심있는 뉴스긴 했지만, 아라와 하룻밤을 같은 공간에서 보낸다는 생각에 묘하게 설레고 있던 터라 집중이 되지는 않았다.


[.... 인터넷에 올라온 그 당시 심사 평가표입니다. 심사위원과 담당 PD의 서명이 날인된 각 평가표에는 그 당시 오디션에 참여한 모든 참가자에 대한 매 주의 점수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진을 올린 누리꾼은 그 당시 방송자막을 통해 송출한 점수와 평가표상의 점수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조작을 하긴 했나보네?”

“그러게. 이제 뭐 알아서 밝혀지겠지.”

“웬일이래? 아까는 다연이가 떨어진 게 말이 되냐면서 버럭버럭하더니.”

“내가 언제?”


[...... 하지만 방송사의 대처도 빨랐습니다. 방송사는 심사평가표의 스캔본을 공개할 수 있다며, 오히려 인터넷에 공개된 심사평가표 원본이 조작된 것이라며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관련 업계에서는 오디션 출신의 아이돌 그룹이 CK엔터테인먼트라는 대형 기획사와의 계약에 성공하자, 이를 지키기 위한 이례적으로 빠른 대응이라는 분석이 대부분입니다. ......]


“아하, 결국 그 그룹이 결국 CK랑 계약을 한 거야?”

“응. 그런 루머 떴다고 했었잖아. 진짜 데려갔나보네.”

“원래는 일년 하고 올해 해체했어야 하는거지?”

“그렇지.”


그러니까, 그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그룹으로 데뷔에 성공했던 여러 소속사의 연습생들이 결국에는 CK 엔터테인먼트와 한꺼번에 계약을 했다는 거구나.


“어?”

“왜?”


잠깐만.

자기 소속사 연예인을 뽑아달라고 청탁을 해놓고.

그렇게해서 일년동안 대중의 인기도 받을만큼 받고 돌아왔는데,

그 연습생을 시원하게 대형 기획사에 넘겨준다고?


“뭔가 이상한데?”

“왜 그래?”


옆으로 누워있던 아라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나는 내 의문을 입 밖에 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에 빠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애초에 뇌물이든 청탁이든 조작이든, 비리를 저지른 이유가 자기 소속 연예인을 뽑아달라는 거였잖아? 어차피 일년 동안 활동 후 각자의 소속사로 돌아올테니, 그 동안 자기 소속 연예인의 상품성을 높이자는 생각이었을테고. 그렇게 높아진 상품성으로 일년 뒤에 본인의 소속사에 가져올 긍정적인 영향력을 노렸기 때문에 조작을 했을 거 아냐?


그러면 다른 소속사로 절대로 안 보냈어야 하는 거 아냐?


“뭐 이해 안 되는 거 있어? 내가 말했잖아. 돈이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 아울러 방송사는 인터넷에 공개된 서류는 내부에서 외부로 불법적인 경로를 통해 유출된 것으로 확인되며, 사내 CCTV를 통해 유출한 용의자를 파악했다고 합니다. ......]


“어엉?!”

“어?”


아라와 나는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요, 김주현 기자. 인터넷에 공개된 서류가 원본이 유출된 게 맞다면, 그 서류가 악의적으로 조작되었다는 주장과 상충하는 것이 아닌가요?]

[해당 방송사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심사평가표 원본은 도난당한 것이 맞습니다. 다만, 현재 인터넷에 공개된 서류는 조작된 것으로 실제 방송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스캔본과 내용이 다르다는 주장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 평가표 원본을 훔친 뒤, 이를 조작하여 유출하고 있다는 것이 해당 방송사의 설명입니다.]

[그리고 그 원본을 훔쳐간 용의자는 사내 CCTV를 통해 확보를 했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방송사는 해당 용의자의 신원을 파악하는대로 법적인 조취를 취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


마치 영화의 슬로우모션처럼, 아라가 천천히 얼굴을 내게로 돌렸다.


“야.”

“......”

“야.”

“왜?”

“내가 말했지.”

“뭐, 뭘?”

“이건 하지 말라고. 그 여자 좀 찝찝하다고 했어, 안 했어?”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새파랗게 질렸으면서, 아라는 그 어느 때보다 착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 좋은 일만 하고 너만 손해보게 생겼잖아. 어?”

“야, 아직 몰라. 나 마스크도 쓰고 있어서 어차피 누군지도 못 알아 볼걸?”

“CCTV 확보했대잖아. 하......”


[...... 김주현 기자, 누리꾼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누리꾼들의 반응은 반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먼저 예전부터도 조작의 정황들이 있었다면서 진실을 밝히라는 반응도 있는가 하면, 방송사에서 스캔본도 공개할 예정이고 용의자도 찾아서 법적인 조치까지 취한다는 소식에 사태를 두고보자는 반응도 있습니다.]


“아 머리야......”


아라는 다시 소파에 쓰러지듯이 몸을 눕혔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한 손은 자신의 배 위에 가지런히 놓은 아라는, 그렇게 똑바로 누운 채로 천장을 보다가 눈을 감아버렸다.


우우웅 - 우우웅 -


“!!”


아라와 내 눈이 다시 한 번 동시에 크게 떠졌다. 모르는 번호. 출처를 알 수 없는 열 한 자리의 번호가 내 핸드폰에 떠 있었다.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아까 전 TV 속의 기자가 말했던 한 마디가 계속 울려퍼졌다. ‘법적인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일단, 그...... 얼른 받아봐.”


나는 통화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우수하씨. 최무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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